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교통이 이뤄진다.
성만찬에서는 성도가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주시는 혜택들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성령이 연합을 이루는 끈(bond)이 되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뤄지게 되는데, 어떻게 성도들 각자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는 것이며, 우리가 성만찬에서 말씀의 약속과 함께 임재하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만찬에서 성도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있고, 아무 곳에나 편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그의 몸과 피를 통해서 발생하는 모든 효력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짊어지심을 통해서 성취하고 확보한 모든 것들에 참여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그 방식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해서이다.
칼빈은 우리가 성례를 받는 것은 믿음으로 “교통한다”(communion)는 의미라고 여러 차례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은 믿음으로 이뤄진다. 믿음이라는 교통의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이 믿음은 인격적인 신뢰를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관련된 모든 실행과 활동은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믿음은 인격적인 신뢰(fiducia)이다. 믿음의 중요한 행위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이고, 믿음의 확신은 이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이다(롬 8:38). 존 머레이 교수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믿음의 핵심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한다는 것이 신뢰의 특성이다. 이러한 구원하는 힘과 능력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 믿음 자체에 있지 않고, 전능하신 주님에게 있다.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 속에 극소량이라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행되어지는 과정은 그리스도와 “사귐”을 통해서다. 이것이 칼빈의 성만찬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관련된 모든 실행과 활동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성만찬에서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으며, 성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 신약성경에는 헬라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사용되었는데, 라틴어로는 “코뮤니오”(communio)라고 번역되었고, “교통” “교제” “결합”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명사로 43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교제” “사귐”(fellowship)는 의미로는 12회 사용되었고, “다같이 나누다”(sharing in common)는 용도로는 3회, “교류”(communion) 혹은 “참여함”(joint participation)이라는 의미로는 각각 두 차례 사용되었으며, 그 밖에도 형용사, 동사 형으로도 사용되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며,” 혹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알려주는 신약성경의 중요한 사례를 살펴보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 1:4)고 하였다. 여기에 “코이노니아”가 사용되었는데, “참여함”(participation)을 의미한다.
또한 요한 사도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사귐”(fellowship)을 의미한다.
성례를 통해서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선물은 믿음(인격적 신뢰)을 통해서 성도들과 교통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이런 교통(연합)에 참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저주에 이르게 된다. 성례의 유효성에 대한 논의에서, 그리스도의 총체적 인격들과 사역을 통해서 이룩하신 것들을 믿음(인격적인 신뢰)을 통해서 성도들과 교통하신다. 칼빈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느냐에 대한 답변으로서, 믿음에 (인격적 신뢰)에 의해서 “교통”이라는 “방식”(ratio, modus)이라고 설명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역사에 놀라게 된다.
칼빈은 성령의 교통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들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함에 대해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눅 1:34).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알 수 없지만, 그 오묘하심에 대해서 놀라워하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처럼, 성례들이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통을 이루도록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는 총제적인 그리스도의 성품과 교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6장은 칼빈이 구원에 이르는 연합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가버나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육신적인 연합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연합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이르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 (요 6:54-56). 칼빈은 예수님의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인 용어들은 믿음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방식이라고 풀이했다 (요 6:29, 35, 40, 47, 69). 동시에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예수님의 몸을 연결해서 설명한 것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칼빈은 해석했다. 먹는다는 것은 믿음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의 중단 없는 교통”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 자체라기 보다는 믿음의 결과이자 열매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지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꼭 붙잡아서, 그가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의 몸에 연합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해서, 그와 하나가 된다 (요 17:21).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면,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옳다.”
칼빈은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성만찬에 해당하는 구절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성만찬에서 형태적으로 제시되고, 믿는 자들에게 실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고만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아마도 성만찬에 대해서 확정하시고 인치시려는 의도로 이런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닌가 본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6장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은 아니지만, 성만찬은 요한복음 6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과 보이는 보증(pledge) 사이의 동등한 중요성과 분리될 수 없는 연결성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성례들 속에서도 의미하는 바를 전달함으로써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례들은 그 존재하는 것 자체만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제시하는 것의 개념적 이론들과 형이상학으로는 구원역사의 집행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하여 작동이 일어나듯이, 성례도 역시 실행적인 외적 수단들이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그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지속적으로 먹여주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선하심을 제시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양식의 작용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시인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맛보며 감격한다”는 칼빈의 고백에 동조한다. 칼빈이 신론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불가이해성“(incomprehensibility)이다. 개혁신학자들은 초월적인 영역에 속한 신비로움을 인간의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성과 과학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를 억지로 풀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불가이해성”에 관한 교리는 여기 성찬론에서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을 꿰뚫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아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불가지론”(agnosticism)으로 오해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위대한 신비를 말로 옮겨놓을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으로는
충분히 깨닫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의 미약한 표현 능력을 척도로 하여 그 신비의 숭고함을 가늠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나는 기끼이 인정한다.
나는 이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모든 내용을 다 말하려고 애쓰지만, 나중에 보면, 언제나 그 신비의 가치에 비해서 나의 논의가 너무나 미미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사고력조차도 이 신비의 위대함에 완전히 정복당하며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비에 대해서는 놀라움과 경이의 탄성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다. 사고력으로 깨달을 수도 없고, 입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누가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것은
너무나 높은 것이어서 나의 마음이 이해하거나, 나의 말로 표현해 낼 수 없는
비밀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데 부끄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체험한다.
칼빈은 성만찬에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영적인 성격이라서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경이 명백하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가 육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교제”(mysterious communion)를 하며, 이러한 사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이때의 “신비스럽다”는 말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의미요, 영원히 감추어진 어떤 것이나 막연한 무엇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이해와 오감으로 완전히 소화될 수는 없으나, 언제나 계시되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위로부터 내려와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성례는 신비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위로와 격려와 감격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필수적인 은혜이다. 따라서 주술적인 능력을 포함하는 듯한 신비의 강조는 적절한 이해가 되지 못한다. 성경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자 우리의 연약에 적응하신다.
“우리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게 참으로 믿기 어렵게 보이긴 하지만, 성령이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모든 자각을 얼마나 초월해 있으며,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도량을 우리의
도량으로 측량하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믿음으로 마음에 품도록 하자.
성령께서는 참으로 공간상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킨다.”
칼빈의 영적 임재설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설명이 들어 있다. 제목도 “주님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라고 되어 있다. 곧, 성령의 작용으로 인해서 상징 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우리로 하여금 참여케 한다. 빵을 떼는 행동은 상징이다. 분명히 실체, 즉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상징물을 통해서 상징하는 바가 무엇임을 알게 하는 물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인격적 신뢰)으로 받아들일 때에, 이런 상징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실체를 보여주신다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단지 공허한 상징을 우리 앞에 제시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
칼빈은 빵과 포도주를 상징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분이 아니시다면, 이 빵을 떼는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참여함을 진실로 나타내고자 하시기에 그분이 참으로 자신의 몸을 제시하시고, 보여주시고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 주님에 의해서 지정된 상징들을 바라볼 때에,
그 물체가 상징하는 바 실체가 참으로 그곳에 임재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고
그런 생각으로 압도 되어야만 한다.
왜냐면, 그 안에 참으로 여러분들이 참여한다는 확신을 주시지 아니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손에 자신의 몸의 상징을 놓으시겠는가?
그러나 만일 보이지 않는 선물을 보장해 주시기 위해서 보이는 상징이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 몸의 상징을 받을 때에 그 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확신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자.”
[김재성 칼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혜택들 (6)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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