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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필요한가?

선교

by 김경호 진실 2020. 6. 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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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은 감염병 또는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행병은 감염병이 지역 사회 내에서 발병하는 것을 뜻하지만, 팬데믹은 2개 대륙 이상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병하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의 위험 수준에 따라 총 6단계의 경보단계를 설정하는데, 최상위 단계인 6단계 경보가 바로 팬데믹이다. WHO는 1968년 홍콩 독감,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2020년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선언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번 코로나 19는 3번째 팬데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팬데믹이 다른 두 팬데믹과 다른 점은 전 대륙에 걸쳐서 유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실질적인 첫 번째 팬데믹이었던 노아 홍수 이후로 첫 번째라고 강조한다.

코로나 19는 기존의 모든 상식과 질서를 거의 무너뜨렸고 예상되는 발전의 형태조차 예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서 1차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인류문명의 발전이 2차, 3차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진행된 것은 일정의 루틴(Routine)에 의해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수순을 밟아서 진행되고 발전된 결과였다. 1차 산업혁명의 토대 위에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발전되었고 그런 식으로 3차,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었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까지 진행된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뛰어넘는 급속한 발전의 결과로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코로나 19의 발병은 4차 산업혁명의 초기에 이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코로나 19가 기존의 예배 형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음을 경험했다. 과거에 우리는 순복음교회에서 수요예배 때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지교회에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어 설교 시간에 틀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비판했었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청중의 인격이 서로 만나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설교하고 들을 때 그것이 참된 설교요 그 예배가 마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양 가르치고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상황이 이 기존의 생각이 무색하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SNS를 통한 영상예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아주 자연스러운 예배의 형태로 자리 잡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음에도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가 오히려 자유롭고 편하며 헌금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급격한 변화를 겪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선교지이다. 가뜩이나 후원교회의 예배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여 헌금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자연히 선교비에 적신호가 켜졌다. 전체의 70%가 넘는 교회가 미자립 교회라는 점을 생각할 때 교회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마당에 선교비부터 줄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콰렌테나(Cuarentena, 코로나 19로 인해 돌아다니지 않고 집 안에서 고립되어있는 상황을 일컫는 스페인어)로 인해 선교사들조차 사역이 어려운 상황이고 선교지에서도 장차 상황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언제 또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의 선교가 어떻게 진행이 되어야 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여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연 선교사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선교 현지를 고수해야 하는가? SNS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선교비를 보내어서 선교지의 교회를 도우면 되지 굳이 거기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물론 복음전파는 SNS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사람이 직접 전하지 않아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지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남미에는 기독교 TV나 라디오 방송국이 많고 병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프로그램이 어디에나 있다. 기도하는 분이 방송을 청취하는 독자들에게 “아픈 부분에 손을 얹으라”고 말한 뒤에 기도하면 실제적으로 병이 떠나가고 고침을 받는 예가 많다. 굳이 손을 환부에 대고 안수기도할 필요가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에서 놓임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 아직도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더구나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앞으로의 선교의 전략을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선교사가 계속 선교지에 있어야 하며 한국교회는 그 많은 재정을 투입해 가면서 계속 선교사를 파송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성육신적 선교원리”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SNS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친히 예수께서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처럼 전도와 선교의 결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결코 SNS를 통해서는 보여줄 수 없다.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직접 보여주심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교사도 작은 예수로서 선교지에서 성육신의 삶을 몸소 살아서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달아 알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라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교사가 몸으로 선교현장에 있어야 한다.

이번 주간에 M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 5가정이 모여서 멤버케어 리트릿을 가졌다. 이들은 안식년으로 혹은 코로나 사태로 일시 귀국하여 한국에 체류 중인 선교사들인데 이들도 동일한 질문으로 고민하고 있던 가운데 선교사가 “성육신의 선교원리”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선교현장에 남아야 한다는 이 말씀으로 도전을 받고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하면서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코로나 19의 위기가 한국교회와 선교 현장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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