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과 청년 윤리
조재필 목사
(새언약교회 담임)
‘윤리’(ethics)란 도덕(moral), 가치(value), 덕목(virtue), 좋은(good), 옳은(right), 당위(ought)와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행위에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윤리적 판단’은 한 개인이 도덕법칙(규범)을 특정 상황에 적용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할 때, 상황에 대한 바른 해석, 도덕법칙에 대한 이해, 그리고 두 가지를 자기 스스로(자아) 실천(적용)해야 합니다. 상황, 도덕법칙, 자아, 이 세 가지가 각기 작동하고 상호간 모순 없이 이루어질 때 윤리적인 삶이 구현됩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중에 ‘도덕법칙’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신다고 믿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라고 밝힌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을 가리켜 ‘도덕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도덕법칙을 간략히 요약해 둔 것이 십계명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1문) 이 십계명을 기준으로 윤리적 판단을 하고, 상황에 적절하게 실천할 할 때 윤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1.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주신 도덕법칙
성경에 따르면 사람이 윤리적인 행동에 이르는 논리적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은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할 당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법칙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도덕법칙을 정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 도덕법칙의 요약이 십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덕법칙을 기독교 신자에게만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다만 불신자에게는 본성(혹은 양심)에 새겨두셨고, 신자에게는 더욱 온전한 법칙을 주셨습니다. 불신자의 양심에 새겨둔 도덕법칙에 대해서는 롬 2:14~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불신자의 본성(양심)에 도덕법칙을 새겨두셨다는 것을 성경 이외에 증명할 수 있습니까?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의 대법전(예케 자사크), 함무라비 법전, 7조 금법과 같은 고대의 법들은 미개하지만 사람들은 본성상 도덕법칙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불신자일지라도 그 본성상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양심으로만 존재할 수도 있고, 법조문이나 제도의 형태로 구현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도덕법칙을 부여하셔서 그것을 따라 옳음과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성에 새겨진 도덕법칙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깨닫거나 순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렇게 정리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아무튼 도덕법칙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온전한 형태의 도덕법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에 모든 도덕법칙이 정리되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요약된 형태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신자들이 모든 상황에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온전한 원리와 근거를 제공합니다.
2. 도덕법칙을 거부하는 시대사조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우리는 거기에 따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 청년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형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하나님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왜곡도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도덕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도덕법칙에 따라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윤리적인 삶이라는 것을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사조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이 사회적 산물이 아니냐?” “도덕이라는 것은 지배 계층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제해 놓은 제도가 아니냐?”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자신의 원하는 것, 심지어 죄에 뿌리박은 것일지라도 정당화시킵니다. 이 시대의 어떤 논리나 합리를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론적인 증거와 경험적인 사례가 진술되었다고 항상 진리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정욕을 따라 불법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방법이 우리 시대에 가득합니다.
이를 분별하기 위해 무엇보다 ‘문화’와 ‘도덕법칙’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도덕법칙에 해당하는 것과 문화와 관습에 해당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 이것이 애매하게 섞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화가 도덕법칙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질은 문화인데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도덕법칙으로 여겨지는 경우입니다. 초대교회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가 빈번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세심하게 다루었습니다. 또 할례의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도덕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문제를 문화적인 것으로 변경시켜 놓았습니다. 강한 신앙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이나 할례를 문화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 어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이나 할례를 문화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도덕법칙과 문화가 어떻게 복잡하게 엮여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오늘날의 사례를 들자면 음주 문화입니다. 저는 술을 마신다고 도덕법을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은 분명 하나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술을 경건의 척도와 도덕법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이기 때문에 가볍게 즐겨도 된다고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근본으로 돌아가고,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본은 다름 아니라, 도덕법의 정신(십계명의 대강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십계명 문구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도덕법의 정신,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더불어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은, 우상의 제물 논쟁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제시한 결론적인 조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 그리스도인은 십계명 각 항목들만 지키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덕을 세운다는 더 높은 수준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문화와 도덕법칙이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를 살아가면서, 윤리적 판단 오류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도덕법칙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상황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본질을 변질시켜버리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 문제나, 결혼과 가족의 문제 같은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도덕법칙으로 다루어져야할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문화와 취향으로, 혹은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 문제로 다룹니다. 이로써 윤리적 판단 오류를 범하고, 비윤리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이론적인 지식을 구비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상당한 지적인 논쟁이 이루어집니다. 그저 십계명 조문을 되내이면서 대처하기에 이미 논쟁이 까다로운 수준이 되었습니다. 십계명을 선언하는 차원으로는 도덕법칙을 문화로 변질시키고 비윤리를 상황화시켜버리는 죄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때 상당한 지적, 이론적 훈련이 필요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적 지식, 성경 해석상의 이해, 사회의 사조적인 흐름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겸하여서 경건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정죄를 즐기는 율법주의자, 교조주의자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응할 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도덕법칙을 문화화하고, 상황화시켜버리는 흐름이 상당히 거세기 때문에 동지가 필요합니다. 도덕법칙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 때 함께 버티고 설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줘야 합니다. 세상은 다수로 밀어붙입니다. 여론 몰이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새로운 상황과 주장에 대하여 아직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 말씀 그대로를 믿고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홀로 서 있기는 위험하고 벅찹니다. 그 시간 동안 함께 버티고 설명해 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나누는 공동체의 공감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3.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 :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문화와 도덕법칙이 혼선을 이루는 이런 시기에 다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마음을 잘 살피는 것입니다. 도덕법칙을 거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이해했다고 해서 자신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2문에서 십계명의 대강령을 밝힙니다. 그 때 단순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단서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대강령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 같이 하라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 성품, 뜻, 힘을 다해야만 윤리적인 판단을 따라 윤리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앞서 살핀 세상의 논리와 무기를 어느덧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성을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를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것, 옛 사람이 요구하는 것에 끌립니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키셔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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