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함께하심 믿고 기도로 소통하며 사명 향해 나아갑시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명절은 ‘축제의 절기’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독의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절기에 죽음을 맞는 많은 사람들의 병명은 ‘고독사’입니다. ‘고독사’란 홀로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 그 시신조차 3일 이상 방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런 고독사는 노인층뿐 아니라 젊은 계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 시대에 우리가 겪어 내야 하는 실존적 고독의 명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독을 예수님도 경험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스타로 계셨을 때 그 분의 주변에는 언제나 따르는 무리들이 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예수님에 대한 당시 사회의 감시망이 작동하고 박해가 시작되자 제자들조차도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느끼신 감정도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고독에 대한 성찰은 아무도 내 삶을 나 대신 살아줄 이가 없다는 자기 대면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의 고독입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 고독을 극복하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함께하심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인간 모두의 심리적인 본능의 근저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꼭 고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죽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그 순간, 고통은 우리를 떠나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모든 것이 내게서 떠나갑니다. 내가 사랑했던 남편, 내가 사랑했던 아내, 내가 사랑했던 내 아들과 내 딸, 정들었던 이웃의 얼굴들, 그들 모두가 다 내 곁을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죽음 앞에서 이 죽음을 똑바로 대면하자마자 배우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내가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죽음은 대신 죽어줄 수 없습니다. 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교훈을 깨닫자마자 동시에 “삶도 나 혼자 사는 것이지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헤어짐의 순간 누가 우리와 함께하겠습니까?
여기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이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시편 23편 1절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시편 기자의 고백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를 지날 때, 그 죽음의 외로운 다리를 건널 때, 그 때에도 나와 함께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뿐만 아니라 오늘이라는 이 삶의 들판에서도, 오늘이라는 이 삶의 파도와 오늘이라는 삶의 현장에서도 그분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벅찬 사실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고독했던 생애 한 절정에서 주께서 토해 내셨던 이 고백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이제 그 곁에는 더 이상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고, 그분의 가슴을 위로하는 제자들도 없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떠나간 이 고독한 들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 고백이 가능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 고백이야말로 고독을 극복하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심으로 고독을 극복하십니다.
17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그분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고 계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주 “무리를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가시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피하십니다. 그분은 홀로 계십니다. 그분은 혼자서 무엇을 하십니까? 아버지와 대화하십니다. 홀로 있는 한적한 시간마다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경건의 시간’ 또는 ‘묵상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불교적 명상과는 대단히 다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비워 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음을 비워 놓으면 우리의 마음에 잡생각이 들어오고 온갖 귀신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런 차원의 묵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이 ‘묵상’이라는 말의 뜻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나오는 ‘묵상’이란 말이 ‘고요한 묵상’이 아니라 히브리어 ‘하가’란 말은 ‘있는 그대로 소리를 지르는 묵상’입니다. ‘굶주린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먹이를 앞에 두고 포효하듯 소리치는 그 소리침’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조용한 자기 은폐나 자기 은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입니다. 내가 참으로 묵상할 때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내 속에 있던 분노과 슬픔, 한, 눈물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 나는 원통했습니다. 나는 속았습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나는 넘어졌습니다.” 이렇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의 정직한 자기 토로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앞에 다 토로하는 순간 아버지가 나를 치료하십니다. 아버지가 내게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로하십니다. 아버지가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삶에 대한 새로운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주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축복이 내 마음 속에 담기기 시작합니다. 전 세계 교인들 가운데 한국 교인들만이 개발한 독특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통성기도입니다. 무리들이 모여 소리 지르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가 안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쏟아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 앞에 부르짖어 소리쳐 보십시오. 부르짖을 때 내게 찾아와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 그래서 저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여러분은 이 아버지와의 대화의 비밀을 아십니까? 이 기도의 비밀이 고독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셋째로,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심, 사명을 감당하심으로 고독을 극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제 이 기도가 끝났습니다.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18장 1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온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골고다의 언덕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하십니다. 기도가 끝났습니다. 아버지와 대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일에 몰두 하십니까? 고독에 대한 최대의 치유 방법 중에 하나는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바쁨은 불신자의 바쁨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목적이 없이 바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바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 ‘너는 그 일을 하고 죽어야 해’ 하신 그 일에 바쁜 것입니다. 동기가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한 바쁨, 이 바쁨을 위해서 지금 나를 불사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자주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기도를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구속의 제물이 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그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최후에 외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그분의 삶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목적의식이 확고한 사람은 고독할 겨를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목적이 분명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인생길에서 얼마나 많은 고독이 있습니까? 이 모든 길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주신 사명!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을 분명히 확인하고, 그 길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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