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면서 성도들에게 신사참배 및 일본국기배례, 일본 일왕 사진배례,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강요하여 우상을 섬기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지금도 일본에 가보면 교회보다는 곳곳에 신사가 더 많이 세워져 일반국민들이 참배를 드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일본 성경에 하나님을 가미사마(神樣)로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는 가미사마하면 야오르즈노가미 (八百萬神)라고 800만의 신을 상징하는 다신교의 나라이다. 특히 이런 신앙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일본인들이 일제시대 우리에게 전국적으로 강요한 신사참배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주목사를 비롯하여 50여명이 순교를 하였으며 5000 여명이 투옥되어 한국교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동안 주기철. 손양원. 이기풍, 최봉석, 서덕명, 최상림, 주남선, 등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순교역사는 잘 알려지고 기념관도 세워져 있지만 평신도로서 신사참배 운동을 하다가 순교를 한 박관준장로에 대하여는 모르는 분들이 많다.
나는 일본에 가기 전에 부천에서 박영창목사를 만나 뵙고 부친의 순교이야기를 다시 듣고 일본으로 떠났다. 박관준장로가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던 일본국회의 건물은 일본제국의 국력과 국위를 세계에 과시하려고 18년간의 장시간에 걸쳐 지은 흰색의 5층 건물인데, 개방시간에 맞추어 가면 국회를 개방하므로 볼 수가 있다.
국회내부는 37종의 일본과 한국산의 대리석과 산호석등으로 호화롭게 장식을 하였고, 1만5천평의 건물을 짓는데는 총인원이 254만명이 동원된 건축물이다.
마침 내가 국회를 찾은 날에 국회가 열려서 일본 군대의 해외 파병안을 둘러싸고 회의을 하던 날이라 경비가 삼엄하였다. 2차 대전 말기에 미국의 원자탄을 맞아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히로히또 일왕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선언을 한지 50여년 만에 일본은 경제, 군사대국이 되어 외국에 군대를 파병하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통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거의 조상들의 죄악상을 가리우려고 하지만 해방 후에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일반시민들의 반대로 그 교과서가 거의 채택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박관준장로는 1875년 4월13일에 평안북도 영변의 성안에서 당시로는 굉장한 부자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당시의 청일전쟁과 일제침략의 소용돌이에서 집안이 망하고 1905년에 유교와 불교에 집착하였던 과거를 버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니 서른살의 나이였다.
이때는 일제가 조선을 1910년에 강점을 한 민족의 시련의 시기인데 오히려 길선주목사가 인도하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의 부흥회가 출발이 되어 예수 믿는 백성들이 국내와 만주, 시베리아일대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1910년에 한국교회의 성도의 수가 17만8천명이나 되었는데 1866년 9월3일에 대동강에서 첫 순교를 한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민중들은 일제의 간악한 압제에서 독립을 얻는 길은 서양에서 전해준 기독교가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여 그동안 섬기던 유교, 불교, 동학을 버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단결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912년 서울에 와서 3년 간 의학공부를 하고서 사이또(?藤)총독으로부터 개업의사의 면허를 받았다. 그 후에 평안도의 개천읍교회의 장로로, 또한 직업은 의사로 영변에서 제중의원을 개업하였다.
1937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들이 신사참배 불 참석으로 인하여 폐교의 위기에 있게 되자 박관준장로는 합법적인 투쟁을 하기로 하고 장문의 진정서를 니시모도 평남지사와 우가끼(宇垣)총독에게 보냈다.
그리고 신사참배의 문제를 직접 총독과 만나서 권고하려고 13번이나 총독부를 방문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 특히 박장로가 우까기(宇垣) 총독이나 미나미(南)총독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성경에 기록된 데로 흉년 같은 저주가 임한다는 경고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이런 일을 하는 중에도 박관준장로는 늘 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한 분은 당시의 철종의 사위이며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말년을 어렵게 보내던 박영효를 만나서 전도를 하자 박영효는“나는 예수를 믿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 뿐 아니라 우리 동포가 다 같이 예수께로 귀의을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만든 인촌 김성수와 춘원 이광수에게 예수님을 강하게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인촌은 자신이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으며 춘원은 과거에 기독교를 거쳤지만 지금은 해탈을 위하여 불교를 연구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춘원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신문의 주필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귀국하여 언론계에서 활약을 하며 민족정기를 고취하면서 사상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였지만 말년에 친일에 가담한 경력을 보여주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결국 박장로는 이와 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서 고위층들에게 직접 항의를 하기로 하고 보성여고 음악교사를 그만 둔 안이숙 선생의 안내를 받아 일본 동경에 건너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외아들 박영창군과 같이 일본의 정 관계인사를 두루 만나서 협조를 요청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박장로 일행은 1939년 3월24일 오후1시경 마침 일본제국의회에 들어가서 2층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신종교법안이 심의가 될 때에 1시48분 경에, 성명서 뭉치를 의장석에 던지며 일본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자 국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임검하고 있던 경관에게 세 명 모두 체포되었다.
박관준장로는 대를 이을 외아들인 박영창목사를 같이 거사에 참여를 시켰고 박영창목사는 부친의 말에 순종을 하여 이삭과 같은 믿음을 보였다. 다행히도 일제는 아들인 박영창목사는 석방을 하고 박관준장로는 평양으로 압송을 하여 오랜 세월 감옥에 투옥을 시켰다.
박장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6년 간 옥고를 치루다가 1945년 1월1일부터 40여일 간 금식기도를 하여 결국 빈사상태에 빠져서 평양의 기독병원으로 후송되어 3월13일에 순교를 하셨다.
1945년 8월에 해방을 예언하며 기뻐하셨지만 해방을 5개월 앞두고 순교를 하셨으며, 금식 40일 동안 비몽사몽간에 천사들이 박장로의 입에 향기로운 과일들을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오고 있다.
박장로는 감옥에서 기독병원으로 나와 5일이 되는 아침에“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은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런 하늘 나라에서 만납시다”그리고 낮은 음성으로“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부르며 고요히 숨을 거두니 향년70세 이며 1945년 3월13일 오전 10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