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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초월성과 신비

이경섭목사(인천)

by 김경호 진실 2023. 9. 2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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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미련한가

성경은 ‘복음’이 ‘멸망당할 자들에겐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고 했다. 그럼 그들이 생각하듯, 정말 ‘복음’이 미련한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복음’이 ‘구원 얻을 자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따라서 이 말은 ‘복음’ 자체가 미련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그것이 미련하게 보일뿐이다’는 뜻이다. 구원 얻을 자들에겐 오히려 그것이 찬탄할 ‘능력이고 지혜’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럼 그들에게 ‘복음’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그들에게 그것을 해독(解讀)할 만한 ‘어문력(語文力)’이나 ‘세상적 지혜’가 부족한 때문일까? 그리고 ‘복음’이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이들은 왜일까? 그들이 ‘남다른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진 때문인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로 말씀한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19-26).”

‘복음이 미련하게 보임’은 ‘복음의 미련함(the foolishness of the gospel)’ 때문도, ‘복음’을 해독하는 사람의 ‘어문력 결핍’ 때문도 아니다. ‘복음의 해독력(解讀力)’은 그의 ‘어문력’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이며, 이러한 ‘복음의 초월성’이 ‘인간 지혜’를 헛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복음’은 ‘초보 지식’인가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신앙의 초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율법주의 신앙’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복음’은 기독교 입문시에나 가질 법하고, 신앙의 연조가 쌓인 후엔 ‘행위(율법)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렇게 ‘복음’을 가르쳐야 할 대상을 ‘입문자(入門者)’로 한정시킨 이유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어려운 ‘행위(율법) 신앙’을 말하면 전도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엔 어필하기 쉬운 ‘복음’으로 접근했다가 신앙의 연조가 쌓인 후 ‘행위신앙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논거에서 ‘신앙의 이중 잣대’를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주장의 근거를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히 6:1)”,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히 5:12, 14)”라는 말씀들에서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신앙’을 ‘복음 신앙’으로 해석하며, 장성하여 그런 ‘초보적인 복음 신앙’에서 탈피해 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율법’을 ‘초등학문’으로 ‘복음’을 ‘비의(秘意)한 고등 지식’으로 규정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율법)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 4:3, 9).”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3, 26).”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 2:7).”

성경이 ‘율법’을 ‘초등학문’이라 함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새겨진 율법(롬 2:15)’에 의해 누가 그것(율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곧잘 수납되고 공감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양심의 율법’에 기초한 율법종교이다). 이에 반해 ‘복음’은 자연인의 양심이나 지성과는 조화되지 않는 ‘초월적인 것’이다.

루터가 ‘복음은 죄인에게(심지어 구원얻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낯설며,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매일 들어야 한다’고 한 것은 인간 본성에 부합되지 않은 복음의 ‘비의성’과 ‘초월성’을 말한 것이다.

‘복음’을 기독교 입문시에 섭렵하는 ‘초보 지식’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복음의 비의성’을 모른 채 그것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해한 때문이다. 이 ‘복음의 비의성’을 성경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는 말로 표현했다.

따라서 그들이 ‘복음은 입문자(beginner, 入門者)의 것’이고, ‘율법은 고단자(高段者)의 것’이라는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난센스다. 오히려 거꾸로 이다. ‘율법’이 입문자의 것이고 ‘복음’이 고단자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율법은 자연인(the natural)과 입문자(beginner)에게 적합하고 그들에게 더 잘 수납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복음’은 벗겨도 벗겨도 여전히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양파’처럼 그 ‘비의성’이 자연인의 지성적 접근을 허용치 않으며, ‘구원받은 성도’까지도 평생 탐구하고 진력하길 요청한다.

◈성령으로만 알려지는 ‘복음’

‘복음’만큼 인간의 지혜를 헛되게 하는 것도 없다. 머리 좋은 세상의 지성인들을 다 어리석은 자들로 만든다. 이는 그들의 그 좋은 머리로도 ‘복음’을 이해하질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6, 8).”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또 ‘복음’은 사람의 ‘심오한 종교성’과도 무관하다. 유대인들은 유구한 종교 전통과 역사를 가진 종교천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주는 선지자를 가졌고, 율법과 제사에 통달했고, 스스로를 ‘하나님 지식의 독점자’로 자부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했고,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눅 24:20).

‘복음’은 ‘철학의 심오함’과도 무관하다. 철학의 본산인 아덴(Athens)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오한 철학으로도 ‘복음의 비밀’을 발견하질 못했다. 그들은 “범사에 종교성(철학적 종교성, A philosophical religiosity)이 많은 사람들(행 17:22)”이었지만 복음을 몰라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에게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에도 문외한이고 세상적인 지혜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15)”라며 그를 칭송했다. 예수님은 그러한 어린이들의 칭송을 염두에 두고,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며, 복음이 세상의 지혜와 무관함을 천명했다.

또 그는 ‘복음을 아는 것’을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됐다(눅 8:10)”로 표현하며, 복음이 ‘인간의 문해력’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the revelation of God)’로만 됨을 말하셨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을 자연인의 마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감춰진 비의(秘意)’이며,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성령으로만 알려진다고 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7-10).”

이렇게 ‘성령’으로만 알려지는 ‘복음’은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고(고전 1:27)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비하게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이경섭 칼럼] 복음의 초월성과 신비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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