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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37조에 담긴 종말론 1

종말론

by 김경호 진실 2019. 12. 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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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웅 박사가 개혁신학회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벨직신앙고백서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작성되었으며 37조에 담긴 종말론은 어떠한 것인가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제시하였다.


1 들어가는 말

벨직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1561)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 1563) 그리고 도르트신경(Canones Synodi Dordrechtanae, 1618-1619)과 더불어서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 신앙고백서”(Drie formulieren van enigheid)라 불리운다. 이 세 가지 신앙고백문서는 화란개혁교회와 그 영향하에 있는 북미주개혁교회의 표준문서로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으며, 교역자들이 되고자 하면 이 신앙문서들에 대해 서명을 하도록 해왔다. 이 세 문서 가운데 1561년에 작성된 벨직신앙고백서는 가장 첫 번째로 작성된 신앙고백문서이다.
 
첫 3년 동안에 다섯 번이나 프랑스어로 간행되었고, 1562년에 화란어 번역을 필두로 하여 다양한 번역본들이 출간될 정도로 이 신앙고백서에 대한 개혁교회의 반응은 열렬했다. 꼬르뜨베흐(P. Korteweg)에 의하면 이 신앙고백서는 이미 1563년에 ‘일치를 위한 신앙고백서’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서가 하이델베크르교리문답, 도르트신경 등과 더불어서 “일치의 세 신앙고백서”로 공식 채택된 것은 1618-1619년 어간에 모였던 도르트(레흐트) 총회에서이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화란에서는 이 3대 신앙고백문서에 대해 균형있게 관심이 지속되어 왔지만, 다른 언어권에서는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이나 도르트신경에 비해서 벨직신앙고백서에 대한 연구나 강론이 희소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국장로교회/개혁교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시피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4세기 동안 개혁교회의 3대 신앙고백문서 중 하나로 인정되어온 벨직신앙고백서에 대한 이러한 무관심과 홀대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사료된다.

논자는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말해져오기는 했으나 여러모로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던 벨직신앙고백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되, 본고에서는 특히 37조에 개진된 종말론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비록 종말론이 20세기에 들어와 신학자들의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인정되지만,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다양한 급진적인 종말론들이 횡행했으며, 개혁자들이나 신앙고백문서들은 성경적인 종말론을 제시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은 공히 인정되어온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1561년에 처음 공표된 벨직신앙고백서에 담긴 종말론의 내용과 그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합당한 일일 것이다.
 
특히 본 신앙고백서는 일찍이 개혁주의자들뿐 아니라 로마가톨릭진영에 의해서도 ‘칼빈주의적 신앙고백서’라고 공인되어왔기 때문에, 이 신앙고백서에 담긴 종말론을 통해서도 그러한 특징을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어지는 본론에서 논자는 우선 신앙고백서의 저자문제와 역사적 배경 문제 등을 다루고 나서(2), 종말론이 담긴 37조의 번역시안을 제시할 것이며(3), 그러고 나서 37조에 담긴 종말론을 분석하는 일을 할 것이다(4). 이러한 논구를 위해서 벨직신앙고백서의 프랑스원문들과 몇 가지 번역문들을 참고하고, 이 신앙고백서나 그 주요 저자로 인정되는 귀도 드 브레에 대한 참고문헌들 또한 참고하고자 한다.


2 저자문제와 역사적 배경

우리는 먼저 벨직신앙고백서의 저자문제와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37조에 개진된 종말론에 대한 논구를 진행하기 위해 서론적으로 요청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벨직신앙고백서는 1561년 신성로마제국의 펠리페 2세가 통치하된 저지대(Lowlands, Pay-bas)에 속한 도르닉(Doornik)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얇은 소책자에는 “Confession de foy, faicte d'un commun accord par les fideles qui conversent es Pays-Bas, lesquels desirent vivre selon la purete de l’Evangile de Notre Seigneur Jesus-Christ”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지만 여타의 서지사항(저자, 출판도시, 출판사 등)은 누락되어 있었다.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수성에 따라 살기를 소망하는, 저지대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공통의 일치에 의해 만들어진 신앙고백”), 개인의 신앙고백서가 아니라 저지대(즉,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의 일부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 합의하고 받아들이는 신앙의 내용을 고백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적어도 1561년 초판에는 신앙고백뿐 아니라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앞서 실려 있고, 저지대 관리들에게 보내는 탄원서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왜 이 신앙고백서는 그러한 제목과 구성을 가지고, 아무런 서지사항 없이 공표할 수밖에 없었을까? 또는 그러한 신앙고백서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서가 공표된 역사적 배경과 저자문제를 논구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2.1 저자 문제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서의 저자로 공인되어온 사람은 귀도 드 브레 혹은 귀 드 브레(Guido de Bres or Guy de Bray, 1522-1567)이다. 드 브레가 몇 몇의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았느냐, 아니면 단독적으로 작성했느냐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그가 주요 작성자였다고 하는 데는 별 이의가 없다. 귀도 드 브레에 관한 전문가인 에밀 브랙크망(Emile Braekman, 1924-2013)에 의하면 이 신앙고백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helemaal niet belangrijk), 적어도 당시대인들인 쟝 따팽(Jean Taffin), 프란시스쿠스 토마스(Franciscus Thomas), 그리고 아드리아누스 사라비아(Adrianus Saravia) 등의 증언에 의하면 귀도 드 브레의 저작설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논증하기도 했다.
 
특히 사라비아는 1662년에 쓴 한 편지 속에서 신앙고백서를 순교자 귀도 드 브레가 프랑스어로 썼다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또한 동시대인인 쟝 따팽(Jean Taffin, 1529-1602) 역시도 신앙고백서의 작성자가 드 브레임을 인정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드 브레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고, 출판하기 전에 여러 교회에 보내어 자문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벨직신앙고백서의 주요 저자는 귀도 드 브레라는 점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2.2 저자 드 브레와 역사적 배경

벨직신앙고백서의 저작 배경에는 저자 드 브레의 삶과 그가 활동했던 저지대의 역사적 상황이 놓여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엮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본논문의 제한상 저자 드 브레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구할 순 없다. 본래의 논의를 위한 배경을 설정한다는 취지에서 간략하게 개관해 보고자 한다.

드 브레는 베르흔(Bergen/ Henegouwen)에서 1522년경에 출생했다. 아버지 쟝 드 브레(Jean de Bres)은 스테인드글래스 전문가(glasschiler)였으며, 어린 시절 그도 아버지의 업을 이으려고 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저지대 지역(오늘날엔 벨기에 영토)은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Karl V, 1515-1555 재위)가 통치하고 있던 가톨릭영토였다. 어떤 기회에 개신교 설교를 듣게 되었는지 알수 없으나 적어도 1548년엔 그 신앙에 대한 박해를 피하여 런던으로 가게 된다. 런던에서 청년 드 브레는 마르틴 부처, 요한 아 라스코, 페트루스 다테인 등과 교제하면서, 신학적 지식을 쌓게 된다.

1552년에 다시 저지대로 돌아온 드 브레는 레이설(Rijssel, 또는 Lille라고 함)과 주변 지역에서 순회설교자(rondreizend predikant)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첫 저술을 출간하게 된다. 1555년에 출간된 그의 저술은『기독교 신앙의 무기』(Le baston de la foy chrestienne)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550쪽이 넘는 이 책은 주요 주제들과 관련하여 성경과 초기 교부들로부터 자료들을 모아놓음으로써 청년 드 브레의 신학적 학식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드 브레는 본서를 통해 당시 개신교신앙을 박해하고 있던 ‘교부들이 가졌던 고대 신앙’을 포기한 ‘복음의 적’으로서 ‘참된 교회’라고 불리울수 없다고 하는 점을 보여주었다.

1556년에 이르러 박해가 심해지자 드 브레는 다시 고국을 떠나 망명의 길을 걷게 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라스코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순교사』를 저술하게 될 끄래스팽도 만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드 브레는 베자가 가르치고 있던 스위스 로잔에 갔다가 칼빈이 목회하고 있던 쥬네브로 가서 1559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드 브레는 칼빈과 베자와 교류하면서 신학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1559년에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온 드 브레는 도르닉(Doornik, 프랑스어로는 뚜르네이 Tournai라고 부름)에서 비밀교회를 조직하여 목회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드 브레는 카타리나 라몽과 결혼도 하게 되었고 다섯 명의 아이를 낳게 된다. 또한 비밀스러운 복음사역을 진행하던 중에 박해를 일삼는 신성로마제국과 로마가톨릭에 대하여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작성하게 된 것이 바로 벨직신앙고백서이다. 헤이띵(W. Heijting)에 의하면 신앙고백서는 ‘1561년 4월 전에’(voor April 1561) 드 브레가 사역하고 있던 도르닉(= 뚜르네이)의 은신처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쇄된 신앙고백서 책자가 공적으로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1월 1일-2일 사이 밤중에 도르닉 성벽안으로 몰래 투척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우선 동년 9월 29일과 30일 사이 저녁에 발생한 개신교도들이 마로의 찬송을 부르면서 공개적으로 길거리를 행진한 사건을 언급해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르닉의 시장 플로리스 드 몽띠니(Floris de Montigny)는 주동자를 색출해 나가는 중에 제롬(Jerome)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드 브레가 포착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는 중에 드 브레는 마침내 인쇄된 벨직신앙고백서를 1561년 11월 1일-2일 사이 밤중에 도르닉 성벽 안으로 투척을 해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이 재세례파의 과격한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펠리페 2세나 저지대 행정관들이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탄원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드 브레가 황제에게 쓴 편지글을 읽어보면 『기독교강요』초판 서두에 칼빈이 첨부한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의 내용이나 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벨직신앙고백서 37개 조항을 들여다보아도 항상 “우리는 믿는다”(Nous croyons)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벨직신앙고백서에 담긴 내용이 드 브레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도르닉과 저지대 지역에 산재해있던 개신교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박해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드 브레의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탄원서와 신앙고백서는 펠리페 황제나 그가 세운 섭정 마르가레타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드 브레와 도르닉의 개신교회는 격렬한 박해를 직면해야 했다. 드 브레의 은신처도 마침내 발각되기에 이르렀고, 그 은신처에 있던 신앙고백서 200여권과 칼빈, 루터, 베자, 멜랑히톤 등 다양한 종교개혁자들의 저술들도 발견되어 모두 소각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벨직신앙고백서의 저자가 드 브레이며, 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칼빈의 모든 오류들과 그릇된 교리들로 가득하다’라고 하는 보고가 조사위원회에 의해 섭정 마가레타에게 전해지게 된다.
 
드 브레는 1563년 초 그런 연유로 도르닉(= 뚜르네이)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자, 북부 프랑스 지역인 아미엥(Amiens)과 세당(Sedan) 등에 머물게 된다. 세당에 머무는 동안 드 브레는 재세례파의 기원과 오류에 대하여 반박하는『재세례파의 뿌리, 원천, 그리고 기초』(La racine, source et fondement des Anabaptistes)을 1565년에 출간하기에 이른다. 4년 여 동안(1562-1566) 북부 프랑스에 머물렀던 드브레는 다시 벨기에 지역으로 이동하여 도르닉에서 멀지 않은 발랑시엔느(Vaenciennes, L’Aigle)에 머물며, 뻬레그랭 드 라 그랑쥬(Peregrin de la Grange)와 더불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사역을 통해 발랑시엔느 인구의 2/3(tweederde) 가량이 가톨릭에서 개혁주의 신앙으로 개종을 하게 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혁주의 신자들이 발랑시엔느 성을 접수하고 가톨릭진영에 대해 무력 항쟁을 진행하게 되지만, 결국은 누와르까름(Noircarmes)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서 패배를 당하고 성은 유린당하게 된다. 드 브레와 동료드 라 그랑주 목사는 성을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도르닉으로 압송 당하게 되고 1567년 5월 31일에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서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3 벨직신앙고백서 37장 번역 시안

이어서 우리는 본고의 주요 논구 대상인 37조의 번역 시안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561년에 처음 익명으로 출간된 벨직신앙고백서는 1566년 안트베르프에서 모인 회의에서 처음 수정이 이루어졌고, 1618-1619년 도르트총회에서 최종 수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60여년의 수정과정 동안 다양한 번역본들도 출간되었기 때문에 벨직신앙고백서의 본문이 조금씩 다르게 제시되기도 했고, 후대인들에게도 다소 혼동을 불러 일으킨다. 따라서 이런 모든 과정들을 잘 반영한 비평적 텍스트의 출판이 요청된다고 논자는 확신한다. 종말론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는 37조의 경우도 예외도 아니다. 벨직신앙고백서의 종말론을 논구하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37조의 정확한 본문의 확립과 번역시안을 제시할 필요성이 요청된다고 생각된다.
 
이미 한글 번역들이 나와 있지만 대체로 영어만 참고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어 원문과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들과의 대조를 거친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보다 표준적인 번역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기대하면서, 아래에서는 1562년과 1566년 프랑스 원본들과 필립 샤프가 제시한 프랑스어 최종 수정본과 몇 개의 다른 번역본들을 참고로 삼아서 37조에 대한 번역 시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고, 선택된 자들의 수가 채워지고 나면(마 24:36, 25:13; 살전 5:1, 2; 계 6:11; 행 1: 7; 벧후 3: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대로, 하늘로부터 육체적으로 그리고 가시적(corporellement et visiblement)으로 오셔서(행 1:11), 자신이 산자와 죽은 자들의 심판자 되심을 선포하시며(declarer, 살후 1:7, 8; 행 17:3; 마 24:30, 25:31; 유 15; 벧전 4:5; 딤후 4:1), 옛 세상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불과 화염으로 사르실 것을 믿는다(벧후 3:7, 10; 살후 1:8). 그러고 나서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살았던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의해서 소집되어(고전 15:42; 계 22:12, 13; 살전 4:16) 이 위대한 심판자 앞에 몸소 출두하게 될 것이다(comparaitront personnellement, 계 22:12, 13; 행 17:31; 히 6:2, 9:27; 고후 5:10; 롬 14:10). 왜냐하면 모든 죽은 자들은 땅으로부터 부활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은 이전에 그 안에서 살았던 자신의 육체들과 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5:28, 29, 6:54; 단 12:2; 욥 19:26, 27). 그때에 살아있던 자들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아니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썩을 것에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를 받게 될 것이다(고전 15:51-53). 그때에 책들이(다시 말하자면 양심의 책들) 펴질 것이며, 죽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 20:12, 13; 고전 4:5; 롬 14:11, 12; 욥 34:11; 요 5:24; 단 12:2; 시42:13; 마 11:22, 23:33; 요 5:29; 롬 2:5, 6; 고전 5:10; 히 6:2, 9:27). 동일한 사람들은(meme les hommes) 그들이 내뱉은 모든 무익한 말들(de toutes paroles oiseuses)에 대해, 세상은 유희와 심심파적으로 여겼을 것이지만, 보고해야 할 것이다(롬 2:5; 유 15; 마 12:36); 그리고 그때에 사람들의 비밀들과 위선들은 모든 이들(tous)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4:5; 롬 2:1, 2, 16; 마 7:1, 2).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심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끔찍스럽고 공포스러운(horrible et epouvantable)것이지만(계 6:15, 16; 히 9:27), 경건하고 선택된 자들에게는 크게 소망하는 바가 되고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의 완전한 구속(redemption totale)이 이루어지게 되며, 그들이 감수해야 했던 모든 노고와 수고의 열매들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눅 22:28; 요일 3:2, 4:17; 계 14:7; 살후 1:5, 7; 눅 14:14). 그들의 무죄함은 모든 이들 앞에 알려지게 될 것이며, 이 세상에서 그들을 박해하고, 압제하고, 그리고 고문했던 그 사악한 자들 위에 하나님이 집행하실 끔찍스러운 보복을 보게 될 것이다(단 7:26; 마 25:46; 살후 1:6-8; 말 4:3). 그 악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 정죄함을 당하게 될 것이며(롬 2:15),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계 21:8; 벧후 2:9; 말 4:1; 마 25:41).

그러나 반대로 신실한 택자들은 영광과 명예로 면류관을 쓰임 받게 될 것이다(마 25:34, 13:43);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택한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인정하실 것이며(마 10:32. confessera leur nom);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사 25:8; 계 21:4); 그리고 지금은 많은 재판관들과 위정자들에 의해서 이단적이고 악독하다(heretique et mechante)고 정죄당하고 있는 그들의 대의명분(leur cause)이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의명분임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사 46:5); 또한 주님께서는 은혜로운 보상으로서 사람이 마음으로 결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그러한 영광을 그들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실 것이다(사 54:4; 고전 2: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위하여, 그 위대한 날을 크게 소원하며 기다린다(히 10:36-38).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http://www.reformednews.co.kr/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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