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훈 - 반일사상으로 혹심한 옥고를 치루고 순교함
[1905-1948 장로교 목사, 순교자,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1. 신앙과 애국의 가문에서 태어나...
교회와 나라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살다가 주의 제단과 민족에 자신을 바친 김철훈 목사! 송원 김광수 목사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순교사]에서 김철훈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 김철훈 목사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말이 없었고 실천이 앞섰으며 항상 성실하게 교인들을 대하였다. 그는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줄곧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신앙이 몸에 배인 분이었다. 김목사는 위대한 애국자였다. 말만의 애국이 아니라 흙 한줌, 돌 한개를 아끼고 사랑한 진정한 애국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학자였다. 언제 찾아도 김목사는 서재에서 손님을 맞았다. 서재는 책이 꽉차 있었다. 김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새벽에는 강대상 밑에 꿇어 엎디어 아침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도하였다. 북한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결사적으로 신앙을 지켜 평양성의 순교제물이 되었다. 김목사는 성경대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갔으며 믿음을 지켰으니 그의 머리에는 의의 면류관이 씌워져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목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교회와 나라 사랑의 길을 걷던 피를 받아 태어났고 또 이것을 보고 익히고 실천하여 희생적 헌신의 길을 걸어간 분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종덕 목사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김목사는 이런 영예의 가문에서 셋째 아들로 1905년 10월 7일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불과 14,5세의 나이에 3.1운동을 맞았고, 아버지 김목사는 교회를 사랑하여 목양하는 한편 나라 사랑의 뜨거운 열이 단장의 기도를 엎드려 빌었고 일어서서 이곳 고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년형을 받고 갖은 옥고를 치루는 동안 김철훈 목사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청소년기를 보낸다.
김목사는 앉아서 맞은 운명적인 이 시련을 그대로 알몸으로 받아들여 고학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 가신 길 아버지 목사의 뒤를 따르기로 굳게 다짐하고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숭실전문학교 철학과를 지망하여 전공을 하는 한편 신앙 인격의 심신을 다지며 나라 사랑의 잔뼈를 굵혔다.
2. 민족복음화에 뜻을 두고 신학공부에 전념
특히 재학시절에는 종교부 활동에 앞장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주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내는 물론 평양시위 주모자로 일제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그것은 그가 시내 각 학교에서 격문을 배포한 사실이 들어남으로 애매한 고난만은 아니었다.
그는 체포되어 그 혹심한 고문에도 한사코 입을 열지 않은 탓에 다른 동지에게 가해지는 고난을 도맡아 짊어졌다. 그리고 용수를 쓰고 감옥으로 향하는 모습은 장하기만 하였다. 그는 나라 사랑만이 아니라 민족 복음화의 뜻이 그 누구보다도 강하였던 바 신학공부의 뜻이 이루어져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서도 줄곧 일경은 그에게서 감사의 눈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학구열과 뜨거운 기도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그가 얼마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가는 학교를 졸업하자 곧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모교였던 숭실학교 교목 청빙을 받아 재직하였던 것만 보아도 능히 알만하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거기에 가만히 앉혀 놓지 않았다. 신원조사에 걸려 겨우 석달을 못넘기고 학교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서 교회 목회길에 올라 용강읍교회를 담임하였으나, 다음 송산교회 또 삼성리교회 등을 목회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이 임지를 자주 바꾸게 된 것은 그 어디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제의 간섭이 오래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이같이 전전하면서 송산교회를 시무하던 1938년 대동경찰서에 검속되어 또 9개월간이나 옥고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 어느날, 경찰서장의 날카로운 직접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며 국가 의식일 수 없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심한 고문에 몇 번이고 기절하자 물을 끼얹어 다시 고문하고 또 고통을 가하여 옷이 피부에 함께 짓이겨지도록 만신창이 되기도 하였다.
3. 반일사상으로 혹심한 옥고를 치룸
이듬해인 1939년에는 소위 농우회사건으로 이번에는 경북 의성 경찰청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함께 구속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1930년대 농촌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농촌연구 모임을 지칭하는 말로 1938년 6월 일경이 유재기 목사를 체포하면서 이를 계기로 반일사상을 지닌 교회지도자를 체포한 사건을 농우회사건이라 하는데 이를 데라우치 총독암살음모사건(105인사건)과 같이 기독교 탄압을 위해 일제에 의해 포착된 사건으로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수난의 한단면이다. 이로부터 몇년 뒤인 1942년 김교신의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다시 8개월의 혹심한 옥고를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감옥을 마치 안방처럼 출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후 꿈에도 그리던 조국은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와 함께 오는가 했다.
1948년 고 주기철 목사가 신앙으로 순절한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또 한층 교회 탄압은 가중되고 공산당의 어용단체인 기독교도연맹 가입이 강요되었다. 그는 오히려 김진수목사를 중심으로 한 이북5도 연합노회 중심인물로 참가하여 열렬히 공산탄압을 향하여 대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무신론자를 공박하는 날카로운 설교를 계속하여 성도들의 바른 신앙무장을 일깨웠다. 저 공산당들이 6.25동란을 일으키기 만 1년전 1949년 6월 25일 저들에게 연행되어 서평양역에서 행방불명된 후 그를 처형한 공산당들 외에는 그를 아는 이 아무도 없다.
한때 김목사는 8.15해방직후에 조만식장로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운동에도 가담하여 조만식 장로의 밀서를 가지고 비밀리에 단신 월남하여 이승만 박사를 만나 연락을 취하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민족복음화와 나라 사랑에 남다른 정열을 쏟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 앞에서 영광스런 최후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