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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2)

이승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21. 7. 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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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2)


II. 수정주의적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우리의 첫 번째 논의가 기독교의 근본적 포기나 변화를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화 요구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유형의 패러다임 변화의 요구는 기독교 내에서 그 내용을 변화해 가는 상황에 맞도록 적절히 수정하면서 새롭게 신학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예로 먼저 Marcus J. Borg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작년에 N. T. Wright와 함께 낸 {예수의 의미}(The Meaning of Jesus: Two Visions)에서 그가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을 크게 구별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유대적 신비가(a Jewish Mystic)요, 동시에 기독교적 메시아(the Christian Messiah)로 본다. 유대적 신비가로 예수는 "영적인 사람, 치료자, 지혜의 교사, 사회적 선지자, 그리고 운동의 주도자"(spirit person, healer, wisdom teacher, social prophet, and movement initiator)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자신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가 그렇게 생각했든지 안든지 간에 부활 후에 제자들이 메시아라는 은유(metaphor)를 예수께 돌렸는데 이는 참된 은유이라고 Borg는 생각한다.

이 은유라는 말에서 시사되듯이 Borg는 복음서 기록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동정녀 탄생은 마태와 누가 사이의 조화될 수 없는 불일치 때문에 비역사적이며, 따라서 '역사화 된 은유'(history metaphorized)라고 한다. 또한 Borg는 제자들이 수난의 장면에 있지 않았다는 근거에서 수난 기사도 대부분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이 수난 기사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역사화하고 로마 세력의 그늘에서 살던 후기 기독교의 삶의 빛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구원적 이해(salvific understanding)을 갖지 않으셨다고 본다.

(후에 그는 예수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희생(a sacrifice for sin)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는 예수께서 이런 이해를 가지셨다는 말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그는 예수의 시체가 계속해서 무덤 안에 있었느냐의 문제를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부활을 "새로운 종류의 존재에로 들어가는 것"(entry into a new kind of existence)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와 현재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 있는 실재로 경험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Borg는 신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는 예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예수 자신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닌 공동체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이 있을 수는 없지만, 재림이라는 은유도 예수께서 주님이심에 대한 또 하나의 확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Borg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는 예수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예수께서 자신이 신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부활-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는 '신적인 실재'(a divine reality)요, 하나님의 구현 또는 하나님의 성육신(the embodiment or incarnation of God)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니케아 신조가 발전하는 전통을 특별한 시간 가운데서 결정화한 것(crystalizing the developing tradition)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수정주의자들 중의 다수는 이런 식으로 니케아 신조와 긍정적으로 관여하는 것에 찬동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이는 이 수정주의적 입장의 폭이 크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이런 입장에 속하나 Borg의 신조들과 연관하려는 시도에는 반대할만한 신학자의 한 예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 없이 기독교를 설명해 보려고 하는 덜햄의 신약학 교수 웨더번(A. J. M. Wedderbur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활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거의 없어서 불가지론적인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의 죽음 후 안식후 첫날 무엇인가가 일어나긴 했을 텐데, 그것은 여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찾지 못한 일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제자들이나 바울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게끔 할만한 어떤 일이 있어 났는데, 그 어떤 일도 "아주 모호한 것으로 증명된다"(proves highly elusive)고 한다(p. 95).

그래서 웨더번은 부활에 대한 불가지론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p. 134) 기독교 신앙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그는 바울의 어떤 개념과 요한복음서의 일부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다른 식의 논의에 대해 개방적이고, 다른 논의를 시사할 수 있다고 보면서(p. 105) 부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는 결국 모든 종류의 사후의 삶 개념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인간 몸의 재구성 또는 살아남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사후의 삶 개념은 유지될 수 없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웨더번은 생각한다. 그는 "영적인 몸'에 대한 바울의 개념이 정합성이 없으며 사후의 삶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한다(pp. 145-47). 또한 다른 모든 사후의 삶에 대한 견해들을 열거하고 거부한 후에 웨더번은 우리는 "부활에 대한 모든 말들을 잠재적으로 오도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버려버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pp. 151f.).

더 나아가서 웨더번은 부활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바울처럼(고전 15:14) 말하는 것은 예수의 존재와 사역, 그리고 그가 지상에서 성취하신 것을 전혀 평가 절하하는 것이며, 다른 인간들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웨더번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현재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며, 영생이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고 하는 요한복음의 실현된 종말론의 의미라고 주장한다(pp. 155-58). 그는 요한복음 20:29에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를 그의 생전에 본 것으로 믿기에 족한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p. 161).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한 바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신앙"(faith for this life alone)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신앙이 쾌락주의로 인도할 필요가 없으며, 이는 윤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 도전적인 신앙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 문학 스타일의 가르침을 강조하면서 그런 입장이 예수님 자신의 신앙과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결론에 근거해서 웨더번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전통적 개념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 개념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도록 하신 것을 본받아(p. 171) 우리도 예수님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그 장의 제목이 "The God of Jesus and Beyond"임에 유의하라). 그래서 웨더번은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에로 우리의 이해를 수정하고, 또 예수님 자신의 신(神)이해를 수정하도록 제안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의 통치자의 권력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능성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p. 192).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고오든 카우프만(Gordon Kauffmann), 도로티 죌레(Dorothee S lle)의 신비주의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웨더번은 진화에 상응하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께서 계시하신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은 "힘을 사용하기를 거부하시는 하나님, 그 대신에 고난받고 위협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인 듯하다"고 한다(p. 208). 전능하지 않고, 피조계와 함께 고난받으시는 하나님 - 이것이 웨더번이 발견한 하나님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신 이해가 성경의 상당 부분과 조화되지 않으며, 서구의 철학적 전통과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 개념은 "성경적 메시지의 몇 가지 중요한 주장들을 아주 신중하게 취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정의하려는 다른 철학적 시도들이 나타내 보이는 단점들을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p. 217).

이 세상의 진화의 과정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예수께서 그에게 기도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 웨더번은 이는 풀 수 없는 긴장의 문제라고 시인한다. 우리의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신비와 비슷한 유비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우리의 하나님 형상 됨을 여기서 발견하려고 한다(p. 200). 그래서 그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차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우주의 질서 있는 기능 배후에 있는, 그 질서 있는 기능에 대해 책임 있는 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아니면 인격보다 더 높은 그러나 역시 인격성을 포괄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으로 지금의 상태에 있게 하는 (그래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는, 왜냐하면 완전히 제멋대로 된 세상(completely random world)에서는 예측과 가설에 대한 실험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일성들(regularities) 안에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 자유로우시다(pp. 204-205)

웨더번의 이런 하나님 개념은 비인격적이며 또 인격적인, 그 두 측면이 상호 보충적인 측면인 그런 하나님 개념이다(p. 211). 이는 다소 과정 신학의 신 개념과 유사하게 보인다. 이런 신개념은 결국 기도의 개념도 바꾸도록 한다. 그래서 웨더번은 기도는 다른 존재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사고의 스타일에 좀더 가까울 것"이라고 한다(p. 205).

웨더번은 자신의 이런 신앙이 잘못될 수 있는 "연약한 신앙"(a vernerable faith)이라고 마지막 장에서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비참하게 죽을 실 정도로 죽기까지 섬겼던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p. 220).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웨더번은 객관적이고 역사적 부활에 대한 확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후의 삶에 대해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면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근거 위에서 기독교 신학을과 실천을 수립해야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pp. 224-25).

이렇게 전통적 신학을 수정해 보려는 시도는 많이 있다. 그것은 결국 성경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이끌어 낸다. 웨더번 교수와 함께 덜햄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교수(Van Mildert Professor of Divinity)인 데이비드 브라운은 계시에 대해 근자에 낸 책인 {전통과 상상력}에서 계시는 "정경의 한계를 너머서도"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옹호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편다: (1) 성경 시기 동안에도 계시의 발전이 있었다(이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계속되는 필름을 어떤 특정한 한 점에서 끊는 것은 사실상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이다", p. 114); (2) 정경을 결정한 후에 일어난 변화를 단지 해석의 변화로만 여기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3) 인격적이고 상호 관계적 계시관은(a personalist, interactionist view of revelation)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정황이 새로운 인간적 반응들을 생산하면서 정경 너머서 계속되는 계시를 함의하게 된다(p. 136). 이런 계시관으로부터 그는 결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가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작용하고 있고, 사실 더 폭넓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다루도록 한다"고 하는 결론에로 나아간다(p. 366). 그러므로 이런 이장에서 작업하는 이들과 전적인 새로움을 지향하는 이들의 거리는 사실상 그리 멀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첫째 입장을 잘 이해하면서도 후-자유주의자(post-liberal)로 자처하면서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죠오지 린드벡의 입장이 신학에서 포스트모던주의를 옹호하는 대변인의 한 사람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는 성경이 일차적인 의미의 진리-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공동체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정의하는 사회언어학적 틀(socio-linguistic framework)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문화-언어학적인 종교관(a cultural-linguistic view of religion)과 규범적 교리론(a regulative theory of doctrine)이라고 부른다. 이런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신학들은 그저 다른 언어와 다른 문법의 기능을 할뿐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비슷한 작업을 좀더 과격화시키면서 90년대의 영국 사회에서 앵글로 가톨릭적 성향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이로 죤 밀뱅크(John Milbank)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1990년에 낸 {신학과 사회 이론}에서 어떤 입장도 전통 없는 근거는 없다고 하면서 현대주의의 숨은 가정들을 드러내고, 자연과학과 사회학의 세속화하는 반신학적(a seculararizing atheology) 신앙의 성격을 강조한다. 20세기의 지성사의 대부분은 상호 경쟁하는 환원주의의 싸움이므로 신학은 이들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세속주의를 해체시킨 후에 밀뱅크는 니체적 허무주의에 적적히 반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참으로 기독교적인 커다란 기사 실재론"(a true Christian metanarrative realism)을 제시한다. 밀뱅크에 의하면 기독교는 폭력의 존재론 위에 세워진 세속과는 달리 평화의 존재론에 헌신한 공동체 안에 위치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다: "존재론적 평화의 절대적 기독교적 이상은 허무주의적 전망에 대한 유일의 대안을 제공해 준다(p. 434).

처음 책에서는 이런 '급진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를 주장했던 밀뱅크는 신학과 신학적 언어의 성격에 관한 근자의 책에서 좀더 과격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입장의 변화라기 보다는 1990년의 책에 내재해 있던 가정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는 신학을 일종의 "메타-기호학"(metasemiotics)인 "신적 언어의 운문"(a poesis of divine language)이라고 여긴다(p. 112). 그는 로고스(logos)를 운문(poesis)으로 이해하면서 이는 '모방'(mimesis)이며 동시에 (정조[ethos]를 도입시키는) 미또스(mythos)로 의미의 원천과 규범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운문(poesis)라는 맥락이 바로 신학을 하는 바른 맥락이라는 것이라. 따라서 그는 신학과 사회 과학과 관여함으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도 부인하며, 우리의 운문(poesis)이 진리와 정의의 시금석에 종속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기독교 신학의 어떤 운문(poesis)이 참되고 바른가를 묻는 것은 신학 자체의 부인이라고 한다.

밀뱅크는 그가 캠브리쥐에서 같이 있었던 그래이엄 워드(Graham Ward)와 캐떠린 픽스톡(Catherine Pickstock)과 함께 "급진적 정통파"(Radical Orthodoxy)라는 앵글로 카톨릭/가톨릭 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통파란 "신조적 기독교(creedal Christianity)"와 초기 중세까지의 "교부적 틀로 표현된 것들(the exemplarity of its patristic matrix)"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p. 2). 이들의 선구자는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앙리 루박(Henri de Lubac)과 발타잘(Hans Urs von Balthasar) 같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고전적 기독교 전통을 포스트모던적으로 (비근거주의적으로) 다시 발굴하여 참으로 포스트모던적 형태의 기독교 교회 신학을 발전시켜 보려고 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pre-modern)의 전통을 포스트모던적 기술(postmodern narration) 속에서 비평적으로 재충용(reappropriation)하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가 포스트모던적 상황 가운데서 모든 신학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입장을 지닌 이들의 근본적 전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밀뱅크의 작품을 보면서 잘 볼 수 있듯이, 이런 입장의 신학에서는 절대적 진리 주장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된고 만다. 또한 이"급진적 정통주의"의 주장자들은 교회의 신학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도, 가빈 드코스타가 잘 지적하듯이,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어떤 구체적 형태를 지닌 것이 아니다(is not locatable). 이런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절대적 진리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예들을 향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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