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연합은 1998년부터 봄이 되면, 배낭을 메고 온 몸을 자연에 의지한 채, 열흘 간 도보순례를 떠납니다.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이 땅의 아픈 곳, 그 신음 소리를 들으며 대안과 공존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제주 4.3 70주년인 올해는 '동백꽃 다시 핀다'라는 주제로 제주 전역의 4.3 유적지와 분쟁 지역을 걷습니다. 4.3 평화공원을 시작으로 북촌, 우도, 성산, 남원 그리고 강정과 송악산을 지나 한라산을 넘는 코스입니다. 순례는 4월 3일부터 4월 12일까지 9박 10일간 진행되고, 다섯 번의 기사를 연재합니다. - 기자말
4월의 제주 바람은 거셌다. 우도에 들어가 걷고, 저녁에는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해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 계획은 풍랑 경보로 무산이 되었다. 녹색순례 참가단은 성산포 성당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처음 발걸음을 멈춘 곳은 서북청년단 특별중대 주둔지였던 옛 성산동 국민학교 건물터였다. 해방 공간에서 제주 4.3 사건으로 이름을 각인시킨 서북청년단은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 조선공산당을 피해 월남한 청년들이 만든 극우 반공 단체 서북청년회를 계승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로 지목한 서청, 미군도 군 병력 대부분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제주 4.3유적Ⅱ>(제주도·제주4.3연구소)의 기록에 따르면 이북 말을 쓰는 서청 특별중대가 약 3개월 정도 초등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하고, 학교 담장 너머 감자창고에서 주민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다고 한다.
생존한 피해 주민은 70여 년 전 이곳에서 숱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해 비명이 가득했고,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폐허를 채운 바람소리 속에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들 말이 없다. 오늘 걷게 될 곳곳의 학살 현장을 감당할 수 있을까. 비극의 역사,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지 생각한다.
아름다운 곳마다 학살터
불쑥 솟아올라 있는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또다시 걷는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관과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자 대표적인 관광지인 성산 역시 제주 4.3의 아픈 유적지이다. 성산포 터진목 해안가를 따라 걷는 길에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유족회에서 세운 400여 명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제주 어르신들이 자주 쓴다고 알려진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말, '살다보면 살게 된다'며 담담하게 생의 이면을 드러낸 말을 한라산 중산간의 표선 가시마을과 의귀마을에서 들었다. 열여덟 나이에 4.3 사건을 겪은 가시마을 어르신은 360가구가 살던 큰 마을이 초토화된 이야기를 꺼낸다.
마을은 사라지고, 바스라진 희생자 유골, 전쟁과 예비검속의 시기에 사라졌지만 돌아오지 않는 수천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두 어르신들은 "나는 그저 살암시민 살아졌는데" 말끝을 흐린다. 광기의 시간, 가족들과 이웃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숨죽여야 했던 긴 세월, 눈물도 통곡도 사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 절망의 깊이를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유가족들이 조성해놓은 현의합장묘, 무장대가 매장되었으나 누구도 찾지 않는 송령이골, 순국선열로 기록된 이들의 충혼탑을 차례로 보며 기록된 역사와 기억해야 하는 역사의 차이를 실감한다.
여전히 세찬 바람 속,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봤던 백비(白碑)를 떠올린다. 서로 다른 시각과 주장에 따라 폭동, 민중 항쟁, 반란, 사건, 사태, 양민 학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 '제주 4.3 사건', 언제까지 사건으로 불러야 하나. 피해 조사를 넘어 이제는 역사적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이름을 바로 세우는 정명(正名)의 과제가 우리에게 아프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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