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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21-24, 35-43 / 소녀야 일어나라

박석중목사(대전)

by 김경호 진실 2024. 9. 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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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고, 여러 불치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적 중에서 최고의 이적은 죽은 사람을 살린 이적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이적은 다른 이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린 이적을 통해서 은혜 받기 원합니다. 

 

1. 주님 앞에 엎드린 회당장 

22절에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12살 된 어린 딸이 심각한 병이 들어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료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22절에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회당장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고 사회적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의 딸이 아프지 않았으면 예수님 찾아왔을까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간구했겠습니까? 그런 시각으로 보면 고난은 은혜의 기회입니다.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은 최고의 존경이며 최고의 겸손입니다. 이 겸손함이 있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주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비굴한 것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23절에 보면 회당장은 엎드려서 간곡히 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회당장은 딸에게 손을 얹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주님이 손을 대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주님이 손을 얹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우리 자녀는 괜찮습니까? 우리 자녀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무 문제 없습니까? 자녀 문제로 장담할 사람 없습니다. 무능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믿음이 좋은 사무엘 선지자도, 다윗 왕도, 히스기야 왕도 자녀들이 잘못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자녀 문제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통을 겪거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도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잘되고 있다고 큰소리칠 수 없고, 지금 문제가 있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찾아가 간구하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그와 함께 가심

24절에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주님께서 회당장과 함께 가십니다. 회당장의 간절한 간구를 들으시고 그의 집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문제의 현장으로 함께 가십니다. 주님이 우리 집으로 함께 가시고, 주님이 직접 내 자녀를 찾아가 주시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 집으로 함께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간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회당장이 주님을 모시고 가고 있는데 중간에 한가지 사건이 생겼습니다.

25절에 보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예수님 뒤로 와서 주님의 옷에 손을 대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둘러보시며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주님 앞에 엎드려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다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고침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회당장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딸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고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인데 시간을 지체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이때 회당장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빨리 가셔야지 뭐 하십니까?’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자에게 ‘왜 중간에서 끼어들어 방해하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체하다가 35절에 보면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불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큰 문제가 생겨 기도했는데 기도 응답이 더딥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응답받고 문제가 해결되는데 나만 응답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차원에서 보면 야이로의 믿음을 격려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또 다른 능력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저런 병도 고쳐주시는 주님 내 딸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믿음이 강해지고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35절에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소식입니다. 상황이 끝나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주님만 모시고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는데 주님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딸이 죽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36절에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은 그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불신앙적인 말도 들으시고, 기도하는 것도 들으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마지막 절망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아이는 죽었고 상황은 끝났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병자가 죽으면 모든 치료도 중단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는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계속 믿으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망 속에서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일하십니다. 믿음은 놀라운 일을 합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믿음과 겸손은 하나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믿음을 갖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이 겸손합니다.

39절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주님께서 사람들을 조용하게 하시고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자와 죽은 자의 상태가 비슷합니다. 잠자는 자를 보면 몸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자고 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살아 있으면서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도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잔다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이 다시 살릴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밤에 자다가 아침이 되면 깨어 일어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은 성도를 다시 깨어나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4.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림

41절에 보면 주님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명령하셨습니다. “달리다 굼” 이 말은 아람어인데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입니다. 그 소녀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 “달리다 굼”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다시 살아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이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마귀를 이기신 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삽니다. 누구라도 예수님 만나면 삽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세 번 행하셨습니다. 첫째는 본문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적이고, 둘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적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살리셨습니다. 셋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적입니다. 예수님이 나인 성 성문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성으로 들어가는 예수님 일행과 관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이 만남이 복이고 이 만남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죽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죽은 자와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5:6에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야고보서 2:26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3:1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우리가 여기에 해당된다면, 우리 자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달리다 굼!” 

주님을 찾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나의 병든 심령을 위해서, 우리 자녀를 기도합시다. 오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큰 은혜를 받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대전 복용교회 박석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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