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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8:22-26 / 무엇이 보이느냐?

박석중목사(대전)

by 김경호 진실 2024. 4. 22. 09:09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특이하게 한 가지 병을 고치면서 두 번 안수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한번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한번 안수하시면 병이 떠났습니다. 그것도 조금씩 나아진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어렵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주님께는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불치병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주님이 맹인을 고치면서 안수를 두 번 하셨습니다. 첫 번째 안수하셨을 때는 맹인의 눈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 안수하자 그때에야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피겠습니다. 

 

1. 맹인의 눈을 고치신 예수님

22절에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손대시기를 구했습니다. 손대신다는 것은 만져주시고 안수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수하시면 병이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23절에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은 그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복잡하고 소란한 곳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치료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무리들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기적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맹인의 손을 붙잡고 동네 밖으로 나갈 때 맹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나 같은 맹인의 손을 붙들고 가실까 생각하며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맹인을 고치셨습니다. 침을 뱉기도 하시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으로 고치고, 어떤 때는 안수를 하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합니다. 못 고친 병이 없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맹인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 주시는 교훈입니다. 우선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영적으로 맹인이 되어 있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안수하시자 그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23절에 “무엇이 보이느냐?” 눈을 뜬 맹인에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러 맹인을 고쳤지만 이런 질문은 처음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사람마다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군인들 눈에는 군인만 보입니다. 사업하는 사람 눈에는 돈만 보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세상만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나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보입니까? 신령한 것이 보입니까? 천국이 보입니까? 우리는 보는 것을 따라가고, 보이는 그것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24절에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사람들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뚜렷하게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것도 보지 못하던 맹인이 이렇게 희미하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물건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원숭이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돈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형제를 원수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에게는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 맹인을 그렇게 두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주님께서 그 눈에 다시 안수하자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나았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 보는 눈이 건강한 눈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나무는 나무로 봐야 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봐야 합니다. 보물을 보물로 보고 쓰레기를 쓰레기로 봐야 합니다. 죄를 죄로 보고 의의 의로 봐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눈을 반쯤 뜨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도 희미하게 알고, 진리도 어렴풋이 알고, 구원에 확신도 없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도 없고, 부활도 희미하게 알고 믿음도 연약합니다.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사람은 이 맹인과 같습니다. 그 눈에 다시 안수를 받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두 번의 안수로 맹인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주시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두 번 안수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맹인에게 두 번 안수하신 것은 이 맹인의 신앙이 연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맹인은 믿음이 없는 자였습니다. 주님은 먼저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믿음이 있는 것만큼 병이 낫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안수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아직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눈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2. 두 번 안수가 필요한 사람들

첫째. 제자들. 막 8:15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바리새인의 잘못된 교훈과 외식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누룩을 떡으로 오해했습니다. 주님은 답답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7-18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19-21절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맹인을 고치며 두 번 안수하셨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 아무리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답답해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맹인의 눈을 고치면서 두 번 안수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 뒤에 이어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인자가 고난을 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항변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이켜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33절).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눈을 뜬 것 같은데, 사실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잡혀가자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다시 안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실망과 낙심에 빠진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옆에서 동행하시는데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 24:16). 영적으로 맹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언제 밝아졌습니까?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눅 24:30-31). 눈이 열린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이들이 언제 눈을 뜨게 됩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제자들이 눈을 뜨는 역사적 사건이 나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그들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눈을 떴습니다.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위협을 당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고난도 기뻐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뜨고 있습니까? 희미하게 보면서 다 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상태로 만족하십니까? 우리에게 다시 안수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안수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안수를 통해 분명하게 눈을 뜨고 주님의 뜻을 밝히 알고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고 믿음 생활이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전 복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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