8주차.<사마리아여행>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1. 예수님의 배려
70인 제자의 사역보고를 받은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아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실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 중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항상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멀리서 비유를 찾으시지 않고 항상 주변에 있는 것을 보고 비유를 들거나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 수록된 산상수훈에서 이런 광경을 엿보게 됩니다. 6장에 보면 외식으로 금식하는 자들을 경고했는데 아마 그 자리에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16-18절). 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실 때 거론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들풀들은 주변을 둘러보시고 하신 비유로 추측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당연히 예수님이 여리고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가난한 집’이라는 뜻의 베다니(메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친구 나사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친구 나사로의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이번 사마리아여행 중에도 들렀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들렀으며(요11장),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기간 중에 잠시 들렀는데(마21:17) 이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장면이 나옵니다(요12장). 누가는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곳도 베다니 근처라고 기록합니다(눅24: 50). 그만큼 예수님과 베다니의 인연이 깊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나사로가 언제 만나 친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나사로와 친구가 되면서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여동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위안이 됩니다. 우선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씻을 수 있고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여행하시면서 작정하시고 남의 집에 들어가 유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친구가 아니라면 주님이 이렇게 집에 들어가 편안함을 즐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석가 핸드릭슨은 이 모습을 ‘평온한 장면’이라고 해석합니다.
2. 한 편의 드라마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에 따라 한 편의 드라마처럼 관람하겠습니다. 핸드릭슨은 이 부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지만 너무 밋밋한 느낌이라서 드라마로 각색해 보았습니다.
1) 먼저 38절입니다.
~ 사건의 발단은 주님이 친구의 집을 방문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요11장과 본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요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을 이름과 친구 나사로의 이름이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누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마을 이름과 나사로의 이름을 누락시켰을까요? 그것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시기를 보면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 복음을 기록할 때엔 친구 비록 주님은 승천하고 없었지만 친구 나사로와 누이동생들은 생존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사는 마을 이름과 친구의 실명을 거론하면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는 시점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이름은 우리의 김씨, 박씨 같이 매우 흔한 이름이자 호칭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의 이름에는 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 마리아 하면 하도 많은 여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서 사는 동네와 가족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상 누구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은 이름입니다. 누가는 지금 이런 점을 염두하고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의 신변에 위험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이 기록될 무렵인 90년대 말경에는 이미 나사로와 누이들이 사망한 이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들의 이름들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점을 두고만 보아도 성경의 기록은 세심한 구석까지 비밀스러운 배려를 하고 있다는 점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한편, 여기선 마르다의 이름이 먼저 거론됩니다. 이것은 마르다가 삼 형제 중에 제일 맏이거나 집도 그녀의 집인 것으로 보입니다. 38절에서 마르다는 ‘자기 집’으로 주님을 영접했다고 말하고 있고 이런 행위는 요11장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마르다’라는 이름의 뜻이 ‘여주인’입니다. 또 요12:1-7에는 한 여인의 향유사건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에서 벌어진 것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마르다는 시몬의 딸 혹은 아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일한 보도를 하고 있는 마26:6-13과 막14:3-9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마르다는 주님이 직접 자기 집을 방문하는 것을 몹시 반겼던 같습니다. ‘영접했다’(welcome)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 말은 곧바로 마르다가 주님을 위해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주부의 가장 큰 사명이자 무기 중 하나는 요리를 하는 일이며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일 때가 바로 요리할 때입니다. 아무튼 베다니의 마르다 집은 주님이 오심으로 온 마을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가장 평화스러운 한 때를 맞게 되었습니다.
2) 39절입니다.
~ 주님이 오시자마자 마르다의 집은 이내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어떤 이는 38절에서 ‘예수께서’하고 단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갔을 것이라고 추론하지만 예수님이 자기 혼자 친구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고 쉬려고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유명인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사마리아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벌어진 여인과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마을 사람들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요 4장의 사건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주인공이 지금 자기들 눈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 주님은 집안으로 몰려온(물론 대문 밖에서도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앞에 천천히 입을 여셨습니다. 물론 누가는 여기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주님을 맞이하는 두 종류의 관심과 반응, 그리고 태도를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먼저 누가는 마리아에게 눈을 돌립니다(카메라 렌즈에 잡힌 마리아를 떠올리십시오). 마리아의 모습을 보세요.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바짝 다가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발치에 앉았다는 것은 주님께 가장 가까이 앉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친구 여동생인 마리아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만족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3) 40절입니다.
~ 그런데 이번에는 카메라가 마르다를 비춥니다. 마르다는 갑자기 들이닥친 주님의 일행들을 맞이하고 시장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음식 장만에 분주한 모습입니다. 최소 인원만 계산해도 주님과 12제자와 친구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하면 15~6명의 음식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일은 집 주인의 몫이요 책임입니다. 마르다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정신이 없습니다. 틀림없이 그녀도 주를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일꾼 중 하나입니다.
~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갑자기 마르다의 마음을 읽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면서도 자기 혼자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그만 짜증이 났습니다. 제일 먼저 마르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동생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동생이 자신을 돕지 않고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고 그냥 방치하시는 주님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주님에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하)
~ 이 말에는 마르다가 이미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르다는 주님에게 어째서 동생을 나무라지 않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쩔쩔 매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감히 주님을 상대로 불평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 이런 타입의 사람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마르다는 오직 자기 관점으로만 모든 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세상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1차적으로 내가 지금 음식을 장만하는 데 일손이 부족하므로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 이외에는 생각의 영역이 넓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음식 장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주님께서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일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정말로 마르다가 신중하고 현숙한 여인이라면 그녀는 오히려 말씀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릇 하나라도 소리 나지 않게 ‘조심 또 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평하며 그릇을 시끄럽게 부딪치며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 마르다는 성격이 급한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그녀는 마리아를 조용히 불러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부드럽고 친절하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공개적으로 마리아에게 요청하지 않고 주님에게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공개적인 요청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셋째로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몰라주면 매우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우리 주변에도 봉사한답시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절하게 불평하고 ‘불만 충만’이면서 왜 봉사를 한다고 나섰는지 의문입니다. 만약 마르다가 믿음이 있었다면(물론 나중에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사건 이후부터 마르다는 달라집니다)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도우미를 보내시어 그녀를 충분히 돕게 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며 나의 모든 행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하나님이 도우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인성은 그 순간 마음을 하나로 붙잡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4) 이제 결론입니다. 41~4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 주님은 이미 마르다가 어떤 형편에 처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다 아십니다. 그녀가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자신에게 말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 이 반복에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애정입니다. 주님은 나라소와 그이 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요11:5). 우리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이렇게 이름을 두 번 부르며 안타까움을 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겉으로 화가 나 있는 마르다의 속내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걱정 때문에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반면에 여기엔 주님의 애정도 있지만 이 말에는 주님의 꾸짖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주님은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의 속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요리만으로 충분한데 뭘 그리 많은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힘들어 하느냐”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짜 의도는 “그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족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마리아가 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헨드릭슨은 이 부분에 대해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 하나님의 계시를 경배하고 헌신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해설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일들이 있지만 우리가 제일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이 영생을 얻는 일(요10:28)이기 때문이며 진리(요14:6)를 깨닫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 노래했듯이 “복 있는 사람은~ 오직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1:1-2)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 하리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마리아를 예로 들면서 우리가 아물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마리아처럼 주님을 믿고 말씀을 경청하는 일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외의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온 무리를 먹이시고 공중의 새와 들풀까지도 입히시고 키우시고 먹이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 물론 이것을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그렇다면 오직 말씀을 듣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이렇게 평면적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무지한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일의 우선순위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소중한 믿음의 일, 생명의 일, 진리의 일은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결어
여기서 마르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훗날 마르다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는 주님에게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놀라지 마세요. 마르다는 바로 이 고백으로 인해 오히려 베드로보다 더 앞서서 가장 먼저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녀의 성품도 변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 같았으면 무슨 일만 생기면 동생을 불러 일을 시키고 부지런을 떨었을 그녀였지만 이제 그녀는 온화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11:28)
마르다는 ‘가만히’ 동생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친절한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로 동생에게 말을 전합니다. 옛날처럼 공개적으로 명령하고 일을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온화한 여인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성품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여기에 오래 참고 기다리는 심성까지 더해진다면 얼마나 금상첨화이겠습니까? 할렐루야,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고 성숙해지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출처] 8주차.<사마리아여행> 마르다야 마르다야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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