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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가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0:41~21:4)

믿음

by 김경호 진실 2021. 11. 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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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삶 하나님께 드리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4)


김석호 목사(전주서문교회)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려지는 ‘어린 양’으로서 몸소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는, 그래서 우리 죄를 속량하시어 ‘의롭다 칭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둘째,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의로운 자의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모든 율법에 순종하는 ‘의로운 행위의 일’ 곧 거룩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믿음의 목적이요 대상이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량을 전가 받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믿음의 소유격이요 믿음의 본이 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순종으로 이루신 의로움을 전가 받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게 사는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칭의와 성화 둘 다를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우리가 칭의를 받는 믿음의 대상이요, 성화를 이루는 믿음의 본이 됩니다.

이 둘을 간단히 요약하면,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처럼 살자’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신자가 의롭게 사는, 곧 거룩하게 사는 것(성화)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거룩한 자의 믿음의 눈이 어떠한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20장 41~44절의 말씀으로,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구약의 말씀의 뜻을 정확히 영적으로 이해하고 깨닫고 있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한 수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삼하 7:12절과 미 5:2을 통해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씨)’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음을 알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율법과 예언서 모두를 통달했다고 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구약 시편110:1절 말씀을 인용하시어 질문하십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내 주께(אדֹנִ֗י, Κύριος)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등상이 되기까지 너는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했는데, 어찌 다윗이 그의 후손이 되는 그리스도에게 ‘나의 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라고 주님이 물으십니다.

구약을 통달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으로 나와 왕위를 계승하여 이 세상에서 다시 옛 물리적인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2위 하나님 로고스가 이 땅에 다윗의 혈통으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 물리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잘 아는 구약의 말씀으로 물리적인 세계, 곧 인류의 역사와 환경만을 보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인류의 역사와 환경 안에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교훈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림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은 ‘실체’입니다. 믿음의 눈은 바로 실체인 영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을 보면서도 주님처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물리적인 세상을 보면서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20장 45~47절의 말씀으로, 거룩한 자의 믿음의 눈은 이제 현실의 세계에서 진리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물질의 풍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곳에 살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또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기를 받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며,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우리는 다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지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어, 누구에게든지 인정받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잡하고 경쟁이 심한 현대인의 삶에서 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이요 원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46절의 말씀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προσέχω, 그것에서 마음을 돌이키라, 주의 깊게 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7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해할 수도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하게 되고, 인기와 명예가 높아지면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고, 실력과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방해되는 사람을 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해 신원하는 사람들의 탄식을 하나님은 반드시 돌아보사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본질이 ‘죄인’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선을 행하기보다는 죄를 행함으로 남을 해하기에 빠른 존재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주의하여 바라볼 것은 선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지 않는 데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음에도 스스로 ‘인자’라 칭하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구유에서 태어나시면서 이방 땅 갈릴리를 고향으로 두셨으며, 일생을 머리 둘 곳이 없이 나그네처럼 사시면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섬기시면서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와 원리대로 살지 말고, 그 반대로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일생동안 부와 명예와 권력을 쌓으라 하지만, 진리로 사는 길은 그 반대로 쌓여있는 것을 끊임없이 비우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렇다고 수양을 통해서 마음에 쌓이는 탐심이 계속 비워진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결국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길로 사는 자는 세상의 가치와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충만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면서, 세상가치를 비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21장 1~4절의 말씀으로, 의로운 자의 믿음의 눈은 우리 인생의 어느 정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지, 곧 헌신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깨닫게 하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람의 눈은 물질의 양을 보지만, 믿음의 눈은 헌신의 정도를 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은 많은 금액은 보이고,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개의 동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님의 시선에는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동전이 들어왔습니다. 적은 양에 불과한 두 동전의 헌금이 더 눈에 들어 온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정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자신의 인생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 인생의 일부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명까지, 즉 자신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 사람의 믿음과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주님은 정확히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삶의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나머지는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맘대로 행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혹 내가 도저히 못하는 것은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맘대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일조는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지에 대한 척도여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으로 알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명과 인생과 모든 물질과 이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중에 십분의 일을 바쳐 우리의 생명과 인생, 더 나아가 모든 소유가 다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우리의 생명과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울러 이런 헌신의 정도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은 가시적인 직분으로 인해, 앞에서 드러나는 봉사로 인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청소하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여겨진다 해도 믿음의 눈은 항상 그런 사람을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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