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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사고에서 배우는 숨은 비밀

교육

by 김경호 진실 2021. 12. 3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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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사고란 성경 중심적 사고를 말한다. 그리고 성경 중심적 사고란 하나님 중심적 사고를 말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중심적 사고란 무엇인가를 성경 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히브리적 사고는 포장 속의 본질을 중시한다.
 
히브리적 언어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비본질적 포장(그릇) 속에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케내는 작업이지 포장 자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성경은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은 구유가 예수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는 뜻도 되지만, 구유 자체를 신성시 해서는 안된다는 뜻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이지 그릇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이야기, 최초인류의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 뱀의 유혹 이야기, 에덴추방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등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릇(포장)인 것이다. 왜 에덴동산을 만들었는가?의 이유보다는 어떤 목적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사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표현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향해서는 언제나 방법이 아닌 목적을 묻는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온다. 이유를 달아 과학적으로 질문하지 말고 깨달아 알고 믿으려는 목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2. 히브리적 사고는 구체적인 표현을 중시하며 외모보다 인격성을 중시한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시 23:1)라고 표현한다. 또 하나님은 "피난처요, 산성이요, 반석이요, 바위요, 방패요, 요새요 등으로 표현하여 떠돌아다니며 양떼를 지키는 유목민으로서 적과의 전투시에 도와주실 보호자로 표현하고 있다(시 27, 28, 31 등 참고).

구약성경에 보면 사람의 외모를 표현하는 말들이 나온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 39:6, "기스가 아들이 있느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 9:2), "그(다윗)의 빛이 붉고 눈이 빼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홈이 없음이라"(삼하 14:25).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외모보다 내면적 인격을 드려내려는데 목적이 있다. 요셉의 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서 벗어난 것이고, 사울의 미는 왕으로서의 품성이 있었던 것이다.
 
아가서에서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코, 목, 유방을 보라. 코가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의 망대같구나(아 7:4)"라든가,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같고(아 4:4),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아 8:10)" 라는 표현은 순결, 결백, 처녀성과 같은 여인의 성품은 물론 절대로 접근할 수 없고 정복할 수도 없는 망대나 성벽으로 표현하였다. 여인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외모를 찬양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미학은 아름다운 정신화에 있다. 이로서 선과 미는 같은 개념이요 구속사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최고의 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의미를 둔다(시 19:1, 4-5).
 
3. 히브리적 사고는 말이란 하나님의 인격이며 하나님의 실체이다.
 
구약에서 창조기사는 말씀(다바르)이 창조의 매개체가 아니고 야웨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신약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 곧 헬라어 "로고스"는 헬라적 사고인 정신적 기능이요 정신적 사고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화된 "로고스(말씀)" 로 곧 하나님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바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의지와 행위의 양면이 있듯이 "로고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의 실체로서의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생각할 것은 "슈마 이스라엘"이라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들으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를 본받아 실천하라는 강력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신 33:29; 신 10:13).

존 말톤은 "히브리인은 하나님을 사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생활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히브리인은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체험이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참 존재자는 야웨 하나님이시요 말씀 "다바르"인데, 이것은 모든 히브리 적 실제성들, 즉 말, 행위, 사실을 포괄한다. 히브리어의 "다바르"는 단순히 말이라는 뜻을 넘어 행위 존재를 뜻한다. 실제적인 뜻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사고로는 사도요한이 기술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라"(요 1:14)는 신격(야웨 하나님)이신 말씀이 죄없으신 완전한 인격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각인된다. 

4. 히브리적 사고는  말이란 관념에 있지 않고 항상 실제이고 존재이다.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입(입술)과 마음(생각)은 본질상 하나이다. 묵상하다, 깊이 생각하다와, 입으로 중얼거리다를 한단어로(하구트)로 표현하며, 기억하다, 생각하다와 ,선포하다, 언급하다는 말도 한 단어(자카르)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묵상이라는 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을 비우고 하는 내면적 묵상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의 묵상은 불교나 힌두교의 묵상과 같이 “비움”의 묵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야웨의 말씀을 종일 읊조리는 말씀으로 입을  채우는 "채움"의 묵상 개념이다. 
 
같은 관점에서 팔은 능력이다, 분노는 종종 코로 표현된다(시18:8,15 ). 여호와의 상(조각)을 만드는 것이 금기시 돼 있는 그들이 종종 성경에서 "여호와의 손", "여호와의 팔", "여호와의 얼굴" 등을 자주 언급함은,  그것은 우상이 아닌 여호와의 성품대한 표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사50:4)"라는 것도  히브리인에게 학자의 요소는 내면(지식, IQ, 두뇌)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학자의 행동(혀)이다 학자의 말씅에 따른 행동 능력이 보이는 표현으로 그대로 옮겨지는 것이다.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사50:5)" 에서도 그들에겐 귀를 여는 것이 곧 거역치 아니 하는 것이고 순종이다. 귀와 순종적 행동의 일치성이다.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에서도 그들에겐 수치가 내면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얼굴(외면)로 옴으로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함으로 수치를 막는다고 하였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에서도  그들의 말은 곧 실제요 행위와 같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히브리인의 신앙은 관념에 있지 않고 항상 실제였고 행동으로 존재였던 것이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배우는 숨은 비밀:리폼드뉴스 (reforme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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