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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과 부활절,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롬 8:24~25)

부활

by 김경호 진실 2022. 4. 1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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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강송중 목사(서울남교회)
2022년의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는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모든 영역에서 성육신 하신 인간의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께서 누구를 위하여, 누구 때문에 이런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는지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능력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고난주간을 결코 무심하게 지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 이것이 고난주간의 의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역사학자인 마르틴 행겔(Margin Gengel, 1926~2009)이 쓴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에서, 그는 고대 로마사회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의 십자가 처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당시 역사적인 일차 사료들을 기반으로 자세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이렇게 세 단어로 요약합니다. ‘극도로 처참한 십자가 죽음.’ 십자가 처형이 더이상 처참할 수 없는 가장 극심한 고통임을 단 세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코로나19의 긴 터널에서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방역당국의 2022년 4월 17일까지 유효한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지침도 어쩌면 마지막 방역조치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기도 합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마스크 착용을 실내에서만 하게 되고, 모든 시민들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일상회복의 소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 목사님의 책에서 2014년 오엠 국제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둘로스호가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의 한 사건을 기록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극단적인 이슬람 청년이 둘로스호에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스웨덴에서 파송된 소피아라는 20대 전후 젊은 자매와 뉴질랜드에서 온 카렌이라는 비슷한 연령의 자매가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선교회는 즉시 사망한 두 사람의 부모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들은 선교회로 전보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대해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목사님은 아마 그 전보를 직접 본 것 같았습니다.

자녀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이 있을까요? 그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용기와 위로와 소망의 글을 보낼 수 있었을까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딸을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주님의 곁으로 보내고도 저토록 견고하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권면할 수가 있었을까요?

한 찬송가를 소개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가 488장)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요?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어떤 것일까요?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2)보이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3)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리둥절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본문에서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주석가는 이 문장을 세 가지 의미로 주해하고 있습니다. 1)소망이 수단인가?(By Hope) 2)소망이 상태인가?(In Hope) 3)소망이 목적인가?(For Hope)

여기서 사도바울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소망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여건 속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그들을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꽃다운 나이의 자녀들이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 곁으로 먼저 가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죽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슬픔 중에서도 가장 큰 슬픔입니다. 저는 호상(好喪)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장수해도, 아무리 건강하게 오래 살았어도, 아무리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어도, 이별은 한없이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례는 가슴 아픈 슬픈 이별의 장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 가운데서도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록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소망 가운데서 소망을 바라보며 그 슬픔을 이겨내라는 사도바울의 따뜻한 권면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보이는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주에는 한 장례식장을 방문했는데, 약 15개 빈소의 대다수 사망자가 70~90대 연령인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때가 주님을 만날 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시편기자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시 90:10)라고 한 것이 문자적으로 인생의 길이를 칠십이나 팔십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설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현실이지만, 또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이는 것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 영원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남미 에콰도르에 거주하고 있는 식인부족으로 알려진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시카고의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도양양한 앞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생명 바쳐 헌신한 그의 믿음은 훗날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장의 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문장의 방점은 참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음으로 기다림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말하지만, 억지로 수동적으로 마지못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기쁨 가운데서 감사함으로 기다리고 있는 매우 능동적인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시편에 기록된 파숫꾼의 아침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시 130:6) 파수꾼이 반드시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는 확신 속에서의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비록 현실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아침이 밝아옴을 아는 것처럼 참 소망의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서 참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의 선진들도 이러한 믿음 속에서 소망하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의 의미를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의 진리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실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지요?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찬송가 488장)

2022년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부활 소망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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