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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나를 읽어내고, 나의 삶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성경

by 김경호 진실 2020. 2. 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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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나를 읽어내고, 나의 삶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개혁정론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교)와의 대담을 진행했다. 미국에서 교수 중인 강 교수가 겨울을 맞아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와 교회를 위한 신학 포럼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이에 강영안 교수와 대담했는데, 2019년 12월 9일 편집장 안재경 목사가 진행했다. 그 대담내용을 풀어서 전한다.

 

 

 

인터뷰 날짜: 2019년 12월 9일
인터뷰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대학원 교수)
인터뷰어: 안재경 목사(개혁정론 편집장)

 


안재경 목사(이하 안): 교수님, 이번 겨울에 딱 일주일간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오늘(12/9)은 ‘제6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서울)’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기독교 세계관과 철학〉을 강의하셨는데요. 12월 3일 입국하셔서 바로 다음날 12월 4일 분당에 소재한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무)에서 주최한 〈말씀 묵상과 공동체〉라는 포럼에서 <읽는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셨습니다. 그 포럼을 좀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영안 교수(이하 강): ‘제2회 THINK포럼’이었습니다. THINK포럼은 김양재 목사의 목회 방침을 약자화한 것인데요. Telling(고백[내 죄를 고백하고 말씀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간증]), Holifying(거룩[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목적으로 둔 성도의 삶의 방식]), Interpreting(큐티[구속사적 말씀 묵상으로 삶을 해석하는 과정]), Nursing(돌봄[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를 돌보는 것]), Keeping(적용[말씀에 따라 십자가 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이웃을 살리는 것])의 앞 글자를 따서 THINK라고 부르더군요. .
 


안: <우리들교회>가 걸어온 걸음이 독특한데요. 교계 내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는 말도 하고요.

 

강: <우리들교회>가 설립된 지 채 20년이 안 된 것 같은데요. 대형 교회로 성장했더군요. <우리들교회>의 특징이 오직 예배하고 말씀 묵상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인데요. 이 포럼을 열게 된 동기가 지금까지 교회가 주력해온 교회 프로그램, 그리고 양육 내용을 신학적으로 점검해보고 정립해보자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작년에는 <우리들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죄 고백을 교회 역사 전통을 통해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더군요. 서양 전통에도 공개적인 죄 고백 전통들이 있었으니까요.
 


안: 맞습니다. 제가 쓴 신학석사 논문 주제가 바로 죄 고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처음에는 죄 고백이 공개적이었습니다. 이후에는 그것이 사적인 고백으로 바뀝니다.

 

강: 고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종교개혁 이후의 죄 고백 전통을 배경으로 <우리들교회>의 죄 고백을 작년에 다루고 올해는 성경 읽기가 주제였습니다.

 


 


안: 성경 읽기를 가지고 포럼을 연다는 것이 신선한데요. 

 

강: 내가 먼저 발표하고 다음에 총신대학원 박용규 교수가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 발흥과 확산에서 성경 말씀의 역할〉을 발표했고, 합신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지내셨던 송인규 교수가 〈큐티  나눔의 다이내믹스〉를 발표했어요. 송 교수의 논문이 80쪽의 엄청 긴 분량인데, 그날은 30분 내에 발표해야 해서 쉐어링, 즉 성경을 나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이야기했어요. 나는 ‘읽는다는 것이 뭐냐?’, ‘어떻게 읽느냐?’, ‘우리가 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를 나누었어요. 읽기의 현상학, 읽기의 해석학, 읽기의 윤리학, 이 세 부분으로 나눠가지고 설명했는데요. 성경이든지 신문이든지 소설책이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을 읽는다고 할 때 읽는 행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습니다.
 


안: 여러 읽기 중에 성경 읽기를 구체적으로 다루셨을 텐데요.

 

강: 내 원고 분량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200자 원고지 350매 분량이었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오랜 읽기 전통에서 기독교의 성경 읽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 불교나 유교가 다같이 경전 읽기를 소중하게 생각한 전통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전통보다 기독교는 성경 읽기를 강조해 온 전통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 읽기가 강조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공동독서’(communal reading)였습니다.  
 


안: 예, 맞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1:3)고 말씀하면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이 읽기는 예배 중에 읽기이니까요. 

 

강: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함께 성경을 읽고, 회개하고, 그 다음에 함께 잔치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한 사람이 서신을 읽으면 회중은 그것을 같이 듣습니다. 읽고 들은 후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독서’가 교회 전통에 있어 왔지요. 중세 수도원 전통이 형성되면서 읽기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수도원 전통을 일컬어서 흔히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하지요. ‘거룩한 독서’, ‘영적 읽기’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해서 씁니다. 개신교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도원 전통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읽기 방식입니다.  

 


안: 동양의 읽기 전통은 어떠했습니까?

 

강: 동양에서도 오랜 읽기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문헌이 우리에게는 ‘주자’(朱子), 곧 ‘주(朱) 선생님’으로 익숙한 주희(朱熹, 1130-1200)의 글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통적인 것을 먼저 말해두어야겠네요. 서양의 수도원 전통이든, 동양의 유교 전통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지고 무슨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를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유하는 방식의 읽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읽기의 중요한 목적은 사람을 빚어내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형성시키고 사람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읽기였습니다. 주희는 읽기와 관련해서 공부하는 방식을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대비합니다. 하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입니다. 물론 <논어>에서 공(孔) 선생님, 곧 공자(孔子)가 한 말을 빌려온 것이지요. ‘위할 위(爲), 사람 인(人)’이지요. 이 때 사람은 타인이죠, 타인. <논어>에서 ‘인’자가 나올 경우 대부분 타인을 뜻합니다.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란, 과거 시험을 친다든지, 아니면 자기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에요. 내가 얼마나 아는가를 남한테 과시한다거나 하는 공부 방식이지요.

   그런 공부와 전혀 다른 것이 뭐냐 하면 ‘위기지학’(爲己之學)입니다. ‘위할 위(爲)’자에다가 ‘자기 기(己)’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이지요. 자기 자신을 세우는 공부, 즉 자기 자신을 사람으로 제대로 빚어가는 공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학이 뭐냐’라고 물으면요. ‘위인지학’이 아니라 ‘위기지학’이라고 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험을 친다든지, 많은 정보를 모아 남에게 전달하는 목적의 공부가 아니라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공부,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원래 유교의 공부 이념입니다. 유학 전통에서 ‘성인’은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의 목소리를 따라서 삶을 실천하고 행하는 사람, 그게 성인이에요. 성인은 하늘과 합한 사람입니다. ‘천인합일’된 사람이 되는 것이 유학의 학문 이념이고 공부 이념이에요.
 


안: 흔히들 유학에서는 경서를 달달 외우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강: 그렇기는 합니다. ‘논어를 읽는다, 맹자를 읽는다, 대학을 읽는다’라고 하지요. 외우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사서삼경>을 읽는 목적은 성인의 말을 읽고 배워, 성인을 닮아가기 위한 것이지요. ‘이미타치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미타치오 상티’(Imitatio Sancti), 즉 성인을 닮는 것이지요. 읽기가 경전 읽기를 넘어 성인을 모방하는 읽기 방식이었어요. 주희가 <논어>에 붙인 주를 보면 첫 구절에 곧장 “학지위언, 효야(學之爲言, 效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학(學)은 굳이 말하자면 본받는다는 뜻이다.”라고 말이지요. ‘배운다’는 것은 유교 전통에서 보면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누구’를 본받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때 ‘누구’는 곧 성인입니다. 성인 반열에 들지는 않지만 본받음의 대상은 선생이나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수도원 전통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것이 수도원의 삶이었고 성경 읽기의 목적이었습니다. 
 


안: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인들의 삶을 닮아가기 위해 경전을 읽는다는 것이 동양 전통인데 우리는 공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강: 그렇죠.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죠.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것이죠.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우선, 성경의 권위를 말씀하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숨결로 쓰였다는 것이고요. 그 다음으로 성경의 유익 네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우선, 모든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하죠. 다음으로 우리의 잘못된 삶을 책망하고요. 다음으로, 우리를 바른 삶으로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데 유익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네 번째가 중요한데요. 하나님의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씀하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케 되어서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책이라고 말씀하죠.
 


안: 성경이 여러 가지 정보가 담긴 책 정도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죠.

 

강: 그래요. 법전처럼 지켜야 할 것, 지키지 않아야 할 것 등의 규칙을 전달하는 책이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나 과학이나 철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책입니다. 유학자들도 경전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경전을 무슨 정보를 얻는 것처럼 받아 적는다든지, 외운다든지, 지식을 축적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교훈과 가르침, 책망받아야 할 것, 바르게 고칠 것들을 고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빚어져 이 땅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 성경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을 성경으로 제대로 읽으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안: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가 너무나 중요한데요.

 

강: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지요.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 적혀있고 어떻게 읽느냐?”고 되묻지요. 예수님은 ‘어떻게 읽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 적힌 것을 알아야 하죠. 문제는 아는 지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에 합당하여 제대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너는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신 것이죠.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성경을 마치 법전처럼 조문을 들춰내는 방식으로 읽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옳도다. 가서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지요. 율법교사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다시 한 질문을 보면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어요. 법전처럼 생각하고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그쳐 버렸으니까요. 그러면 무엇이 따라 왔어야 했을까요? “네, 예수님, 말씀대로, 제가 읽은 대로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했어야했지요. 그렇게 하지 않고 이웃이 누구냐를 다시 물었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알아야 내가 사랑할 것이 아닙니까?”라는 말이지요. 
 


안: 맞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느냐에 있었습니다.

 

강: 예수님의 관심은 “옳다, 가서 그렇게 행하라”는 데 있었지요. 읽기의 문제는 그냥 눈으로 읽고 익히고 내용이 뭔지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가서 행할 때 읽기가 마감이 되는 겁니다. 읽는 과정의 끝은 실천하는 것, 곧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한다는 말이지요. 읽기와 삶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어떻게 읽어야 삶에서 실천하기까지에 이르느냐 하는 것이지요. 말씀과 삶이 이원화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내 삶 속에서 실천이 되는 방식으로 말씀을 읽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안: 유교 전통에 관해 이미 언급해주셨는데요, 수도원 전통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읽어야 말씀이 삶이 되는지, 수도원의 읽기 전통을 소개해주시죠.

 

강: 수도원의 렉시오 디비나 전통은 유대인들의 할라카 전통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수도원에서도 하나의 읽기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을 텐데 문서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1170년에서 1180년 사이에 ‘기고 2세’(Guigo II)가 쓴 〈수도사의 계단〉(Scala Claustralium)이라는 글이에요. 19세기 중엽 자끄 뽈 민느(Jacques Paul Migne)가 <교부학전서>(Patrologiae Cursus Completus)를 만들 때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와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의 작품으로 오인해서 양쪽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와서야 이 작품이 기고 2세가 쓴 걸로 밝혀졌지요.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이 이 속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곧 ‘영적 읽기’ 또는 ‘거룩한 독서’는 네 단계를 밟습니다. 첫 번째로 렉시오Lcetio, 곧 읽기입니다.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으니까 띄어서 읽는 방식부터 시작해서 읽는 거예요. 두 번째로, 메디타치오Meditatio, 곧 묵상입니다. 세 번째가 오라치오Oratio, 곧 읽고 묵상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죠. 기도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관상, 곧 기도한 내용과 일체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겨냥하지요. 기고 2세가 들고 있는 예는 마태복음 5장 8절이에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 구절을 가지고 우선 읽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구냐’를 물으며 묵상하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합니다. 이때 묵상한다는 것은 잘근잘근 씹는 것을 말해요. 입 안에 올리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씹는 거에요.
 


안: 묵상이라는 단어는 시편 1편 2절에 있지 않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묵상한다는 말이 히브리어 ‘하가’가 아닙니까? 

 

강: 그렇지요. 히브리어 ‘하가’(הגה)는 ‘사자가 으르릉거린다’, ‘중얼거린다’, 또는 ‘씹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 성경>을 보면 “주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씹는도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구절로 돌아가보지요. “마음이 청결하면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먼저 읽고 그것을 입에 담아 읊조리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기도의 형식으로 옮기는 것이지요. ‘하나님 아버지, 저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순간을 기대합니다. 잠시 잠깐, 한 순간만이라도 짧게 하나님을 맛보는 순간을 ‘관상’(콘템플라치오)이라고 부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가운데 오래 머물고자 했지요.
 


안: 그렇게 말씀하셔도 막연한데요. 좀 더 생생한 표현이 있습니까?

 

강: 기고 2세는 포도알을 하나 입에 집어넣어서 씹어서 맛을 보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그러니까 입 안에 집어넣는 것이 읽기이고, 씹는 것이 묵상이고, 거기서 즙을 짜내는 것이 기도이고, 단맛 자체, 단맛 자체를 맛봄을 관상이라고 말했어요. 성경 읽기를 이렇게 먹는 것에다가 비유를 했어요. 먹는 것에다가 읽기를 비유한 예는 성경에 벌써 나오지요. 에스겔서 3장을 보면 선지자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0:9에서도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렇게 먹는 비유는 성경에 이미 있는 비유지요. 말씀을 먹고, 그것을 통해서 내 영의 살을 찌우고, 이렇게 한 단계 단계 사다리를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 전통입니다. 
 


안: 종교개혁도 이것을 받아들였습니까? 루터는 다르게 보았을텐데요.

 

강: 마르틴 루터는 중세 교회의 전통을 수정합니다. 루터도 수도회 출신이니 수도원의 기도와 성경 읽기 전통을 몸으로 익힌 사람이지요. 그러나 루터는 렉시오 디비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와 삶을 보는 관점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신학 방법론’입니다. 세 가지인데요. 기도(Oratio)와 묵상(Meditatio)과 시련(Tentatio)입니다. 루터는 “기도와 묵상과 시련이 신학자를 만든다”(Oratio, meditatio, tentatio faciunt theologum)고 했지요. 시련은 영적 씨름, 고난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어요. 독일말로는 ‘안페크퉁’(Anfechtung)이라고 하지요.

   방금 이야기한 내용을 담은 글이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쓴 글들을 모아 1539년 전집을 출간할 때 붙인 서문입니다. 이 서문에서 루터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와 묵상과 씨름, 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영으로 쓰였기 때문에 우리의 자연적인 지성과 이성을 통해서 말씀을 읽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 하나님께 감동받은 그 지성과 이성으로 말씀을 읽도록 해 달라고 하는 기도가 첫 번째이고요. 두 번째는 묵상이에요. 묵상은 그 속에 말씀을 읽는 것이 포함된다고 보아야지요. 왜냐하면 묵상은 말씀 묵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입술에 올려 쉬지 않고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루터는 독일어로 ‘트라이벤 운트 라이벤’(treiben und reiben)이라고 표현했어요. ‘트라이벤’이란 말은 걸레질을 할 때 앞으로 밀어내는 것이라면 ‘라이벤’은 부비고 문지르는 것이지요. 말씀을 가지고 밀고 댕기고 문지르고 부비는 것이지요. 박하 잎사귀를 하나 떼어 가지고 손으로 비벼 냄새 맡는 것처럼 말씀을 가지고 밀고 닦고 부비고 문지르듯이 깊이 묵상하는 것, 그것이 두 번째 단계에요. 세 번째는 이제 그 말씀을 가지고 일상의 삶에서 고난, 고통을 겪으면서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살아가는 단계이지요. 이것이 제대로 된 신학 방법이라는 겁니다. 

 

 

안: 루터의 신학은 당시에 유행하던 학문 방식과 달라서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강: 그렇죠.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한 신학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학문적 신학은 아니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자의 활동이 곧 ‘신학’이지요.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5–399)가 “신학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신학자이다”라고 말할 때 ‘신학자’의 의미가 바로 이런 ‘신학’ 개념과 관련된 것이지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이 땅에서 영적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가 목사이든 장로이든 그가 어떤 직분을 맡든 맡지 않든 간에 참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전통을 배경으로 김양재 목사와 <우리들교회>의 성경 읽기와 묵상 사역을 들여다본 것이죠.

 


 

 

 

안: 그런 읽기 전통을 가지고 <우리들교회>를 들여다보니 어땠습니까?

 

강: 이런 읽기가 한국에서 전통이 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렉시오 디비나 전통과 루터의 전통이 <우리들교회>의 성경 읽기와 묵상 방식과 연결이 되더군요. 김양재 목사의 <큐티하는 여자>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권유하는 묵상 방식은 우선 첫 번째로 중요한 게 기도였어요. 물론 기도하기 전에 몇 가지 준비사항을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을 말하고요. 두 번째는 인내하는 마음, 즉 금방 끝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강조하고요. 세 번째는 묵상을 돕는 큐티 책을 가지고서 시작을 하라고 해요. 그것이 준비 과정이에요.

   실제 과정은 삼 단계인데요, 첫 번째가 기도하기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 시편 1편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깨달을 수 있는 마음과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오늘 저와 여러 성도님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해요. 두 번째 단계가 본문 읽기 방식이에요. 어떤 본문이든지 3번 반복해서 본문을 읽어요. 첫 번째는 소리 내서 읽고, 두 번째는 눈으로 읽고, 세 번째는 마음으로 읽어요.
 


안: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중요한데요. 독일에서는 작가들을 초대해서 작품을 소개할 때 작가가 자기 작품을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이 많다고 하는데요. 그것을 보고 온 한국 작가들이 한국에서 작품읽기를 시작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 그래요. 첫 번째 읽기인 소리 내서 읽는 것이 아주 전통적인 방식이거든요. 서양이나 동양의 오랜 전통은 읽기가 모두 청독(聽讀)이었다는 겁니다. 소리 내서 들으면서 읽었어요. 두 번째는 눈으로 읽는 것인데 이게 묵독이에요. 세 번째는 읽은 것을 가지고 마음에 담는데, 여기서 묵상이 들어와요. 루터나 렉시오 디비나 전통에서 묵상이라고 부른 것이 여기에서는 본문 읽기의 세 번째 읽기 방식인 마음으로 읽는 것과 같아요. 그 다음에 세 번째 단계가 적용이에요. 사실, 본문 읽기에 적용, 곧 아플리카치오Applicatio를 강조한 전통은 18세기 독일 경건주의 전통이에요. 해석학 전통에서 보자면 ‘적용’을 이해의 중요한 과정으로 되살린 작품이 1960년에 나온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진리와 방법〉입니다. ‘적용할 수 없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가다머는 보았지요. 무엇을 이해하자면 알아들음과 해석과 적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적용할 때 이해가 완결된다고 강조해요.

   적용하는 과정에 <우리들교회>에서 쓰는 해석학적 원리가 있어요. 그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지고 성경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읽고, 두 번째는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원리를 김양재 목사가 무슨 책을 읽고 발견한 것이라 보지 않아요.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면서 스스로 체득한 원리가 아닌가 해요. 이 원리는 말씀과 삶 사이의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읽기에요. 고난 받는 삶이라든지, 실제로 한 경험이라든지, 내가 부딪친 질문들을 가지고 들어가서 성경을 읽는 것이죠. 자칫하면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나와 관련시켜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내 삶을 읽게 하고 있어요. 내가 삶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나 자신을 수동적으로 말씀 앞에 내어놓는 방식의 성경 읽기와 성경해석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것이 지금 <우리들교회>에서 쓰고 있는 해석 원리라 하는 것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안: 예전에 판교 톨게이트를 지나가다 <우리들교회> 벽면에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거대한 현수막을 붙여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고난을 강조하는 것은 루터가 시련을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강: 맞아요. 성경 읽기와 관련해서 <우리들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두 번째 원리가 바로 ‘고난은 축복’이라고 하는 신학이에요. 이 교회가 한국 교회에 편만해 있는 기복신앙을 극복하려고 하는데요. 기복신앙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난은 저주다. 고난은 하나님의 벌이다’라고 생각하잖아요. 물질적 축복을 받거나 건강하거나 취직이 잘되거나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떨어지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은 신앙인들은 겪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요. 고난에 대한 이런 이해가 한국 교회 안에 있는데, ‘고난은 축복’이라는 이해는 기복신앙을 깨뜨리는 기능을 한다고 보아요.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은 고난을 당하면서 내가 죄인 됨을 깨닫고 내 죄를 회개함으로 인해서 은혜를 얻게 되고, 비록 고난 중이지만 그 가운데에서 기뻐하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아주 강조해요.
 


안: 제가 듣기로는 <우리들교회>의 교인들이 실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것이 균형을 잡기보다는 지나치게 한쪽 극단으로 가게 되어 피학적인 측면이 있지 않냐고 하거든요. 예를 들자면 일상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조차도 불안해 하면서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요. 어려움이 없으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한다는데요.

 

강: 서양 교회 전통을 보면 ‘고난은 벌이다, 고난은 심판이다’라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있는 생각이고요. 고난, 고통 곧 패인pain이라는 말은 뽀에나poena, 곧 벌이라는 말에서 왔어요. 아픔이라는 것이 벌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욥기는 사실 이걸 깨뜨리는 역할을 해요. 욥의 고난이 왜 왔어요? 욥이 고난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욥을 믿었고 욥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유가 있다면 신뢰가 이유지, 욥이 저지른 무슨 죄의 결과 때문에 온 고난은 아니었거던요. C. S. 루이스가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이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고 싶은데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들, 쓸데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고난을 받는 동안에 쓸데없는 것들을 비우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기를 원하는 그 공간을 비워내는 것이라고 하지요. 루이스는 강아지 비유를 듭니다. 집에 키우는 개를 침대에 같이 재우고 싶으면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목욕탕에서 때를 박박 벗기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고통을 주어서라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고난이라고 보는 관점이지요.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것과 상관없지요. 고난은 정화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고난의 신학이 <우리들교회> 사역에 깊이 깔려 있더군요. 

 


안: 좀 더 포괄적인 성경 읽기나 묵상의 모습은 없었습니까?

 

강: 있지요. 그게 바로 ‘구속사 신학’이어요. 김양재 목사는 줄곧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고 말해요. ‘구속사’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에어랑은(Erlangen)학파가 썼고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라든지, 끌라스 스킬더Klass Schilder라든지 오스카 쿨만Oscar Culmann 등이 썼지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이레네우스(Irenaeus)나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이나 다 구속사 신학이죠.

   <우리들교회>는 구속사 신학의 관점에서 모든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삶을 적용하려고 해요. 1930년대 말, 40년대에 화란에서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이냐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는데, 역사적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거냐, 모범적으로 해석할 거냐 하는 것에 대한 논쟁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들교회>에서 ‘구속사’라고 할 때는 성경 본문을 문자적 해석이나 역사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죠.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타락, 심판, 종말의 관점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이 두드러집니다.
 


안: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제대로 읽으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네요.

 

강: 성경 말씀을 읽는다는 것이 결국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되어야 해요. 제대로 살려면 말씀을 제대로 먹어야 하거든요. 말씀을 먹는다 하면서도 귀로 듣고 말 경우가 많지요. 사실은 제대로 먹어야지요. 말씀을 잘근잘근 씹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해야지요. 말씀은 반드시 일상의 삶과 연관되어 씹어야 해요. 그래야 말씀과 함께 성령이 주시는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가 일상 속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변화가 반영이 되지요. 우리는 너무 피상적인 방식으로 읽어요. 읽는 사람이나 읽지 않은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으면 문제이지요.

   어떤 목사가 1년에 성경을 45독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1년에 45독 하자면 8일에 한 번은 읽어야 해요. 눈으로 보면서 넘기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삶이 변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성경을 읽었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품과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45독 한다는 말은 자기 의를 쌓음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요? 성경을 통독하냐 다독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읽은 말씀이 영의 양식이 되어 우리 삶 전체를 바꿔놓아야지요. 성경읽기가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빚어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 묵상을 날마다 하면서도 성품과 말과 행위가 여전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 목사로서 교인들과 성경을 같이 읽으려 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뭐냐 하면 성경 구절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은 고사하고 성경 자체를 아예 모르거든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경험이 없는 거죠. 깊이 한 구절이나 어떤 부분을 묵상하기 전에 전체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데 아예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기본적으로 한 번이라도 같이 읽게 할거냐 하는 것입니다.

 

강: 그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1년에 한 번 통독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는 없거든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속속들이 무슨 지식의 차원에서 다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수도원 전통에 보면 주로 읽던 것이 시편이었죠. 다윗이 어떤 행동을 했고 아브라함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아는 역사적인 지식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말씀을 얼마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 말씀이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내도록 나를 말씀 앞에 내어놓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중세에는 읽는 것과 관련해서 루미나치오ruminatio란 말을 씁니다. ‘되새김질’이라는 말이지요. 소가 입으로 여물을 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씹고 또 씹는 방식으로 읽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구약성경이 어떻고, 모세오경이 무엇이고, 각 권의 핵심사상이 뭐고, 신약성경이 몇 권이고, 복음서와 서신서가 어떻게 구성되었냐 하는 식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는 것도 필요한데 그건 정말 초보 지식에 해당하겠지요. 

 


안: 교수님이 자주 드시는 자전거 타는 비유가 생각납니다.

 

강: 그렇죠. 자전거를 세워놓고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이다. 자전거 바퀴는 체인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그리고 핸들로 방향을 조정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100번을 들어서 자전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전거를 못 타거든요. 중요한 것은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이죠. 자전거를 타려면 자전거에 올라타야 해요. 넘어지더라도 페달을 저어야 되는 것이죠. 성경 읽기 방식이나 설교 듣는 것도 자전거를 세워놓고 자전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요. ‘아 저게 자전거구나. 아 그렇구나.’ 그렇게 해서 알게 되는 정보는 많은데 그것이 자전거를 타게 만들지는 못하잖아요. 자전거는 올라타 봐야 타는 겁니다. 말씀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해야 말씀이 됩니다.

   실제로 살아내려면 지식이 정보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람을 바꾸어내는 차원으로 바뀌어야지요. 변혁적인 지식, 사람을 바꾸는 (transforming knowledge)이 참된 지식입니다. 변화를 일으켜야 제대로 된 지식인데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그렇지 않아요. 자전거를 세워놓고, ‘저게 자전거다’라고 읊조리기만 하면 소용이 없어요. 자전거인지 오토바이인지 구별할 줄은 물론 알아야지요. 오토바이면 시동을 걸어야 하고, 자전거라면 페달을 밟아야 할 테니까요. 오토바이를 타고 앉아 페달을 밟으려고 하거나, 자전거에 걸터앉아 시동을 걸려는 일은 없어야지요. 그렇지만 일단 올라타야 되거든요. 성경 말씀에 ‘올라탄다’는 것은, 그 말씀을 행해보려고 애를 쓰고 넘어지고 깨어져 보는 것이지요. 그 때야 그 말씀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안: 설교하면서도 고민스러운 부분이 그것입니다. 설교는 선포라는 말도 있는데, 자질구레 설명하려고 합니다. 내가 잘 설명하면 교인들이 알아듣고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요즘 설교나 성경 공부하는 방식이 어떤지 잘 생각해야 해요.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전거 올라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전거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잘 구별해보는 것이 좋겠어요.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지금 자전거를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설교를 들으면서 올라타고 있는 것인가를 구분해야 해요. 쉽게 구분해내는 것이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방식으로 설교를 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야 될지, 적어도 다시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안: 삶을 위한 성경읽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저도 ‘행하기 전에는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데요.

 

강: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거든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이 두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율법교사가 질문한 후에 예수님이 무엇이라 했습니다.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살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들려준 다음에 “이 셋 중에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냐?”고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율법교사가 답했지요. 예수님께서 “가서 그와 같이 하십시오”라고 하셨죠.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이가 들어야 할 말씀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 모든 것들을 가지고 가서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요구하는 말씀들이 그 속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것들을 알아야 하고,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할 지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안: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문에 보면 ‘성경이 주로 무엇을 가르치냐’고 묻고,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을 것인지, 둘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하시는지 가르칩니다’ 라고 답하지 않습니까?  

 

강: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읽으면서 늘 하던 질문이 있었어요. 첫 번째는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두 번째는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세 번째는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나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를 물었다고 해요. 물음을 가지고 성경에 들어가면 성경은 나에게 믿어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 내가 회개해야 할 것과 감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주지요. 물음을 가지고 성경에 들어가야 해요. 성경 전체를 잘 알면 좋겠지만 설사 모르더라도 괜찮다고 봐요. <로마서> 하나를 읽더라도, 아니면 복음서나 시편 한 편을 읽더라도 물음을 가지고서 내가 믿어야 할 것, 행해야 할 것, 회개해야 할 것, 감사해야 할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한다면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성경 말씀이 문자로 쓰이기는 했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기 때문에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책이거든요. 성경 문자의 무오성에만 붙잡혀 있을 수 없지요. 문자에만 집중하면 성경이 성령님의 역사로 쓰인 책이라는 것을 불신하는 결과가 되겠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요. 만일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한다면 통독을 강조해도 좋고, 하루 한 단어만 붙잡고 사는 것도 좋겠지요.

 


안: 제가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요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일하지 않으십니까? 성경 기록을 보면, 창조부터 종말까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우리를 위해서 일해오신 것이 구속사인데, 그 구속사가 우리에게 감격적으로 다가와야,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읽더라도 깊이 묵상할 수 있고, 그 한 구절을 통해서 역사 전체로까지 확장될 수 있고, 구체적인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있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아까 큐티 이야기도 하셨는데, 큐티의 장점도 있지만, 큐티의 약점이라고 지적이 되는 것이, 한 구절을 가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적용해서 그냥 종교인으로 살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강: 그럴 위험은 언제나 있지요. 학자들에게는 객관성에만 머무는 위험이 있지만 성경 묵상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주관성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냥 매일 매일 하는 행사처럼 형식에 머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양재 목사도 강조하듯이 내 삶을 가지고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가지고 내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해석학적 원리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적용하고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이지요.
 


안: 삶을 가지고 가서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본받아야 할 점인데요.

 

강: 아까 이야기한 고난에 대한 이해가 잘못하면 마조히즘에 빠질 위험이 있을 수 있어요. 이 위험을 분명히 의식해야지요. 내 삶을 가지고 성경에 들어갈 때 방금 얘기한 주관화의 위험도 있지요.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성도들에게 역시 중요한 것은 자신과 공동체와 관련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라 생각해요. 주희는 읽기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 반구제기(反求諸己), 곧 “돌이켜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보라”고 하지요. 
 


안: 성경을 읽을 때 주관화에 빠질 위험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족집게처럼 말씀을 집어내는 것 말입니다.

 

강: 대표적 경우로 드는 것이 있어요. 디모데후서 4장 9절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속히 나에게로 오라”고 했어요. 또 13절에 가서 보면 “너는 속히 겨울이 가기 전에 나에게 오라”고 한번 더 부탁하지요. 그것을 독일 신학자 본회퍼가 묵상했는데요. 1939년에 징집을 피해 뉴욕에 왔다가 26일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1939년 6월 26일 그의 일기장을 보면 이 구절이 다시 독일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를 미국으로 불러오는 데 엄청난 노력을 했던 라이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와 그의 친구 파울 레만(Paul Lehmann)에게 엄청 실망을 안겨준 결정이었지요. 결국 독일에는 전쟁이 났고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지요. 성경을 그렇게 읽고 적용하는 것이 온당하냐 안 하냐? 사례 자체만 놓고 보면 굉장히 주관적인 해석이라 볼 수 있지요. ‘주관화에 빠졌다. 본회퍼가 성경을 잘못 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본회퍼가 독일 상황을 두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자기의 진로를 모색한 상황에서 그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얻은 결론이라 보아야겠지요. 이 말씀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씀으로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책을 펼쳐들고 “어서 오라, 겨울이 가기 전에 어서 오라”는 말씀을 마치 점치듯이 했다면 잘못이겠지요. 말씀을 오랫동안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주관화에 빠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때 돌아가지 않았다면 오래 살아, 신학적으로 더 기여했겠지요. 39세의 젊은 나이로 본회퍼가 죽었으니 말이지요. 그가 남겨놓은 글만 해도 보통 사람이 80평생 써도 다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 되지요.  

 



안: 주관성을 피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강: 주관성을 피하는 방법은 물론 성경의 시대적 배경과 성경의 장르와 성경 전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요. 한 순간이 아니라 지금까지 쭉 살아온 삶과 그 삶의 콘텍스트와 관련해서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긴 시간이 필요하고, 현재 처해있는 여러 상황, 여러 계기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함께 작용을 한다면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기도와 말씀과 묵상과 나아가 만일 공동체적인 숙고와 분별이 함께 간다면 주관성의 오류를 벗어날 여지는 그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성경을 예컨대 <오디세이아>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듯이 읽는다면 작품으로 즐길 수 있고 도덕적 감화는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의 일상과 직접 관련지어 읽을 수는 없겠지요. 
 


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를 보니까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이라는 목사의 이야기인데요.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그가 처음에 주교의 임명을 받아서 한 교구에 부임했는데 교인들이 장로교주의에 헌신되어 있었기에 주교의 임명을 받고 오는 그를 보고는 교구민들이 교회문을 닫아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회 창문을 넘어서 들어갔는데요. 고민하다가 인근 교구의 목사가 인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설교를 들으러 갔는데 공교롭게도 요한복음 10장 1절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도둑이요 강도’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는 심히 부끄러워하면서 장로교주의로 전향했는데요. 

 

강: 비슷한 예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이지요. 그의 〈고백록〉 8권에 보면 밀라노 정원에서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e Lege Tole Rege, 즉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는 뜻이었지요. 그래서 집어서 읽은 게 바로 로마서 13장 말씀이지요. “이제는 자다가 깰 때라”라는 말씀 말입니다. 그걸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돌이켰지요.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됐거든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분명히 아이들이 주위에 있지 않았고, 노래 소리로 들은 내용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믿었지요. 딴지를 걸 수 있겠지요. ‘혼자서 착각했겠지,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들었겠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계속 고뇌 속에서 기도하고 책을 읽거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회심한 경우들을 떠올렸거든요.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나 빅토리누스의 경우였지요. 밀라노 정원에서 말씀을 읽다가 덮어두고 또 고뇌하고 기도하고 울었지요. 그러다가 다시 <로마서>를 펼쳐 읽었거든요. 그러면서 딱 그 구절이 눈에 들어온 거에요.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라 믿었지요. 이것을 순전히 주관적이라고만 하겠어요?
 


안: 맞습니다. 객관성의 위험도 있고 주관성의 위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될 것입니다.

 

강: 객관성의 위험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옛날 옛적에 써 놓은 글로만 읽고 옛날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이지요. 주관성의 위험은 옛날에 일어난 일들을 모두 나하고 상관해서 마치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전부 연결해서 읽는 위험이에요. 양쪽 다 위험하지요. 그러나 어떤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다’라는 확신을 얻는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살아온 내 삶과 내가 지난 몇 년간 해온 기도와 내가 처해있는 삶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그 가운데에서 ‘아, 이게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라는 확신을 얻는다면 그것을 주관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어요? 더구나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사는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같이 기도하던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면 주관적이라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안: 주관화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에도 나오듯이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할 텐데요. 예배에서 함께 읽는 것 말입니다. 고대 교회로부터 렉시오Lectio라고 해서 교회력을 따라 구약과 신약의 중요한 본문을 읽어갔던 것 말입니다.

 

강: 우리가 지금 예배 중 성경을 읽는 것보다 사실은 훨씬 더 많은 성경을 예배 중 읽어야 해요. 설교 본문 말고도 신약과 구약을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공동으로 읽을 필요가 있어요. 〈드라마 바이블〉이라는 것 알죠? 성경 읽기가 힘들 때 도움이 돼요. 소리 나게 크게 틀어놓고 귀로 듣는 것도 괜찮아요. 예배시간에 적어도 구약 2장, 신약 2장 정도 계속해서 읽으면 좋겠어요. 설교 시간을 조금 줄이더라도, 아니면 찬양 순서나 다른 순서를 조금 줄이더라도 공동체적으로 말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안: 교회력에 따르면 3년 단위의 〈성서정과〉가 있지 않습니까? 그 전통을 받아서 그 성경 읽기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삼아도 되거든요. 예를 들면 구약 두 본문, 신약 두 본문이고 마지막 본문은 복음서 본문인데요. 이렇게 네 본문이 나오니까 일 년 단위로, 아니면 2년, 3년 단위로 성경 전체를 읽고 구속사 전체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회중에게 감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강: 성경을 창세기부터 통독을 안 하더라도 설교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계속 반복할 수 있잖아요? 매일, 매시간 반복할 수 있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부터 종말까지 말입니다. N. T. 라이트는 다섯 단계로 나누고요. 마이클 고힌Michael W. Goheen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G. Bartholomew는 하나님의 드라마를 6막으로 나누지요. 창조, 타락, 이스라엘의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교회의 선교, 종말의 6막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지요. 이 관점에서 계속해서 성경을 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구속사의 틀이 되는 것이지요. 이 틀이 없으면 성경책은 그냥 도덕책이 되고, 자기계발서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속사의 틀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요즘은 너무 약화되어 버렸어요.
 


안: 그러면 설교가 주제 설교가 될 수밖에 없죠.

 

강: 설사 주제 설교를 하더라도 이 틀을 이해하면서 말씀을 듣는다면 이게 그냥 교훈에 그치지 않죠.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서 일정한 자리를 가지고서 하는 얘기니까요. 그리고 내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이야기니까요.

 

 


안: 교수님이 오늘 바빙크에 대해 강의하면서 언급하신 한 부분을 듣고 고민이 됐는데요.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가 설교문을 작성하고 나면 그것을 위원회에 보내가지고 과연 본인들의 삶과 이 말씀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피드백을 받고, 또 본인들이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그 내용에 첨가해서 설교하고 있다는 대목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교를 하면 목사 개인의 해석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성경을 읽는 방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사도 교인들도 성숙해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강: 그렇죠. 그렇게 설교하면 설교가 목사 개인의 일이 아니고 교회의 일이 되는 거죠.
 


안: 사실, 목사의 설교는 일차적으로 목사 개인이 만들지만 회중이 함께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피드백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남에서 목회를 하면 설교를 못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강남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설교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사실, 회중이 설교를 만드는 부분이 가면 갈수록 더 커져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성경 해석뿐만 아니라 성경 읽기를 목사와 더불어 교인들이 같이하는 이 작업이 중요할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강: 대형 교회에서 하는 설교를 가끔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어요. “아이구, 저 말씀 듣고 어떻게 사는가?” 말씀의 기근, 말씀의 허기가 들 정도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는데 앉아 듣는 사람들은 행복해 해요. 화려한 예배 공간에서, 좋은 음악에 수 천 명이 한 공간에서 드리는 예배 속에는 일종의 황홀감이 자리 잡을 수 있거든요. 

 


안: 우스운 이야기겠지만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설교 표절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남의 설교를 자기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좋은 설교를 많이 보고 듣고 본받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당당하게 밝히고 설교를 표절하는 것 말입니다. 미국 교회는 좀 어떻습니까?

 

강: 미국 교회는 천차만별이에요. 미국 교회는 원래부터 개 교회 중심이었기 때문에 개 교회 목사의 역량에 따라서 다 달라요. 교단 내에서도 예배의 모습이 교회마다 다 달라요. 자기들이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배하지요. 아주 고전적인 방식으로 십자가와 성경책을 받히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예배 도중에 방언 기도하고 방언 찬송하는 교회도 있고요. 어쨌든 미국 교회는 예배가 활발해요.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래요. 삶은 아주 개인적인 삶이고요.
 


안: 우리 한국 교회가 미국 복음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데, 성경을 아주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읽고 적용하고 설교하니깐 결국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은 아무 고민이 없습니다.

 

강: 그랜즈 래피즈에는 짐 삼라(Jim Samra)라고 설교를 잘 하는 목사님이 계셔요. 원래는 침례교회 목사인데 지금은 교회가 교단에 속하지 않고 독립교회로 유지하고 있지요. 그 교회가 설교를 목사님과 설교팀이 함께 만들어요. 또 다른 큰 교회도 있는데 그 교회 목사는 신학도 안 한 목사인데요. 캠퍼스를 네 개나 동시에 운영할 정도로 교인들이 많이 모여요. 개인기에 많이 의존하는 모습을 보게 돼요.
 


안: 그게 오래 갈 수 없을텐데요.

 

강: 한창일 때는 문제없겠지요. 무너질 가능성도 있지요. 그게 저는 오늘 사회와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한 소비주의 때문이 아닌가 해요. 소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욕구 중심이거든요. ‘내가 뭘 욕구하는가, 내가 뭘 필요로 하는가’가 중요하고,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지요. 욕구가 기초가 되지요. 영적 욕구라고 포장하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요. 교회는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움직이지요. 대부분이 여기에 빠져 있는 듯해요.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헤어 나올 길이 없어요. 모든 것이 욕구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뒤틀리면 떠나는 것이지요. 또 딴 데 가서 욕구를 충족하다가 만족이 안 되면 또 다른 곳을 찾고,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하지요.
 


안: 선택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이 이런 상황을 부채질할 텐데요.

 

강: 그렇지요. 교회도 시장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지요. 이런 저런 교회들이 있으니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교회를 찾는 것이지요. 먹을 것이 많이 있을 때처럼 이것저것 먹어보고 그 가운데 제일 마음이 기우는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선택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 가능성이라는 것이 현 시대 문화의 특징인데, 이것이 소비주의를 부추기지요. 옛날 교구중심 교회처럼 한 교회만 가야 한다는 규칙이 없잖아요. 싫든 좋든 한 교회에 앉아서 평생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한국 교회도 이런 면에 깊이 물들어 있지요. 나의 욕구를 충족 못 시키면, 곧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있거든요. 

 



안: 교수님이 성부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을 해설하면서 무신론의 도전을 언급하신 것이 생각나는데요.

 

강: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과 관련해서 세 가지 도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무신론의 도전을 생각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예수가 과연 유일한 구세주인가 하는 도전이 있지요. 성령님과 관련해서는, 진리는 없다는 주장이나 소비주의가 가장 큰 도전이 아닌가 해요.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영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죠. 저는 오늘 교회는 이 세 가지의 도전, 곧 무신론과 종교 다원주의와 소비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봐요. 물론 배타주의도 문제가 되고, 교회 안에 있는 실천적 무신론도 문제가 되지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사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소비주의와 이와 연관된 성장주의는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소비주의를 따르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지요. 큰 교회들을 보십시오. 멋진 오케스트라가 있는 예배에 참석하고, 수천명이 한 목소리로 찬송하고, 멋진 설교를 듣고 나오면 마치 몇 백 불짜리 콘서트에 다녀오는 것처럼 뿌듯이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안으로는 서서히 망해가지요.  
 


안: 그렇다면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데요.

 

강: 오늘 나누는 주제처럼 말씀을 꼭꼭 씹어야 하고, 잘 먹어야 하는데요. 말씀을 소화시켜서 몸으로 영으로 온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이 되어야지요. ‘영적인 것’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사탄의 함정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철저히 육신의 존재거든요. 대형 교회들이 그러는데요. 자꾸 영성, 영성을 말하고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많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어요. 



안: 한국 교회가 이제는 힘이 있으니까 ‘영적인 법이 세상 법 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 놓고도 영적인 법이 세상 법 위에 있으니까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강: 마니교가 영적인 걸 강조했는데요. 그렇다면 육신의 죄는 아무 죄가 아닌 것이 되거든요. 영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개혁 신앙 전통이 지향하는 영성은 철저히 ‘일상의 영성’이지요.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의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의 신실함이 드러나는 것이 영성이고 영적인 것이지요. 육신을 떠나 고상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개혁 신앙 전통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우리가 속한 고신에도 영성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안: 피곤하실 텐데 오늘 오후 내내 바빙크 강의를 하신 직후에 이렇게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번에는 방금 언급하신 일상의 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미국에 가셔서 칼빈신학교의 신학생들을 잘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강: 그래요. 다음번에 봅시다. 다음 주제는 이미 정해졌네요.




http://reformedjr.com/board05_03/1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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