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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일상(3): 부서져야 아름다운 것이 있다

사랑

by 김경호 진실 2022. 7. 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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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의 기준: 균형, 대칭, 비율

에스겔 40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회복된 성읍,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의 규격과 비율, 그리고 대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상징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오직 설계에 대해서 보여주십니다. 대체 설계와 규격이 뭐가 그리 중요하길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설계를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그 설계가 아주 정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5-7절을 살펴보십시오. 그 담의 두께와 높이가 한 장대입니다. 그리고 문의 통로와 문 안쪽의 통로도 한 장대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8절에서 안쪽 문의 현관 역시 한 장대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동문의 방인 왼쪽에 세 개, 오른쪽에도 세 개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방의 개수 뿐 아니라 크기도 같으며, 좌우편의 벽 크기마저 일치합니다. 이와 동일하게 40장 이후에 계속하여 묘사되는 예루살렘은 완벽한 비율과 대칭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완전함을 추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다시 임재하셔서 통치하실 예루살렘은 균형과 온전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에 정형화 된 틀과 규격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율법은 이러한 틀과 규격에 의해 빚어진 거룩의 모양은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레위기 21장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례로써, 율법이 규정하는 거룩에 대한 규격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제사장은 혼인에 대한 규례,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말아야 할 규례, 성에 대한 규례, 질병에 대한 규례, 신체적 무결함에 대한 규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진술합니다. 이러한 제사장에 대한 규례는 완전함, 무결함, 순전함이 거룩의 조건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에스겔의 환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정확한 균형과 대칭, 완벽한 비율을 거룩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과 묘하게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과 제사장에 대한 규례는 규격화된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삶만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신비를 품고 사는 삶의 양태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규격화 된 거룩의 기준은 모두를 숨막히게 합니다. 나약함과 연약함, 불균형과 비대칭, 순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보면서 좌절하게 됩니다. 거룩이 요구하는 기준 앞에서 나의 모습과 삶의 양태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품고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바울의 미학: 모양이 없는 거룩

우리는 반면에 바울에게서 날카로운 대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인 거룩한 장소는 이제 우리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 때문이죠.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다양한 인간들 군상 속에서 머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인간들의 군상만큼이나 거룩의 모양은 다양해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삶의 모양과 외모를 따지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이들 모두에게 거하심으로, 신앙 고백에 머무는 모두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정형화 된 틀과 기준으로 거룩을 측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에스겔의 환상에서 발견한 정확한 균형과 대칭, 비율은 거룩을 표현할 수 없는 양식이 되어버린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거룩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내 삶과 모습 때문에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성령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이라는 거룩한 신비로운 장소가 되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이라는 정해진 모양을 해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준에 미달하지 못하는 막 생겨먹은 내 삶조차 하나님 안에서 따스하게 받아들여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규격과 틀에 맞춰서 거룩하게 만들어 가라는 요구 앞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꼭 성령님의 음성 같이 들립니다. “꼭 그렇게 생기지 않아도 된다고, 모두가 그 기준에 맞춰서 살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너의 삶의 정황과 타고난 모습이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너에게 와서 거한다고, 그렇게 너를 성전으로 만들었다고, 그러니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의 현재로 인하여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네 안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자리만 마련하면 된다고” 말씀 하시는 성령 하나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들어 오셔서 비루한 삶의 모습조차,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조차, 소망이 없는 미래조차 신비를 품고 있는 거룩한 것이라고, 하나님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성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의 음성이 여러분에 귀에도 지금 들리고 있는지요? 

 




미학적 담론: 형식주의와 깨어짐의 미학

이 지점에서 저는 미학적 담론을 아주 쉽게 정리해서 여러분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을 통해서도 따스한 위로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아름다움이란 완전함, 조화로움, 명료함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러한 미의 기준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더 명료하게 정리 됩니다. 아퀴나스는 미의 기준을 integratis, consonatia , claritas로 정리합니다. Integratis는 온전함과 완벽함을, consonatia는 완벽한 비율과 조화로움을, claritas는 명료함을 의미합니다. 즉, 아름다움이란 온전하고 완벽함을 갖춘 것이어야 하며, 조화로움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이며, 누가 봐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미학을 형식주의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대칭과 완벽한 비율로 구성된 조화로움과 명료함은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형식에 의해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담론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여러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정치학자 에드먼드 버크 경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는 미의 기준을 뒤집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불균형 속에서도, 부조화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미학적 관점은 버크 경이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불평등과 불균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반면에 진보주의는 불평등과 불균형을 해소해야 할 잘못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은 부조화와 불균형은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버크 경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수학적, 논리적 형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불균형과 부조화는 수학적 완전함과 논리적 정합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현 교황의 전임자였던 베네딕토 16세, 속세명으로 조셉 라칭거는 아름다움을 수학적 공식과 논리적 형식 밖에 벗어난 신비로움이라 명명합니다. 

동양에서는 불균형과 부조화의 미학은 이미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12세기의 일본의 와비사비라는 미술 양식은 불완전함, 불균형, 연약함을 아름다움으로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킨 쿠지로라는 미술 경향은 깨어진 부분을 의도적으로 부각합니다. 깨어진 부분에 은과 금을 색칠하여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죠. 아름다움을 깨어짐에서 찾는 것입니다. 조화로움을 파괴하는 깨어진 부분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기에, 부조화와 불균형은 더 이상 감추어야 하고 고쳐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미학적 담론에서 아름다움이란 형식주의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온전함 대신에 깨어짐과 연약함 속에서, 완벽한 비율 대신에 비대칭으로 비뚤어진 것에서, 완벽한 것 대신에 불완전한 것 속에서, 명료한 것 대신에 불명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진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눈에 보기에 부서지고 나약하기 그지 않는 나의 모습과 시간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며, 삶의 파도가 훑고 지나가 비뚤어지고 불완전한 당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온전하고 깔끔한 삶의 정돈된 모습보다 인생이 긁고 지나간 당신의 몸과 마음에 남겨진 상처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저는 이러한 진리가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집니다. “나는 라합이라고 불리었던 비참한 매춘부의 삶에서 거룩한 승리를 보았노라고. 베드로라고 불리우던 형편없는 다혈질이었던 어부에게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아름다운 비전을 보았노라고. 망신창이가 된 예수의 육체 가운데에서 구원의 은혜라는 신비로운 능력을 보았노라고. 그리고 나는 너의 삶 속에서도 나의 임재를 보고 있노라고. 너의 유창하지 못한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 가운데서 거룩함을 느꼈노라고. 너의 연약한 육신 속에서 나의 영광을 보고 있노라고. 숨기고 잊어 버리고 싶었던 너의 아픈 과거와 현재 속에서 나의 거룩한 계획이 이루어져 감을 보고 있노라고. 너의 부서져 버린 심령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보고 있노라고. 그러하기에 너의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를만한 것이라고.” 

 




부서진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 안에 부서지고 연약한 부분들을 고쳐 주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들을 안고 살아가게 하시고, 그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고 절절히 그 아픔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대신에 그가 우리 안에 머무심으로 내 안에 가득한 나약함과 추함, 상처와 눈물, 형편 없는 모습마저 아름답다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의 기준과 규격에 비추어 볼 때 비루한 삶도 수용하고 지속할 의미를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삶을 아름답다고, 거룩하다고 선포할 용기를 주십니다. 그렇게 부서진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연약함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은혜를 발견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권면 드립니다. 부서진 당신의 삶을 바라보며 원망할 누군가를 찾는 대신에, 당신과 당신의 가족의 삶 속에서 무너진 부분의 원인을 찾으려 하는 대신에, 그저 그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십시오. 생겨먹은 그대로, 그 삶의 여정이 남겨놓은 상흔을 그대로 안고 고단한 인생의 여정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삶을 아름답다 하십시오. 당신의 얼룩진 부분을 거룩하다 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살아 갈만 한 것이라고 선포하십시오.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당신의 삶을 판단하고 측량하는 규격화 되고, 정형화 된 세상의 기준을 모두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거룩에도 아름다움에도 어떤 모양도 없다 하십니다. 그렇게 세상의 규격과 기준에 맞지 않는 당신을 추하다고, 넌더리 나는 인생이라고 측량하는 목소리를 침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인생이라는 파도가 쉴새 없이 몰아쳐서 우리를 부수어 놓는다는 것을요. 끊임없이 세상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비대칭적이고, 균형이 잡히지 못한 삶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조화를 흐트려 놓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온전한 부분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성난 파도의 모습으로 우리를 잡아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현재를 아름다운 것 하나 없는 흉측한 것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나약함과 절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려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주홍글씨와 같은 과거를 끊임없이 들추어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과거와 현재가 아름답지 못하기에, 당신의 미래에도 빛이 없을 것이라 세상은 큰 목소리로 당신 내면에 크게 외칠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파도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수어 버리지요. 그래서 다양한 모습으로 부서진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온전한 이는 없습니다. 그저 남이 모르게 숨기고 살아갈 뿐, 모두는 각각의 무너진 부분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 거룩하게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내 안에서 결코 소멸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폐할 수 없기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당신이 여전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상처 입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을 그래도 살아가야 함은, 여전히 당신을 아름답다 하시는, 계속해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께서 당신 안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소멸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당신 안에, 당신 곁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서진 것도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때때로 세상이 내세우는 틀과 규격에 맞지 않는 너는 부족하다고, 형편 없다고, 아름다운 것 하나 없는 추함으로 가득 찼다고 손가락질 하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상처 입은 고통이 너무 지독해서, 망가져 버린 부분이 너무 커보여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두신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지고 짓밟힌 내 삶도, 자존심도 긍지도 남지 않은 내 현재 모습도, 그렇게 거칠게 살아오느라 너덜너덜 해졌다 해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하여 육체도 심령도 상할 대로 상해 버려 당장이라도 포기해버리고 싶은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의 일부라는 것을 고요하게 묵상할 때에 여러분 안에 내적 고요함과 평안함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산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깊은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며, 자연이 그 푸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비를 맞는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를 맞는 날도 골짜기의 깊은 어두움 조차도 그의 탁월한 예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깊고 어두운 골짜기 가운데 있는 내 영혼도, 비를 맞고 지나가는 지금의 나도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임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골짜기 속에서도, 비를 맞는 날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클래식 음악의 조예가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의 가치를 말이죠. 그는 불협화음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조화로운 화음만으로 긴 호흡의 음악을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불협화음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그렇게 긴 호흡의 음악이 지루해지거나 늘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는 음악이 더 아름답게 들리기 위해서는 불협화음을 필요함을 깨달았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긴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조화 속에서 아름다움만 가득한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한 평화는 지루함이며, 무료함일 뿐이죠. 때로는 불협화음이 일어나 내 삶에 골짜기와 봉우리를 반복해서 만들며, 비 오는 날고 맑은 날을 어우러지게 하면서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순간조차 내 삶과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삶을 아름답게 하신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여전히 아름답다 하셨노라. 너는 그의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천상의 음악을 말입니다.



결론: 부서진 것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하지마라!

글을 맺겠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더 이상 규격화 될 수도, 정해진 모습으로 정형화 될 수도 없음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대신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다양한 인간의 군상 모두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서진 삶도 살아갈 이유가 있음을, 여전히 내 연약한 삶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권면 드립니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말과 생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가벼운 삶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 삶은 당신의 입술에 담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삶 가운데 성령께서 거하시며 그 삶을 아름답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부셔졌을 때야 말로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비라고 불리우는 것은 성육신입니다. 인간의 육신 가운데 오셔서 인간적인 나약함과 고통, 두려움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나사렛의 한 목수의 삶에 머무시는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극한의 십자가의 고통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사랑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지겹도록 배웠습니다. 그의 죽음과 비참함, 고통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거룩한 은혜가 흘러나온다는 것을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처절하게 부셔졌을 때,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비참하게 부서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면서 불신자 조차도 예수의 삶을 아름답다고 인정합니다. 교회는 싫어하고 기독교는 싫어하나, 예수까지 조롱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한 목수의 삶,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참하게 부서져버린 그의 삶 속에서 그들도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부서진 부분은 그를 아름답게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그의 아픔은 거룩과 신비가 세상을 따스하게 감싸는 능력이었습니다. 그의 나약함은 그 안에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드러나게 하는 통로였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비로소 부셔져야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육 간에 부서진 타인의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는 부서짐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향기이며,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니 그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입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한 침묵 가운데, 그 예술 작품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은은히 드러낼 때까지 계속해서 감상하고 음미하며, 지켜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인 그들의 삶을 침묵 가운데 그저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조각들을 음미하십시오. 그 때에 그들의 나약해 보이는 삶이 하나님의 거룩과 신비로움이 여러분의 내면과 육신의 눈과 귀에 은은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부서지고 추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삶이 아름답고도 거룩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나의 품에 안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일게 될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부서진 이를 따스하게 맞아주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 가운데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공동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치유의 능력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저는 이러한 기적이 우리 가운데에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에 대하여 섣불리 성경 말씀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입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묵묵히 지켜 봐주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성숙한 예술가가 되십시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서로의 나약함 속에서 거룩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예술가가 될 때에, 비로소 서로를 아름답게 찬양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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