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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삼열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포삼열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9. 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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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지 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마포삼열 선교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A. 마포삼열 선교사의 성장과 선교사 결단 배경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은 1864년 1월25일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교도적 장로교 신앙을 지닌 아버지 슈만 모펫 (Shuman Moffett)과 우아한 성격이면서 또한 성경을 즐겨 읽던 어머니 마리아 제인 메키(Maria Jane Mckee) 사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6남매 중 4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에 메디슨 제일 교회에서 그의 형 윌(Will)과 하워드( Howard)와 함께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였다. 그는 이 신앙고백을 배신하지 않고 그가 고백한 대로 삶을 살았다.” 장로회 신학 대학에서 30여년 이상 신약학을 가르치고 총장을 지냈던 박 창환 박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흥집회에 나가 설교를 듣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자신을 자신되게 하였다. 는  신앙 간증과 비슷하다.
 
 마포삼열은 15세 때에  하노버 대학에 입학하였다.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즐겁게 놀기도 했지만 과학 중에서도 화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1884년 6월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다. 마포삼열은 이 하노버대학에서 장차 세계의 개척자로서의 꿈을 안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노버 대학의 신학과는 후에 시카고로 이전하여 오게 되었고 현재는 멕코믹 신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1885년 맥코믹 신학대학에 입학할 때에 그는 21세 되던 해였다. 맥코믹 신학교는 1829년에 설립된 학교로 미국에서도 보수주의 신학의 온상지로  세계적인 선교사 양성소로서 유명했다.

졸업 후 존 합키스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준비하던 그가 과학 분야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전환한 것은 대학 기독청년 운동(YMCA)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맥코믹 신학대학 출신으로 다른 나라로 간 사람은 제하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만도 상당수에 달한다. 마포삼열을 위시하여 배위량(Williams baird), 사무엘 기포드(Samuel Gifford), 이길함(Graham Lee),스안론(William Swallen),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 방위량(William Blair), 그리고 찰스 알렌 클라크( Charles Allen Clark)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사실상 한국 장로교의 개척자요 역군으로서 희생적으로 봉사한 분들이다. 멕코믹 신학교가 설립 된지 55년 (1829-1844)동안에 617명의 졸업생 중 단 17명의 선교사 밖에 파송하지 못했으나 그 후 3년(1886-1888)동안에 1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그중 한 학생이 마포삼열이었다. 아무튼 이 신학교에서는 1885년에서 1929년까지 23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마포삼열은 신학교에 입학한 후 4년 동안‘선교’라는 주제에 큰 관심과 열정을 가졌는데 그가 이처럼 선교사로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첫째로 메코믹 신학대학이 창설당시부터 갖고 있었던 선교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무시할 수 없고 둘째로 1886년 여름에 25일 동안 251명의 학생들이 헐몬산에서 수련회를 갖고 유명한 부흥사 무디와 함께 이야기 하며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임에서 이들 중 21명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888년 맥코믹 신학을 졸업한 마포삼열은 곧 미조리주 애플튼시의 제일 장로교에서 약 1년간 시무하다가 1889년 3월 26일에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선교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12월에 미국을 떠나 일본 요꼬하마를 거쳐 1890년 1월 20일, 그의 25세 생일날 아침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에는 곰과 호랑이들이 득실거리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가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주의가 일반화 되어있고,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첫 번째 부딪친 어려움은 한국말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어느 누구나 선교사로 오면 6개월은 한국말을 익히는데 소요되었다. 마포삼열에게 한국말을 가르친 어학선생은 서 상륜으로 그는 한글 성서번역자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한국의 석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적 열정에 비하면 한국어를 익히는 데는 무척 애로가 많았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정치정세에 신경을 많이 썼었는데 그 이유는 대원군의 가톨릭교회 박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재집권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선교사들은 선교사의 집에서 모여 숨을 죽이며 예배를 드렸다. 정식허가는 없었지만 예배의 자유는 그런대로 있었고 스케줄에 따라 설교와 기도와 사회를 번갈아 가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1890년까지는 선교사들은 서울을 중심한 주변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적은 수의 선교사들이 분산되지 않은 것이 선교에 더 바람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B. 순교지 평양을 선교본부로 정한 마포삼열

그가 도착한 1890년 2월까지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는 21명이었다. “마포삼열이 평양에 선교본부를 세우려할 때 평양 인구는 약 1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선교 본부를 설치하기 까지 실로 소설 속의 이야기와 같은 모험적인 도전과 수난을 여러 차례 걸쳐 당하게 되었다. 마포삼열이 1892년에만도 평양을 6번이나 방문한바 있었고 한국에 있는 북장로교 선교사회의 결의에 따라 마포삼열과 이길함과 소안련이 평양에다가 선교본부를 개설하기위한 준비회의를 가진바 있다.

1892년 봄 마포삼열은 한 석진과 함께 평양에 와서 ‘여자 성경 학원’ 자리인 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인과 관리들의 극성스런 반대로 다시 물려주고 대동문 안에 있던 큰집 한 채를 사게 되었다. 그가 평양을 선교본부로 잡은 이면에는 그의 조수가 될 한 석진의 조언과 설득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1893년 2월 말엽에 마포삼열 목사는 이길함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떠나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다가 1893년 11월에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한 석진과 마포삼열은 최 치량과 의논한 끝에 당시 평양의 중심이라고 하는 널다리골에 있는 큰 기와집 한 채를 사게 되었다. 바로 이 지역에 새로 구입한 기와집에서 7명으로 교회를 시작한 곳이 평양 최초의 교회요 후에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1894년 4월 마포삼열은 앞으로 같이 선교할 이길함 목사의 부인이 한국에 왔으므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던 때에 평양에 대박해가 일어났다. "1894년 5월 8일 수요일 저녁에 평양의 대 박해는 터지고 말았다. 마포삼열이 서울에 와있는 사이에 수요기도회 저녁 예배는 한 석진과 김 찬식 전도사와 몇몇 교인들이 기도회를 드렸다. 이날 기도회가 끝날 무렵 돌연 포졸들이 예배당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기도하던 모든 교우들을 결박하여 관찰사로 끌어갔다. 감사는 ‘국법을 어기고 양놈들이 전하는 사교를 전파시키는 너희들의 죄를 용서 할 수 없다.  하면서 하나님을 한번 욕하면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석진은 감사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도리어 감사에게 욕을 하니 감사는 격분하여 한 석진과 감 창식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홀 의사는  마포삼열과 고종황제의 어의로 있던 알렌과 같이 일하던 스크랜톤에게 급히 전보로 알리었다."

이 보고에 접한 마포삼열은 미영 양국 공사에게 청원하여 고종황제에게 교섭한 결과 고종께서 내가 허락하는 것을 그대가 어찌 금하느냐라는 내용의 칙령을 평양감사에게 내렸다. 평양감사는 이미 이 칙령이 전달되었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형장으로 끌어가 형장에서 다시 하나님을 욕하고 배교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배신하지 않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을 죽이려는 사형도구인 목 칼이 그들의 목에 씌워져 있었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한석진은 변절하지 않았다. 서울로부터 이들을 석방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올라온 까닭에 죽일 수는 없어 석방하였다. 귀가한 이들은 굳게 서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모이며 굳건히 일어섰다.

마포삼열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백성을 불러내셨다고 증언하였다. “후일 고종황제는 5백냥을 한 석진에게 보내어 박해에 대한 보상금으로 전해주었다."“한 석진은 백 홍준 전도사의 소개로 1890년 마포삼열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1891년 4월 23세 때에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4 봄 의주에서 가족들을 평양으로 이주시키고 마포 삼열 목사를 도와 주님의 일을 감당하였다.

반면 개인의 신분으로 마포삼열의 평양선교 활동에 가장 아픔을 준 사람은 이 기풍이라는 청년이었다. 이 기풍은 1865년 12월 23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마포삼열이 평양에 정착하던 1894년에는 27세의 청년이었다. “이때 이 기풍은 평양시내 깡패의 두목이었고 아무도그를 당해낼 자도 없었지만 그 성격이 고약했다. 그는 마포삼열에게 한두먼 돌을 던진 사람이 아니었다. 수없이 던졌고 돌로 마포삼열 목사를 쓸어뜨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 기풍은 장터에서 마포삼열을 보고 큼직한 돌 한 개를 주어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들어 맞혔다. 마포삼열의 턱에서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는 의식불명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흘린 피에 이어, 두 번째로 흘러내리는 피였다.

그런데 마포삼열을 쓰러뜨리고 돌아가는 이 기풍의 마음속에 이상한 느낌이 싹터오고 있었다. 자기가 강하고 승리자로 생각했던 도취감은 패배의식으로 바꿔지는 것 같았다. 그 후 1894년 7월 1일 청일전쟁이 터졌다. 평양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수백 구의 시체가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늘어져 있었다. 이 기풍도 전쟁을 피하여 원산으로 피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소안련 선교사를 보았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평양에서 때려눕힌 마포삼열이 생각되었고 꿈에도 나타나 양심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떠들며 야단법석일까? 이때부터 예수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 기풍은 머리가 띵해오는 느낌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순간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미워하느냐?”하는 음성이 가냘프게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눈물을 모르고 살던 이 기풍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선량한 사람을 돌로 때려 눕혔을까? 자기 혼자서 남모르게 뉘우치며 후회되는  심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청일전쟁이 끝나자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먼저 마포삼열 목사를 찾아가서 자기가 집에 돌을 던진 사람이라는 것과 턱에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야 마포삼열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기풍은 이 자리에서 마포삼열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그후 약속대로 마포삼열이 세운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자신을 핍박하고 돌로 치던 사람을 자신의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철저한 교육으로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가장 연소한 졸업생으로 졸업하게 했으며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한 특이한 사건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선교사례가 되었다.

 C. 마포삼열 선교사의 평양 신학교 창설

평양장로회 신학교는 증가 일로에 있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교역자 양성이라는 지상과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1890년 마포삼열이 한국에 온 그해 6월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Nevius)를 초청하여 선교방법론을 듣던 해이기도 했다.  네비우스의 많은 강의 내용 중 ‘사경회’를 강조한 내용이 있었는데 한국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여 교인들을 위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서울에서 ‘사경회’의 성격으로 신학 공부반을 조직하여 1달 동안 지도자 양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선생은 언더우드, 마포삼열, 기포드, 헤론 의사였고  학생은 의주의 백홍준, 김관근, 솔내의 서경조, 최명오, 서울의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 7명이었다.  1892년 신학반은 규모가 커져서 학생이 16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을 ‘전도인’이라는 명칭을 주어 각각 지방으로 보내어 교회 설립을 강조하고 그 방면으로 가르친 사람이 마포삼열이었다.

1893년 마포삼열은 선교본부를 평양으로 이주하여 ‘사경회’를 통하여 교인들의 성경공부와 전도인들을 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가 1900년 마포삼열은 서울에서 실시해오던 신학반을 정규적 신학교로 승격시켜볼 생각으로 선교본부에 교역자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선교본부에서는 신학교 설립을 허락함과 동시에 필요한 기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평양공의회는 1900년 가을에 회의를 열고 지금까지 교회 일을 보아오던 한국사람 중에서 몇 사람을 선정하여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1901년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 방기창, 김 종섭 두 사람을 목사후보로 선발하여 우선 마포삼열 목사의 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902년 신학교 교수는 마포삼열, 배위량, 소안론, 이길함, 한위렴, 편하설 목사 등으로 이들 신학과정 위원들은 5학년의 교육과정을 만들고 지방 공의회에 신학생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보내었다.

1903년 초기 신학교육은 6명의 학생을 3달 동안 교육하고 9개월 동안에는 집에서 공부할 내용을 주고 자습하게 하고 자습한 것을 시험하였다. 1904년에는 전년에 공부한 6명과 새 입학생은 다른 공의회에서 추천해준 학생 15이 되었으며 그리고 한석진과 서경조는 벌써 ‘조사’ 예비과를 마쳤을 뿐만 아니라 교회시무 경험이나 학력으로 처음 입학한 학생들보다 손색이 없었으므로 2학년에 편입하였다. 평양공의회는 마포삼열 목사를 신학교 교장으로 추천하여 제 1대 교장이 되게 하였다. 1906년 평양공의회 이 외의 다른 공의회의 선교사를 교수로 선정하여 언더우드,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를 취임케 하였다. 이들은 교단이 다른 출신도 있었지만 이것은 평양신학교가 처음부터 에큐메니칼한 정신에 입각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07년 6월20일 첫 졸업식이 있었고 9월 17일 오후 2시 첫 노회가 창립되는 시기에 노회석상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의 하나로 7인의 한국 첫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1908년 마포삼열 교장은 본교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사를 건축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던  맥코믹( Mrs. Nettie F. McComick) 여사로부터 5500불(1만1천원)의 기부금을 보내주었고  그녀는 이전부터도 한국의 선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재정적으로 돕고 있었다. 교장은 평양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5천평을 마련하고 정초예배를 드리고 몇 달 만에 완공되어 마포삼열의 집에서 이곳으로 학교를 옮겼다. 맥코믹 여사는 기숙사를 지을 때에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10.000불을 보내 주었고 1920년부터 학생수는 날이 갈수록 더해 현재 신학교가 협소하여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이 실정을 듣고 맥코믹 여사는 1922년 35.000 불(7만여원)을 보내주었다. 그 녀의 큰 지원으로 1922년  5월 15일 정초식을 가지고 새로운 양식의 신학건물을 새로 지을 수 있게  하여 평양의 대소집회가 이곳에서 열릴 수 있게 하였다.” 마포삼열은 초대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회갑을 맞던 1925년까지 24년간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1935년 3월 야쓰다께가 평안남도 지사로 부임하면서 기독교 학교에 먼저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오히려 그는 신학교에 대하여  더 강하게 요구함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평양신학교뿐 아니라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중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인 마포삼열에게 집요하게 요구하여 왔다. 그리하여 그는 마포삼열의 뒤를 이어 신학교 교장이 된 나부열선교사와 윤산온 선교사와 밤깊도록 협의한 끝에 폐교가 되더라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맺고 말았다.  그런 일로 고민한 끝에 심신이 쇠약해지고 식음을 전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그 이상 견디지 못하여 35년간 섬겨오던 신학교 이사장 직을 사면하고 말았다.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비통을 금할 길이 없었다.

D. 거리의 사도 마포삼열

몰라서 하나님을 등진 백성이고,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서양귀신이라고 하였고 찾아오던 그날엔 여리고의 도성이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던 평양이었지만 그가 평양을 떠날 때에는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되었다. 주일 아침이면 평양은 교회당 종소리가 하늘을 치솟았고 평양을 중심한 주위에는 천여교회가 별과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은퇴할 무렵 15만 명의 신자가 있었고 1천여 교회에 졸업한 학생이 800명에 달했고 졸업생들은 그를 영적 아버지로 모셨다. 그는 세계 선교에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업적은 모두 마포삼열의 도보전도의 열매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을 예루살렘으로 만든 마포삼열박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잊을 수 없는 은인이요, 개척자요, 선각자였고 그의 도보전도는 한 영혼을 사랑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 그는 거리를 걷는 것뿐 아니라 언덕 위에 단칸집에 사람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던 한영 혼을 사랑한  사랑의 사도였다.  그는 비단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본인이다. 그는 한사람이라도 지나쳐버리기를 아쉬워하며 같이 걸으면서 예수를 전하였고 아무리 협소한 골짜기나 오솔길이라도 거기에 인가만 있으면 두발로 걸어서 찾아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걷기를 좋아했는데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한국의 산천을 구경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걸어야만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를 ‘거리의 사도’,‘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지 않았고 부르신 소명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려고 노력한 충성된 종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순교당한 평양을 찾아가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고 산넘고 물을 건너며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자였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항상 힘 쓸 일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가르쳤으며 어렵고 힘들지만 말씀을 전파할 때에 나타나는 능력을 보여준 선교사였다. 그가 이 땅에 남긴 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다.


 E. 자신과 마포삼열 선교사와의 영적인 만남

1. 그의 생애를 살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2. 이기풍이 회개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어떤 역사를 볼 수 있는가?

3. 한석진의 순교적 신앙에서 자신이 느끼는 영성은 무엇인가?

4. 그가 세운 학교를 폐교할 때의 심정은 어떠했다고 느끼며 그의 최후의 결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5.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배경에는 그의 '한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그런 사랑이 있는가?

6.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하여 배우고 싶은 영성은 무엇인가?



 마포삼열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총회교육부, 1973.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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