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목회”
권수경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논의의 배경과 목표
이번 포럼은 우리가 살아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본 특성이 중요한 신학적 요소들을 품고 있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 시대의 여러 특성은 모두가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지만 그 특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아직 부족하여 그 실체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분석하는 일이나 현장 목회에 적용하는 일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여 이 발표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이며 어떤 신학적 뜻을 갖는지 살펴보고 그런 특성이 기독교 전체에 또 일선 목회 현장에 어떤 적용과 실천을 요구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특징
1. 급격한 세계관 변화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은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의 종합이다. 1차가 기계 발전을 통한 생산성 혁명, 2차가 인프라 확충과 에너지 확보를 통한 기술 혁명, 3차가 컴퓨터가 일으킨 디지털 혁명이라면 우리 시대는 이 세 가지가 함께 뒤엉켜 세상을 바꾸어 가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도 놀랍도록 발전했다. 네트워킹으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이런 변화는 전 인류에게 동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게다가 발전하는 속도 자체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따라가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실정이다.
이런 시대의 특징 가운데 신학적 함의를 가진 첫째 특징은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다. 전통적으로는 모든 것이 지구 중심, 인간 중심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알게 되면서 지구는 우주의 변방에서도 변방으로 밀려났다. 광대한 우주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지구를 중심으로 쉽게 확보해온 우주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묻게 만든다. 또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보던 가치관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지구가 변방으로 밀려났으니 지구의 주권자 인간의 전통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천문학뿐 아니라 생물학, 윤리학에서도 이제 인간이 왜 특별한지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우리 시대의 사상이 그런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다. 전에는 세상이 지구와 인간을 의미했다. 이제는 온 우주를 가리켜야 맞는데 그렇게 확대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성경 자체가 지구와 인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대한 우주에서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외계인과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외계인도 구원이 필요한가? 그리스도는 어떤 식으로 그들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는가? 성경은 천지창조도 인간 중심, 지구 중심으로 설명한다. 해, 달, 별은 모두 지구에 빛을 비추고 인간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창조하셨는데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에는 지구에서 그 빛을 도저히 감지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각종 동물의 통치를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런데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이 밝힌 우주의 역사는 우주가 수십 억 년 동안 인간 없이도 잘 지내왔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그럼 시대에 뒤진 책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비롯해 시대 상황을 통해 일하시고 말씀도 주셨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구원의 진리를 담아 주셨다. 구약은 무자비한 살육과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한다. 신약은 여성의 일방적 복종을 가르치고 심지어 노예제도까지 용인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런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담고 있고 교회는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영원한 말씀을 잘 간직하고 가르쳐 왔다. 세계관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오늘 달라진 세계관에 익숙한 세대에게 영원한 성경의 진리를 잘 설명하는 일은 복음 전파와 교회 건설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2. 첨단 기기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물건을 두 개 들라면 스마트폰과 리얼돌이다. 스마트폰은 첨단 기기의 상징이면서 오늘 인간과 한 몸이 되어가는 기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리얼돌은 인공지능의 대표자로서 기계가 점점 사람을 닮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두 번째 특징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영역이 점점 많아지고 사람은 또 기계 없이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나이가 든 사람도 그렇지만 우리의 자녀, 손자손녀들은 그냥 폰이 나 자신의 일부다. 폰은 세상과 소통하는 중심이다. 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악한다. 이 폰은 전통적 가치관과 다른 세계관 곧 오늘날의 첨단 학문 및 기술에 입각한 세계관을 사용자 모두에게 전파한다. 우리 자녀들은 성경을 배우기 오래 전부터 스마트폰을 통해 성경과 다른 세계관을 학습해 오고 있다.
폰과 사람이 하나가 된 우리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사람과 자연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다. 진화론을 배우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보다 유사성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반려동물이 많아지면서 이들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도 제기된다. 광대한 우주를 알고 나면 인간이 왜 특별한지 답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리얼돌이 확산되면서 간음 같은 윤리적인 개념이 희미해지고 나아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마저 제기된다. 기성세대는 머리로만 생각하고 걱정하겠지만 차세대 사람들은 이게 이미 그들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아 그들의 생각과 삶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관은 진리를 수용하는 기본 바탕이다. 우리가 어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도 그걸 사실로 수용하지 않은 이유는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신화의 세계는 우리 현실 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신이라는 존재부터 문제가 많고 인간관이나 우주관도 실제 세계와 너무나 달라 사실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오늘날 새 세계관에 익숙한 아이들이 성경을 읽을 때 똑같은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 성경이 가르치는 지구 중심, 인간 중심의 관점이 젊은이가 볼 때는 무지하던 시절의 가치관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상에서는 지동설이 확고한 진리가 됐는데 교회는 아직도 천동설에 입각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식이다. 성경의 복음과 새로운 세계관은 어떤 관계인가? 첨단 기기가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급격한 위축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첨단 기기 문제가 심각한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폰과 함께 자란다. 폰이 있어 갓난아기 때부터 홀로서기가 가능하다. 폰을 통해 사람과 우주와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데 옛날처럼 부모나 교사들이 개입할 여지가 갈수록 줄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주일학교 교육뿐 아니라 가정교육도 정말 어렵다. 소셜네트웍과 인터넷이 정보 제공의 원천이므로 이 영역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지 못한다면 복음의 유산을 전수해 주는 것이 정말 힘들어질 것이다.
3. 종교에 무관심한 시대
세계관의 변화 및 첨단 기기의 발전이 가져 온 결과의 하나가 종교성의 약화 내지 상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세 번째 특징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종교성이 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종교성은 영적 문제에 대한 관심 곧 내세를 생각하고 현세 역시 신의 존재와 연결해 생각하는 태도로서 첨단 기기에 익숙한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그것을 설명하는 과학 원리만 진리로 수용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믿지 못하는 태도를 갖는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므로 유물론적 특성도 강하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어떤 대상을 향해 헌신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대 현상도 있다. 첨단 과학은 신의 존재를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천문학은 빅뱅을 사실로 수용하면서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원 문제에 봉착했다. 양자역학에서는 빛에 대해 알면 알수록 오히려 풀기 어려운 신비를 더 많이 만난다. 물리학에서는 최근 여러 물리상수를 확인하고 당황해하고 있다.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 빛의 속도, 중력, 자기장 등 특정 요소가 특정 값에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발견되는 요소마다 바로 그 값에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음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우연이나 심지어 기적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낮은 확률을 가진 그런 물리상수가 더욱 많이 확인되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유전학의 발전이 진화론의 큰 무기가 됨과 동시에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진화의 결과 인간이 등장했다는 것은 행운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환원주의의 한계를 과학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관심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활용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주와 인간을 있게 만든 그 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참 하나님은 거부하려고 한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 앞에서도 참 하나님 대신 거짓 신, 곧 힌두교나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신비의 신에게 관심을 돌린다. 이런 관심이 과정신학을 비롯한 기독교 내의 범신론적 흐름과 결탁하기도 한다. 이들의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아 참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주어진 무거운 변증학적 과제다.
교회의 차세대도 마찬가지다. 종교성은 약해졌다. 그렇지만 이들이 가진 정보에서도 신의 존재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들도 타락한 인간이기에 참 하나님 아닌 거짓 신을 찾는 세상 조류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이들을 바로 이끌어야 하는데 폰이 있어 어렵다. 교회에 다녀도 헌신은 하지 않는다. 첨단 기기의 시대가 안겨주는 영적 도전은 정말 끝이 없다.
4. 매체의 변화로 인한 복음의 변질
첨단 시대가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복음의 변질이다. 소통의 매체가 바뀌면서 소통의 내용까지 달라지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네 번째 특징이다. 구전되던 전통이 글로 바뀌면 내용도 많이 변했다. 글자가 발명된 이후 꽤 오랫동안 글이 핵심 매체였다. 그런데 오늘은 매체가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움직이는 그림 곧 동영상이다. 유튜브 시대다. 그런데 매체가 바뀌면 내용도 바뀐다. 비주얼이 중요해진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외모에 치중한다. 잘생긴 게 최고다. 외모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류의 큰 동력 하나가 잘생긴 배우들이다. 전에는 말만 잘하면 됐다. 지금은 잘생겨야 된다. 목사도 일단 잘생겨야 설교가 먹힌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변화는 복음 전도에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리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이고 글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내용만 모아 복음서, 서신서 등으로 엮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교회도 그런 변화에 적응하려 애쓴다. 설교 때 PPT를 쓰기도 하고 웬만한 교회 홈페이지에는 설교 동영상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그게 다다.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그래서 말이 동영상이지 실제 내용은 전부 말 아니면 글이다. 그래서 사실 화면은 안 보고 소리만 들어도 충분하다. 그것을 그림으로 옮길 수 없는 이유는 매체를 바꾸는 순간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꼭 필요한 내용만 가려 전할 수 있다. 엄청난 장점이다. 복음을 전하는 매체가 그림으로 바뀌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첫째는 우상숭배의 가능성이다. 중세 교회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과 조각을 활용해 성상 숭배라는 오류를 낳았다. 온 세상이 동영상으로 뒤덮인 지금 그런 위험은 크지 않다. 대신 복음의 내용이 변질되는 문제가 있다. 글이 그림으로 바뀌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흙길인가 자갈길인가? 폭은? 주변은 풀인가 나무인가? 지나가는 인물은 몇인가?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가나 뒤에서 가나? 게다가 사람들은 중요한 것보다 사소한 것에 더 관심을 쏟게 된다. 복음서를 영상으로 만들면 사람들은 예수님 키가 얼만지, 얼굴은 잘 생겼는지 그것부터 볼 것이다. 등장인물 역시 외모 평가에 관심을 쏟을 것이고 복음의 핵심에는 집중하기가 어렵다. 글이 그림으로 바뀌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핵심 메시지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수하는 일은 정말 엄청난 도전이다. 세계관의 문제도 심각한데 매체의 변화가 가져올 복음의 변질도 우려해야 한다. 교회의 다음 세대는 듣는 것보다 보는 데 익숙하다. 긴 글은 아예 읽으려 하지 않는다. 평생 성경을 1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림을 좋아하는 세대에게 어떻게 글로 된 복음을 전할까? 기존의 매체를 고집하면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다. 새 매체로 전하려 하니 복음의 내용을 왜곡없이 전하기가 쉽지 않다. 성경은 유튜브로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을 책으로 계속 봐야 하느냐 아니면 폰에 앱을 깔고 봐도 되느냐 논란이 벌어진다. 매체와 내용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나. 시대를 대하는 교회의 현실
1. 전적 무관심
시대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면서 교회를 바라보면 안타까운 마음부터 든다. 첫째 이유는 이런 민감하고 심각한 변화에 너무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전적인 무관심 내지 무감각이다. 오늘 교회는 첨단 기술에 대해 신학적 성찰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우리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으며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목회자나 의식 있는 교인들이 개인적으로는 몸부림을 치지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해서는 안 될 중요한 착각 하나가 옛날처럼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다. 전에는 아이들을 주일마다 교회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다 예수쟁이가 됐다. 그 때는 세계관 문제나 첨단 기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은 아니다. 부모 압력으로 매 주일 데리고 와도 자립하면 교회를 떠난다. 동성애 반대 운동에 아무리 동참시켜도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 놓고 있는 상태다. 성경과 다른 세계관이 일단 확립되면 그 속에 복음을 심기란 극도로 어려워진다. 아이들이 볼 때 성경이 점점 동화책을 닮아가고 있다. 성경이 변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읽는 아이들이 변해 그렇다. 그런데 그런 심각한 변화에 교회 지도자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목사들 대부분이 새 세계관의 영향을 덜 받는 40대 이상이고 교회 지도자들은 나이가 더 많아 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가 할 일이 참 많다. 그렇지만 다른 노력을 아무리 많이 기울인다 하더라도 세계관 문제에 무관심하면 우리 시대에 아무리 든든하게 지은 집도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세계관 문제는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의 기본 가치관의 문제이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납하는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기본 가치관과 성경의 가치관을 조화시키지 못한다면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고 교회 생활을 연습시키고 날마다 큐티를 훈련시킨다 해도 다음 세대 교회를 세워가기 어려울 것이다. 어른들이 눈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는 사이 우리 아이들 마음은 성경과 다른 가치관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 문제는 우리 시대에 주어진 실로 다급한 영적 싸움이다.
사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주어진 과제는 대부분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것들이다. 개 교회나 개인 목회자가 감당하기는 거의 불가능이다. 총회 차원에서, 가능하다면 같은 신학을 가진 교단이 힘을 합쳐,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주제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나 열악하여 노회 차원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한 질의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몇 년 더 지속되면 어쩌면 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한 기회를 완전히 놓쳐 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2. 무조건적인 거부
세계관 문제와 첨단 기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사회의 사상, 학문, 기술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볼 것인지,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천문학, 생물학, 두뇌공학 등 첨단 과학을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비판하고 어떻게 경계할 것인지 시급하게 논의하고 성경적 관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의논조차 하기 전에 이미 방향을 정해 놓고 달려가고 있다. 일단 거부하고 보자는 태도가 강하다. 진리의 문제가 어쩌면 이념 대립으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현재 세계적으로 상반된 두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의 사조나 첨단 학문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잘 활용하자는 흐름과 사상이든 기술이든 전통과 다른 것은 일단 경계하고 거부하자는 흐름이다. 세계적으로는 전자가 강하지만 유독 우리 한국교회는 두 번째 경향이 강하다. 한국교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반동성애 운동이 매우 활발하고 창조과학회의 영향력도 크다. 그래서 현대 사조에 대한 반감이 강하고 첨단 과학과 기술도 부정적으로 본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면 당연히 순종해야 하겠지만 문제는 이와 관련해 제대로 된 토론 한 번 하지 않고 그래서 성경적 관점을 명확하게 구축하지도 못한 채 전통적인 관점만 붙들고 있다는 점이다.
과제는 분명하다. 복음 전수다. 그렇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진 아이들에게 전통 가치관에 입각한 성경의 메시지를 그대로 주입만 해서는 복음의 진리를 확립시켜 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성경을 읽는 사람들 역시 시대마다 달라지는 생각을 넘어 항구적인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가 특별한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관의 문제는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엄청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두 세계관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여 복음의 정수를 세계관의 차이로 인한 왜곡 없이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빅뱅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조화시키고 모든 생물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과 진화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논의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금의 폐쇄적인 분위기는 다음 세대로 하여금 성경과 과학 가운데 양자택일을 하게 강요하고 그 결과 과학을 부인하거나 교회를 떠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우리 시대에 특히 필요한 것이 복음에 대한 자신감이다. 교회가 뭐가 두려워 첨단 기술이나 학문에 대해 수세적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우주 최고의 진리를 가졌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열린 대화도 가능하고 보다 많은 대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한 보기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세기 1장에 대해 고대 근동의 영향을 완전 부인했지만 지금은 그 영향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성경이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작업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하면 성경이 전하는 그 하나님이 과학자들이 밝혀낸 그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잘 설명하고 따라서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심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한된 노력
교회가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전혀 대처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감지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 관심도 갖고 노력도 하고 있다. 예배와 교육을 위해 첨단 기기를 잘 활용하고 있고 또 스마트폰이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치하고 있다. 또 차세대 교육에 있어서도 스마트폰의 폐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교회에서도 각종 방안을 연구해 실행하고 있다. 다만 이 모든 활동이 근본적인 차원에 못 미치다 보니 온갖 노력 역시 미봉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대체로 첨단 기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다. 스마트폰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결과에 더 민감하다. 예배에 지장을 준다, 신앙 훈련에 방해가 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마트폰 중독되어 있다며 걱정한다. 그래서 폰 금식 같은 행사를 해 아이들을 잠시나마 폰에서 떼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는 어른들 역시 스마트폰을 하루 종일 붙들고 살고 있으면서 그건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혹 느끼는 경우에도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하기보다 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무슨 죄라도 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적지 않다.
문제는 지금 아이들이 폰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그 폰과 함께 자라왔다는 사실이다. 정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폰이 그 아이의 생각과 삶을 형성해 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폰 금식 같은 행사도 잠시 동안의 이벤트성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폰과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연구해 보았는가? 그런 사실이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안고 있는지 분석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폰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 전에 사실 자체를 먼저 정확하게 분석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그 단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런 행사 저런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첨단 기기에 대해서는 언제나 양면을 다 볼 수 있어야 올바른 분석도 가능하고 또 적절한 대응방안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첨단 기기 가운데서 우리 삶의 중심에 선 것이다. 특히 다음 세대의 경우 폰이 곧 삶이다. 따라서 이 폰이 갖는 정확한 용도와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다음 세대를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삶의 너무나 많은 영역이 이 폰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 사회학, 심리학, 의학, 공학 등 수많은 영역의 전문가가 성경과 신학에 정통한 사람들과 함께 연구해야 할 주제다. 게다가 사생활에 속한 부분이 많아 객관적인 데이터를 모으기가 쉽지 않다. 신학자, 목회자, 학부모, 교육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풀어가야 할 부분이다.
4. 무기력함과 궁극적 소망
가치관을 바로잡고 첨단 기기를 주도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상황이 사실 더 심각하다. 오늘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도전은 세상이 너무나 복잡해지고 또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가 학문, 기술, 문화 등의 영역에서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한 단계에 왔다. 문화를 변혁시킬 우리 책임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날 사회와 기술과 학문의 모든 영역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 내 분야가 아니면 입도 열기 어렵다. 심지어 생물학, 인공지능 등 첨단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못 따라잡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형편에 영혼 구원과 양육에 바쁜 교회가 언제 그것을 파악하고 분석해 세상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학문과 기술 문제는 세계관 문제와 맞물려 있다. 첨단을 달리는 영역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바른 판단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성경적 원리대로 실천하기도 힘들어진다.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문제, 낙태 문제, 인권 문제, 리얼돌 문제 등도 그런 원리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교회가 윤리적인 문제에서도 세상을 주도하기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우선은 세상과 세계관이 달라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 전에 아예 뭐가 뭔지 파악조차 할 수 없어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리얼돌이 확산되어 가는 요즈음 성이 무엇인지, 간음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마저 제기되고 있다. 성경과 신학과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찰하고 토론하며 연구해야 될 일들인데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게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첨단 시대 교회의 역할을 생각하면 미래의 그림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로코나 19 사태를 통해 교회는 현실 세계에서 많은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역병이 번지면 원인, 처방, 해결 등을 모색해야 하는데 교회는 정부나 사회 기관이 주도하는 여러 영역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적 한계와 사회적 한계가 동시에 부각되었다. 첨단 기술이나 학문 영역에서는 사실 보이지 않아 그렇지 교회는 오래 전부터 그런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적극적 대응 이전에 연구하지 않고, 연구 이전에 인식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가 마음을 모아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아직은 관심조차 없으니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희망이 남았다면 그건 앞날에 대한 예상이다. 지금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어두운 미래를 예상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라 부르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전에는 지구 온난화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첨단 기술이 그 전에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본다. 지금 지구는 환경도 문화도 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차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인류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그래서 이 점 하나가 교회에는 희망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 구원의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회가 가졌던 능력은 전에도 지금도 이것 하나였다. 중세 때는 세속 권력을 잡기도 했고 오늘날은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을 축복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교회가 교회의 기본 사명인 이것 하나를 잘 붙잡는다면 이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희망은 있다.
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목회
1. 현재의 주류와 미래의 주류
이런 현실, 이런 도전이 그럼 목회 현장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교인이 40대 이상인 경우 별 차이 없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영향을 기술적으로는 많이 받고 있지만 정신적 영향 즉 가치관의 변화는 별로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대부분의 교회가 이 연령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목회를 논한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라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는 경로목회를 준비하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들의 자녀들이다. 어린아이부터 많게는 30대까지 전체 다음 세대다. 이들은 이미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첨단 지식에 입각한 세계관은 젊은 세대의 기본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헌신도가 떨어진다. 일단 교역자들에게서 그런 점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전에는 신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가 되기만 하면 사례에 무관하게 헌신했다. 새벽기도도 기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고서도 충성하지 않는다.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파트타임 전도사에게 새벽기도 나오라 하면 부당노동행위라 생각할 수도 있는 그런 시대다. 교역자가 이럴진대 교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간, 돈, 몸, 재능 등을 드리는 부분에 있어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헌신도가 떨어진다.
가치관의 심각성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에 젊은 사람이 없다. 누가 젊은 사람인가? 새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인구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교회의 청년은 그것보다 수가 훨씬 작다.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새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부모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눈에 띄게 드러날 것이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은 스마트폰보다 나이가 어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폰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얼마나 교회에 남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계문명으로 인해 유물론의 영향도 받았고 광대한 우주가 주는 영향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도 충성도나 헌신도가 이전과 같기는 어려울 것이다.
2. 다음 세대 교육 문제
교회는 다음 세대 교육을 알게 모르게 해 오고 있다. 설교 시간에 동성애를 언급하는 문제라든지 아니면 창조과학회 회원을 불러 강연을 시키는 일도 다 다음 세대 교육에 해당된다. 사실 정말 어려운 주제다. 동성애 반대 강의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창조과학 강의를 해 학생들을 교육시키면 학생들이 정말 성경의 문자적 진리성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갈까?
동성애 반대 자체는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동성애를 수용하는 사회 흐름은 저 깊은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으면서 동성애는 나쁜 것이다 하고 반복적으로 가르친다고 아이들이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금 젊은 세대는 동성애를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익숙해져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이 가친 세계관이 동성애를 나쁘게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가장 바탕에 있는 가치관을 든든하게 세워주지 못하면 지금 하는 그런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조과학의 경우 더 심각하다. 세계적으로 창조과학 즉 젊은지구 창조론은 점점 밀려나고 있는데 유독 우리 한국만 창조과학회가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성경을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 자체는 더없이 귀한 일이지만 성경을 과학책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일반 과학을 극도로 불신하게 만드는 기본 태도는 교회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될 수밖에 없다. 2천 년도 더 된 성경책에 21세기 첨단 과학 지식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인간 저자를 들어 쓰신 하나님 말씀 성경의 기본 특성부터 오해하게 만든다. 그런 흐름이 주도하다 보니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과 우리 시대의 문화 및 학문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더디어지고 있다.
차세대 교육과 관련해 교회가 꼭 해야 할 한 가지는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소셜네트웍과 인터넷을 공략하는 일이다. 이 영역에 성경적 가치관을 최대한 많이 담아 아이들이 세계관을 형성할 때 성경적 기초를 함께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다만 기성세대의 경우 그게 뭔지조차 모를 경우도 많으므로 차세대 멤버 가운데 헌신된 일꾼을 양육하여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3. 교회가 시도할 수 있는 방법.
오늘 교회가 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금 많은 교회가 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전통적 가치관을 우선된 진리로 붙들고 그것으로 일반 학문과 문화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지금 창조과학회가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방법이 한편 이해가 되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의 내용 가운데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충돌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학의 발전으로 이룩한 새로운 가치관을 전부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 그 모든 것을 과학적 진리로 배우는 아이들의 경우 결국은 성경이냐 과학이냐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성경을 택한 아이들은 일반 학문을 등지게 되고 학문을 택한 아이들은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많다. 그런 방향으로 달린다면 교회는 앞으로 사회와 대화나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그룹으로 변해갈 가능성마저 있다.
또 하나는 새로운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전통 세계관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새로운 세계관에 맞게 설명해 주는 방법이다. 이것은 말이 쉽지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박대를 당한다. 나는 이 방법이 다음 세대 교회를 바로 세우고 교회가 다음 세대에도 진리 보존 및 전파의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 믿는다. 쉬운 일은 아니다. 새 세계관의 내용 가운데는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술 밥에 배부를 수 없듯이 힘겹고 먼 여정이지만 한 걸음부터 내디뎌야 한다고 본다. 천동설이 무너지던 때처럼 오랜 기간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이 이어지겠지만 시작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 거는 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개 교회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교단 차원에서, 가능하다면 교단이 연합해서, 전문가들을 초청해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한 결과를 일선 목회자들과 나누어 교회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연구소가 필요하다. 적어도 전문인력 몇 사람이 풀타임으로 매달릴 수 있도록 교회가 재정과 기도의 지원을 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선교 사역이다. 그런 지원의 열매는 당연히 개 교회가 먹게 될 것이다.
4. 복음의 내용과 전달 매체
미래목회를 생각할 때 매체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요즘 설교 때 PPT를 사용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 첨단 기술을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일은 분명 귀한 일이다. 그렇지만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방식 자체가 복음을 왜곡할 소지가 있기에 위험하다. 물론 시각 자료를 글에 국한시키는 경우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림을 보여주거나 동영상을 틀어줄 경우 어느 것이 핵심 내용인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충분히 있다.
복음이 말과 글로 되어 있다는 특징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제한이 된다. 복음을 왜곡하지 않고 첨단 매체를 사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언제나 인물의 외모 문제가 논란을 일으킨다. 신약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구약에서 볼품이 없는 존재라 언급하는데 영화에서는 언제나 멋진 미남이 예수 역을 맡기 때문이다. 외모에 관심이 쏠리면서 복음의 본질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어쩌면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첨단 기술의 사용을 제한해야 할지도 모른다. 복음이 복된 말씀인 것처럼 설교 역시 말과 글이어야지 그림이나 동영상이 될 수가 없다. 시대 조류에 맞추어 설교 때도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려는 시도 자체는 긍정적이겠지만 실제 활용에는 근본적인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설교 동영상 역시 설교자나 청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성경구절을 화면에 띄우는 이상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즘 교회 광고를 동영상으로 하는 교회가 많다. 멋진 시도다. 복음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런 강력한 매체에 맛을 들인 성도들이 덤덤하게 말로만 하는 설교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래목회에서는 설교와 성경공부를 할 때 첨단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실질적인 연습과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기교적인 측면보다는 말씀의 내용을 어떻게 왜곡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매체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 역시 개 교회나 목사 개인이 해결할 주제는 아닐 것이다. 교단 차원에서 충분한 신학적 검토를 거쳐 준비한 자료를 개 교회가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최선일 것이다.
마무리 글
발제 주제를 ‘미래목회’로 주셨다. 몇십 년 뒤에 할 목회를 지금 살피자는 뜻은 아닐 것이니 미래를 대비하는 목회라는 뜻이라고 본다. 미래를 대비해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첫째는 알아야 한다.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녀들이 지금 우리와 얼마나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자라는지 인식해야 한다. 이걸 모르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고 혼만 내고 화만 낼 것이다. 아이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깨달아야 한다. 어디서 이딴 걸 배웠느냐 하지 말고 그렇게 배우도록 돈 대고 물건 사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부모가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그 방법 속에 담긴 뜻이 우리가 생각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을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기도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둘째는 이해하는 일이다. 다음 세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지금 젊은 세대는 고생을 싫어한다. 진리보다 행복에 관심이 많다. 나는 그 자체로 나쁠 게 없다고 본다. 행복을 바로 찾으면 그게 바로 진리다. 엉뚱한 행복이 문제지 행복을 추구하는 그 자체는 나쁠 게 없다. 게다가 지금 젊은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희망이 없다. 일자리도 기계에게 다 뺏기고, 우리 시대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차로 힘들어할 것이다. 돈이 가져올 빈부격차도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고 지식의 격차, 능력의 격차도 극한적으로 커질 가능성이 있다. 아이들의 그런 형편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어야 한다.
셋째는 우리가 주기보다 아이들로 하여금 찾게 도와야 한다. 물론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은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의 핵심. 진리의 핵심을 잘 전달해 주면서 그것이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인도해야 한다.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노하우를 최대한 모아 우리의 빅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사실 기성세대는 준비가 안 돼 있다. 그래서 지금 연구해 도와주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결국 아이들이 스스로 하도록 젊은 일꾼을 길러야 하고 우리는 곁에서 재정으로 기도로 지원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미래 목회라 했는데 사실 목회 현장에 적용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어 죄송하다. 문제만 잔뜩 제기하고 말았는데 지금으로서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 해결의 유일한 가능성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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