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탁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 가운데서 도출된 여러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을 공부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며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채택되기까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앙을 수립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이나 그 이전 제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승인하고 채택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며, 여러 개혁파 문서들(도르트, 벨직, 하이델베르크 등)을 통해 습득되는 내용들과는 또 다른 정통 장로교회 신앙의 맥락을 읽을 수가 있는 유익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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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체 장로교회의 역사 가운데 모범적인 장로교회의 신앙을 실천했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가 채택했던 제2 스위스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여타의 신앙고백이나 교리문답보다도 훨씬 자세하게 특정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특별히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제18장에서 “교회의 사역자와 그들의 임직, 그리고 직임에 관하여”라는 주제에 대해 23항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으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이는 스위스에서 로마가톨릭주의자들과 함께 재세례파와 열광주의자 등으로 인해 야기된 양극단의 혼란 즉, 수직적인 교직체계로 된 교회질서와 지나치게 무질서한 교파들과 구별되는 장로교회의 독특한 질서를 설명하는 데에 상당한 관심과 수고를 기울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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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상당히 연계되는 내용들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제22장 4항 말미의 문장과 제23장 1항 초반부의 문장,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의 말미의 문장을 보면, 예배의 어떤 부분에 있어 상당히 일치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는 방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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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제22장 4항 말미의 문장을 보면, “그러므로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 모든 이상한 방언들은 침묵해야 하고, 모든 순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제23장 1항 초반부의 문장에서는, “그러나 예배 모임에서 하는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이 아는 일상의 언어로 해야 한다.”고 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의 말미에서도, “감사를 포함하는 기도는……소리를 내어서 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어서, 스위스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등 거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예배당에서는 모국어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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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고백서들의 언급들은 장로교회의 신앙에서 “기도”가 어떤 성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란,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하되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해력과 경외심, 겸손, 열심, 신실함, 사랑, 인내심을 가지고 하되…….”라는 문장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중보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상대방으로서 대하듯)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런 기도에서 굳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말로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리에 따르면, 골방에서 은밀하게 하는 기도야말로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말로 할 이유가 없으며, 오래도록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기도일수록 믿음을 가지고, 다만 늘(언제든지) 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공적인 장소인 예배당에서 하는 기도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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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장로교회의 예배당에서는 주로 목사가 공적으로 하는 기도가 주를 이루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작성에 영향을 끼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저서 『The Sabbaths Sanctification(London, 1641)』에서 경건의 공적인 의무들이 교회 안에서 목사에 의해, 그리고 회중에 의해 행해짐을 문답으로 설명하면서 이르기를, “……한편으로는 목사가,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이 참다운 교회를 구성한다. 목사는 그가 서 있는 하나님의 예배처소(roome)에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입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선포한다. 또한 목사는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입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모든 회중들이 각각 그들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서 한꺼번에 기도한다면 그들 각각의 소리로 인해서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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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지는 그러한 공적인 의무에 대해, 목사에 대해서는 “말씀을 읽는 것(원래 예배당에서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은 독경사와 목사의 직무였다), 그 말씀을 설교하는 것, 기도하고 찬양(시편송)하는 것, 성례의 집례, 성도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축도)”으로 분류하여 언급하며, 회중에 대해서는 “읽고 설교되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 기도와 찬양에 동의하는 것, 성례에 참여하는 것, 듣는 모든 것에 “아멘”으로 답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목사와 회중, 모두에 의해서 행해질 경건의 의무가 무엇인지 언급하기를,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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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목사들에게 해당하는 공적인 경건의 의무 외에 사적인 경건의 의무에 있어서는 가정에서나, 혹은 다른 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기도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교리 문답을 공부하는 것, 설교를 다시 살피는 것, 거룩한 토의(Holy conference).”를 하도록 언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배당에서 공적으로 이뤄지는 경건의 의무들은 대부분 목사에 의해 시행되며, 회중들은 이를 따르는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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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구지는 굳이 경건의 의무를 그처럼 나누어 언급할까? 그 이유는 굳이 구지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즉 고전 14:14-16절의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유익이 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성경본문에 근거하여, 구지는 굳이 경건의 의무에 대해 그처럼 목사와 회중으로 구별하여 다룬 것이고, 바로 그러한 맥락이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제22장 4항 말미의 문장과 제23장 1항 초반부의 문장,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의 말미의 문장에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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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이 이런 성경적인 의미와 그 적용, 그리고 실천 모두를 잊어버렸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일지라도 목사와 회중이 뒤섞여서 기도하며, 심지어 알아들을 수 없는 희한한 말들로 기도하는(pray in a strange tongue) 무질서가 횡횡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결코 장로교회의 바른 모습이 아님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 무엇보다 고전 14:14-19절 말씀이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장대선목사
http://cafe.daum.net/largoviva/WoXQ/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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