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로교회의 역사와 유산들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나간 역사의 성취와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그리고 회중교회의 유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의 역사와 자취를 공부하는 이유는 실패의 교훈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함이다. 사울의 실패를 목격했던 다윗 왕이었지만 그도 역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실패했었다. 다윗의 노년을 목격했던 솔모몬 왕도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말년에 산당에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모순이요, 한계다. 부디 청교도 혁명의 시기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살아있는 교훈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
현대 장로교회는 너무나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최대 교단이라고 하는 연합장로교회(PCUSA)가 동성애 문제로 크게 분화되고 말았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성경에 충실하면서 역사적 신앙고백을 존중하고 따르는 교회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이런 현상은 1860년대 남북전쟁으로 촉발되었다. 흑인 노예를 해방하는 정치적 휴머니즘으로 온 세상에 감동을 주었으나, 미국 장로교회는 그 후로 역사적 신앙고백을 버리게 되었다.
3. 잉글랜드 청교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와 존 오웬의 회중교회
스코틀랜드에서는 낙스의 영향으로 1560년부터 장로교회가 국가 전체에 정착했고, 1643년에 런던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개최되었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서야, 영국 종교개혁의 꿈과 비전이 성취되었는데 약 20 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청교도 혁명의 배경에는 낙스의 저항정신과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교회 건설에의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핍박 속에서 장로교회가 성장하여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될 때에는 장로교회 신학자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회중교회는 청교도 전쟁의 와중에서 확산되어 나갔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들을 거의 다 받아들였으나, 세기가 지난 후에는 크게 달라졌다. 1662년 찰스 2세가 왕정복고를 하면서 성공회 체제로 회귀했다. 미국에 세워진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회중교회가 대세를 이뤘고, 장로교회와 협력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어서 미국의 회중교회는 개척자들의 칼빈주의 신학을 벗어났는데,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갔던 것이 아니다.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청교도 운동의 특징은 이미 유럽에서 진행되어온 개혁운동의 새로운 갱신(to reform the Reformation)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교회를 운영하는 실제적인 체제에서도 역시 청교도들은 교회의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획일주의에 맞서서 투쟁했다. 교회의 치리방식에 관해서 웨스트민스터총회가 장로교회의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토마스 굳윈, 존 오웬 등은 회중교회 방식을 실행하였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보스톤에 세워진 존 코튼의 회중교회 체제를 따라갔는데,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청교도들의 교회 개혁운동은 훨씬 더 독립적인 교회의 체제를 주장하면서, “관용”을 요구하는 분리파, 소수 집단들(퀘이커파, 쏘시니언이즘, 과격한 자유교회파 등)이 등장하면서 논쟁과 분열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잉글랜드에서 장로교회가 정착되기까지 엄청난 희생과 시련의 시기를 견뎌야만 했었다. 수많은 초기 청교도들의 노력으로 장로교회 정치체제가 결성되었는데, 수십여 년의 탄압 속에서 시련의 시기가 지나갔다, 장로교회의 칼빈주의 개혁신학은 1570년대부터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나던 시기에 청교도들이 확고하게 붙잡고 나아갔던 가장 중추적인 근간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확산된 개혁신학과 칼빈주의는 점차 장로교회의 신학과 교회론으로 구체화되었다.
1)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월터 트래버스의 기초작업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장로교회를 가르치는데 생애를 바친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필두로 하여, 존 필드, 윌칵스 등이 1573년에 최초의 장로교회 노회를 구성하였고, 그 후로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각 지역별 장로교회 연합회를 구성하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주교제도의 허상을 밝혀냈고, 국가교회 체제에 대해서도 역시 거부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기에 주교의 사회적 권세와 사법적인 권한이 남용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토마스 카트라이트,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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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 성공회 국가 교회체제를 강력하게 시행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후반부에 증장해서, 그의 후계자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장로교회의 신학자는 월터 트래버스(Walter Travers, 1548-1635)였다. 청교도의 도덕적 태도가 교회정치 제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트래버스가 주목한 점은 교회의 건전한 관리와 유지를 위한 방안이었다. 특히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 당회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정치 제도가 정착되면서, “권징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이 중세 후기 로마 교회와 장로교회 청교도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한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열쇠를 누구에게 맡겼는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다. 장로교회에서는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회중교회 제도를 옹호하는 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인 총회와 같은 특별총회가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의 통치 시기에 교회 정책에 반대하던 박해를 받았던 청교도들은 주로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 소속해 있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국왕의 절대군주제가 장악한 국교회 내분에서 새로운 예배 개혁과 자유로운 성도의 모임을 소망하였으나, 국왕의 혹독한 압박에 낙심해서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뉴잉글랜드를 실제적으로 통치하는 식민지 총독이 여전히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권 아래 있었지만, 교회 체제는 장로교회의 치리권을 각 개별 교회에만 한정하는 변형된 형태로서의 회중교회 제도를 채택하였다.
2) 청교도 최고의 신학자, 오웬과 회중교회
청교도들은 장로교회에 속하든지, 회중교회 제도를 채택하든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믿었다. 토마스 굳윈(1600-1680)과 윌리엄 에임즈 등은 사도행전 15장이 설명하는 초기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권을 인정하였다. 장로교회에서는 이 말씀에 따라서 전국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대표가 되는 총회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교회로 간주하였다.
청교도 회중교회는 오늘날의 회중교회와는 신학과 교회체제에서 전혀 달랐다. 회중교회 소속으로 청교도 전쟁의 승리를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이 가장 신뢰하던 신학자가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이다. 오웬은 처음에는 성공회에서 성직을 받았고, 장로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던 중에, 회중교회의 확산에 영향을 받아서 가담했다. 1644년 여름이나 가을에 오웬은 아버지와 형이 속해 있던 장로교회를 떠나서 회중교회에 가입했다. 그는 어느 한 개의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와 장로가 모여서, 노회, 대회 등을 구성하여 다른 대표자들이 통치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를 다스리고 처리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청교도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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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1658년 10월에 런던, 사보이 궁정에서 회중교회의 총회(Savoy Assembly)를 소집했는데, 약 1백여 명의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자신들의 회중교회가 다른 개신교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차별화의 시도였다. 바로 이들 회중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구두로 몇 곳을 수정하자는 제안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작성할 때에, 절대 다수가 장로교회 목회자들이었고, 회중교회 목회자는 불과 다섯 명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끝나고, 올리버 크롬웰이 집권하에서 중앙권력을 통치하던 잉글랜드 정부는 거의 독립파 지도자들의 연맹과 같았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자들이 국정을 주도했기에, 기존의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에 속하여서 권세를 발휘했던 귀족들은 “추밀원 회의”에서 퇴장하였다.
1650년대에 잉글랜드 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신학자가 존 오웬인데, 그는 최종 결정권을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여 판단하는 회중교회 제도를 강조하면서, 전체 잉글랜드 교회를 이와 같은 구조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였다. 청교도 교회론에 있어서는 오웬으로 하여금 장로교회에서 회중교회로 변하도록 영향을 준 존 코튼에게서부터 신학적인 강조점들을 찾아야 한다.
오웬이 주도한 사보이 선언의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가 주신 “교회의 제도, 질서, 조직에 대한 권위”는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주어진다고 하였다. 세속 군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세는 교회에게 주시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회중교회는 다소 복잡한 변천 과정을 겪었다. 초기 뉴잉글랜드 회중교회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삼고, 다소 변형된 독립제 장로교회의 형태였다. 따라서, 역사학자들과 교회사 연구자들은 청교도들이 모두 다같이 상하 체제로 구성된 주교제도를 거부하면서도, 교회정치 제도에 대한 인식과 실행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 구분한다; 즉 엄밀하게 살펴보면, 비분리주의(non-separating), 반분리주의(semi-separatist), 완전 분리주의(separatist)로 나누고 있다.
[김재성 칼럼]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비전 (3)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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