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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교황제도의 발전과 서임권 논쟁/조병하 교수

로마 카톨릭

by 김경호 진실 2021. 4. 1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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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제도의 발전과 서임권 논쟁

     
▲ 백석대 역사신학

로마의 감독들은 일찍부터 로마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들을 교황제도 발전에 활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감독이 다른 감독들보다 우월하다는 전교회적인 인정은 처음 3세기 동안은 주어지지 않았다. 감독들 간의 논쟁에서 로마의 감독들은 점차적으로 로마교회가 갖고 있는 특수성을 활용하여 우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스테파누스 1세(254-257)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감독이 다른 감독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처음 사람이다. 그는 마 16:18을 근거로 키프리아누스 감독과 배교자들에게 받은 세례의 타당성을 가지고 다툴 때 이런 자신의 기회를 활용하였다. 키프리아누스에 반해 그는 세례의 유효성을 주장하였다.

4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다마수스 1세(366-384) 감독이 로마감독의 우월성을 두드러지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로마 감독들은 우월성을 확립해 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레오 1세(440-461)이다. 그는 첫 교황이었고 교황 제도를 정착시켰으며, 베드로의 계승권자인 로마감독에게 심판직(마 16:18-), 목양직(요 21:15-19), 교사직(눅 22:3-)이 주어졌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으로 권위와 존경을 획득한 것은 그레고리 1세(590-604) 아래서 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중세에 중재하였고, 문화와 예배의식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찬송가도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음악사적으로 이를 그레고리안 찬트라고 일컫는다. 그는 훗날에 있을 교회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의 감독이 모든 감독들을 우선한다는 주장이 확립되고,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에 의하여 국가, 사회, 정치, 문화 등이 새롭게 재편되면서, 교황 겔라시우스(492-496)는 옛 서로마제국의 지역 내에서 교회가 갖는 가치와 권위를 토대로 ‘두 권력 이론’을 제시하며 감독의 권한이 황제권 위에 있다는 주장을 폈다.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와 프랑크왕 피핀 사이에 퀴에르지의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피핀은 옛 로마의 수호자로 인정받고, 교황은 제한된 이탈리아 지역을 증여받고 교회국가를 이루었다. 프랑크왕은 이제 왕의 임직을 위하여 교황의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오토대제(936-973) 시대에서 보듯이 왕은 교회를 아직도 자신의 권한 아래 두었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로부터 서약을 받았고, 주교직을 받은 표시로 주교의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세에 황제와 교황 사이의 투쟁이 일어났다. 왕은 스스로 사제와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여겼다. 그러나 오토대제는 962년 2월 2일 칼 대제의 왕관을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수여받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새롭게 탄생하였고 교황제도가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제 황제에게 대관하는 이는 교황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11세기 중반까지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우월하였다(신성로마제국이라는 용어는 982년 오토 2세의 증서로부터 활용되었다).

황제 하인리히 3세(1039-1056)는 당시 성직 매매에 빠져 있던 세 명의 교황을 제거하고 독일의 주교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교황권은 독일왕권이 세운 클레멘스 2세와 더불어 다시 성장해 갔다. 그를 뒤 이은 교황들에 의하여 일어난 개혁은 전 교회를 뒤 흔들었고,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은 심판을 받게 되었다. 개혁을 위하여 두 사람이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교황권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 되었다. 수도사 훔베르트와 후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된 클루니 수도사 힐데브란트이다.

서임권 논쟁(1057-1122)의 불씨는 힐데브란트가 1057년 성직 매매를 비판한 세권의 책을 쓰면서 비롯되었다. 훔베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위조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에 근거하여 영적권세가 세속권세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힐데브란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에 즉위와 더불어 훔베르트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성직자의 임명권(서임권) 문제를 두고 황제 하인리히 4세(1054-1106)와 충돌하였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세속권세에 대한 우위권의 문제로 번져 나갔다. 서임권 논쟁의 원인은 밀라노 주교좌의 소유문제였다. 이 일로 1076년 교황은 황제를 출교시켰다. 출교 이후 황제는 1077년 1월에 카놋사 성문 앞에서 여러 날 동안 꿇어 앉아 사죄하였고 출교 취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카놋사의 굴욕이다. 하인리히는 권세를 다시 얻었고 교황이 죽은 후에 이 논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논쟁은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사이의 보름스 협약(1122)으로 끊을 맺게 되었다. 결과로, 왕은 지팡이와 반지 수여를 교황에게 양보하고 서임 전에 왕 홀을 가지고 개최하였던 의식은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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