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내걸며 위대한 개혁을 시작한 것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교황이나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선포한 개혁의 정신을 생각해 본다.
“시험지 지문만도 못한 성경 본문?”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학생이 예배 후에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왜 그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지문을 읽어 놓고 지문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시나요? 성경 지문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궁금한데 설교 시간에는 언급을 안 하셔서 물어봅니다.” 그 학생이 말하는 지문이란 청년부 예배 시간에 봉독한 성경 본문을 말하고 있었다. 설교를 듣는 그 학생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이 국어, 영어 시험지에 나오는 지문만도 못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의도치 않게 성경의 권위가 다른곳도 아닌 강단에서부터 무시당하는 순간이다.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첫 번째 자리는 바로 강단이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사수해야 할 설교자 스스로 성경을 참고서 지문만도 못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가 공적 예배 시간에 성경을 봉독해 놓고 다른 이야기만 한다면 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성경 본문보다 목사님 설교가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라는 이야기가 농담 속 진담으로 종종 들리는 시대이다.
성경 본문이 이끄는 설교
‘목사님 말씀’이 ‘성경의 권위’보다 높아진 한국교회를 향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계시된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는 설교는 성경을 우리가 따라야 할 최고 권위 자리는커녕 참고서 지문만도 못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존 스토트(John R.W. Stott)는 일찍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설교는 강해설교여야 한다”고 말했다. 강해설교의 대부라는 헤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도 강해설교는 방법론이 아니라 신학이요 철학이라고 했다. 성경 본문의 권위에 철저히 순복하는 설교자의 신학과 목회 철학이 강해설교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이다. 설교 본문이 정해졌으면 이제 그 성경 본문이 설교를 이끌어야 하고, 심지어 설교자의 생각과 비전까지도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설교
공적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에 철저히 순복하는 설교가 성경의 권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말로는 성경의 완전성과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성경을 설교자의 주장을 위한 참고 자료 정도로 만든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1:16)”는 말씀처럼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한다고 하나 실제 설교 행위로는 부인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에 기초한 스위스의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IS THE WORD OF GOD)”라고 고백한다.
2024년 10월 31일 종교개혁기념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강단이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경 본문이다. 성경 본문이 설교를 지배하고 설교자와 회중의 생각을 다스릴 때 성경의 권위는 다른 곳이 아닌 강단에서부터 회복된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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