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광열, 개혁신학적 예배원리에 기초한 한국교회의 예배갱신(2)

예배학

by 김경호 진실 2020. 1. 27. 17:34

본문

(이 글은 총신대 김광열 교수가 「총신대논총」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개혁신학적 예배의 원리에 기초한 한국교회의 예배를 어떻게 갱신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제시하고 있다.)

 

III. 예배 갱신의 기초: 예배관과 예배의 성경적 원리 검토

 

1)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하나님께서 존귀를 받으실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1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분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예배란 1차적으로 자기보다 우월한 어떤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존경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단순한 명사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며 우리가 참여하는 무엇인 것이다. 구약의 상황 속에서 제사장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수행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과 같이 노동 혹 섬김과 같은 사역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사역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가. 성경적 예배관이란 먼저 하나님 중심의 예배관이다.

성경적 예배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모습은 그것이 언약의 주 하나님이 분명히 제시되는 예배여야 한다는 점이다. 자연과 역사의 모든 과정들과 대상들을 통치하시며 그 통치하심 속에서 그분은 궁극적이며 절대적 권위로 말씀하시고 만민 중에 한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예배 가운데서 드러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통치 즉 피조계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사실로 인해 그분께 경배와 찬송을 드린다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을 드릴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나 섭리, 그리고 구속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능하신 행동들에 대한 찬양이었기 때문이다(출 15:1-18, 시 104; 습 3:17; 계 15:3-4).

 

또한 예배 안에서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만을 인해 경배드릴 뿐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경배 드린다. 시 19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먼저는 창조와 섭리 안에서 행하신 그분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지만(1-6) 그 다음에는 그의 율법과 법도의 완전함을 인해 찬양 드린다(7-11).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 그의 권능과 위엄으로 압도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런 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해 경배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 속에서 성경봉독과 그 말씀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행 15:21; 딤전 4:13; 골 4:16).

 

그리고 우리는 또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분은 언약의 주님으로서 예배 가운데서 그의 백성들에게로 찾아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분은 성막과 성전에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셨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고 기쁨에 차 소리쳤다. 신약의 예배 속에서는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임재가 영향을 주어 엎드리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또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다라고 외치게 되기도 하였다(고전 14:25). 이처럼 참된 예배란 언약의 주가 되신 하나님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영광 돌리며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에 대해 경배하며 언약의 주이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의 시간으로서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는 점이다.

 

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표현되는 예배관이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라는 설명만으로는 성경적 예배관의 온전한 서술이 될 수 없다. 성경적 예배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그 시행 속에서 진행되어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관되어서 이해되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범죄하여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누렸었다. 에덴은 일종의 성전으로서 그들은 하나님과 만나며 그분의 창조의 능하신 사역들을 기뻐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지냈으리라. 그러나 타락 후 그들은 에덴 성전에서 쫓겨났으며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그에게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예배의 새로운 길을 확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과거와 같은 예배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이해 속에서 나오기기를 원하신다. 그런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행하신 능하신 역사들에 대한 이해 속에서 나오기를 원하신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경적 참된 예배는 구원의 복음이 표현되는 예배이어야 한다.

 

에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들의 죄와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까지도 전해준다. 예배 가운데 우리가 먹고 마시는 예식은 주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고전 11:26). 이처럼 예배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의 모든 일들은 죄와 용서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사역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중심의 예배여야 한다. 우리의 예배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된 소식이 중심적 요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다. 개혁주의 예배란 삼위일체적 구조의 예배관이다.

그러나 성경적 예배에 대한 온전한 설명은 거기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신자의 예배는 구원의 계획과 실행, 그리고 그 적용 소에서 이해되고 표현되는 것이라 할 때 결국 그것은 성령의 사역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의 정하신 때와 방법대로 인류의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셨으나 그가 이루신 객관적 구속사역은 결국 그가 승천하셔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과 역사 속에서 적용되고 성취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자들의 마음에 적용시키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주고 은사들로 채워주셔서 그들의 사역을 강화시키시고 또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요 4:23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다. 거기에서 진정이라는 단어는 진리라는 것으로 복음의 진리 즉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리키며 신령이라는 단어는 진리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결국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 예배를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성부, 성자, 성령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인지하며 드리는 예배임을 의미하고 있다. 참된 예배란 성부 중심의 예배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참된 예배란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고 그의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려주시며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이심도 깨닫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듯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이렇게 볼 때 신구약 계시의 풍성한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참된 예배란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되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인 것이다. 참된 성경적 예배란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진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예배관이다.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을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물론 예배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적 구조 속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수직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배 가운데서 우리의 초점은 그분에게로 맞추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직적 성격에 대한 강조가 인간적인 필요를 무시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이방의 몰록과 같은 신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예배가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속에서 신자는 너무나 하나님께 몰입되어 서로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게 해야 한다. 예로 예배자는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예배란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데 그것은 예배의 수평적 차원의 성격을 강조해준다. 신앙적 교화적 기능은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깨달음을 주는 교육적 기능을 말하는데 고전 14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말하기 보다 이해될 수 있는 예언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고전 14:25-26에서 바울은 불신자들조차도 그 회중 가운데 들어와 그 진행되는 일들을 이해하여 그 결과로 그들도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라고 외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예배란 수직적 초점만 아니라 수평적 초점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여야 하지만 동시에 교육적이어야 하며 전도도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후자의 내용이 우선적인 목표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예배를 통해 교육과 전도의 열매들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가 오락적이어서는 안될지라도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이 서로 나누어지고 또 교육적 기능이 수행되는 수평적 차원의 요소가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 협의의 예배와 함께 광의의 예배가 포함되는 예배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동정과 공의에 대한 관심없이 드려지는 형식적 예배를 정죄하셨다. 호 6:6에서는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물론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포함되는 예배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에서도 선을 향함과 나누어주는 일까지 포함되는 예배가 제시된다. 약 1:26-27의 말씀과 같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경건으로 예배를 드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어야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적 예배모임의 중요성을 무시함이 없이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분께 찬송과 영광이 드려지는 예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2) 예배의 개혁신학적 원리.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바른 방법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자들이 드리는 모든 예배를 다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고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명하지 않은 불을 분향함으로 그들을 징벌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그분을 예배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일 것이다. 특히 십계명에도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문제들에 대해 안내해주고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전통적으로 취급되는 규정하는 원리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에 대해 논의하려 한다. 규정하는 원리에 대한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의 해석은 성경이 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예배 가운데 아무 것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은 금지한다는 좀 더 강력한 해석을 취한다. 그것은 말씀이 신자의 모든 삶에 있어 원리와 기준이 된다는 개혁신학적 강조를 신자의 예배의 영역에서도 일관성있게 적용시키는 입장인 것이다. 다라서 개혁주의의 예배관의 기본원리는 그 예배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이 성경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명령들에 기초되는 것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를 위해 그리고 예배에서 행해지는 행위들 가운데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취급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주일날 어디에서 모일 것인가? 혹 설교는 얼마나 길게 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인데 성경은 그런 부분에 대해 직접적 제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자연의 도리와 신자의 사려분별을 통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느 것들도 순전히 하나님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어느 행위들도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중립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배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부분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도록 결정되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들은 일반적인 명령들에서부터 좀 더 구체적인 명령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자는 고전 10:31을 후자는 고전 11:24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각 행위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온전히 찾아 적용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온전히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직접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주어질 때가 있다. 그 때는 신자는 자신의 성화된 지혜를 가지고 경건하게 적용되도록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금해져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규정하는 원리에 충실하게 즉 우리의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운데 진행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접근 원리는 개혁신학의 전통 안에서 수용되어온 규정하는 원리를 그대로 인정함으로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일들을 온전히 성경의 가르침으로 제한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적용의 개념을 활용함으로서 상당한 영역에서 자유를 허락해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런 자유의 범위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 안에서 신자의 창조적 판단력이 사용되도록 주의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http://www.reformednews.co.kr/8726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