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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기도는 성령임재의 수단인가?

김명도박사(미국)

by 김경호 진실 2009. 11. 6.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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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기도는 성령임재의 수단인가?


성령이 임재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즉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받으면서 임재하며 그로부터 항상 임재하십니다.  <성령 세례> 라는 말은 구약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말하듯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고 하신 그 말씀이 사도행전 2장에서 현실로 성취된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다시 받는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는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 니라” 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구원의 은혜이며 인간의 어떤 노력도 가미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개 자칭 부흥사가 손으로 안수한다고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는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령 받아 되어지는 것인데 베드로가 그 많은 삼천명을 개인적으로 안수해서 성령 받게 했다는 말인가?  아무에게나 안수하면 모두 성령을 받는가?  성령을 받게 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 주신 (엡1:4) 그가 원하시는 분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어 구원해 주신다. 중생하여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우리 안에 성령이 늘 내주하시며 성화를 돕고 (성화는 중생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역사 하십니다.  사람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교회 강단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강단만 말씀 선포되는 곳이 아닙니다 로마의 공동묘지인 카타콤 (catacomb)에서 말씀을 선포해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더하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책망할 자를 책망하시고 위로할 자를 위로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에는 구약 때처럼 성전이 일정한 건물이 아니고 고린도전서 3장 이나 6장, 롬 12장 말씀대로 우리 몸이 주님의 성전이고 우리 몸으로 주님에게 산 제사를 드리고 우리 몸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립니다 (고전 6:19-20).  


아직도 제단을 말하거나 천번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신약과 구약에 흐르는 언약의 하나님의 구원사 (Redemptive History) 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이 선포되는 강대상에 신발 신고 올라가면 안 되니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나무로 만든 강대상에 우리의 예배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1638년 영국 Scotland 의 Edinburgh 에 있는 Grass Market (Scottish Reformation Society 바로 앞 마당) 에서는 Scotland “언약파 Covenanters” 들 120여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모두 개혁주의 목사들이었지요.  이들은 모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그중 제일 나이 어린 27살의 목사 한 사람이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는가?” 라는 형 집행 관리의 말에 아주 절세에 유명한 말을 남기고 운명했는데 그가 남긴 말은:

"I am less dreadful standing here than in my pulpit" (나는 여기 서 있는 것이 내 교회

설교단상에 서 있는 것보다 덜 무섭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말은 그가 “설교하는 단상에서는 혹시 말에 실수할지도 모르고 성경과 다른 교리를 전파할까 하는 마음으로 너무 긴장하니 떨려서 설교하기가 어려웠는데 여기 교수대에 서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라는 말입니다.  이런 목사가 오늘 어디 있을까요?  없습니다.  


강대상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사람이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자기 말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서> 제56문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죄를 지으면 사람의 형벌은 혹 면할지라도 하나님의 형별은 결코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성경적인 설교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교회 성도들로부터는 “아멘” 하는 호응에 기분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서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불의를 용서치 않는 절대 “공의로운” 심판 주이심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이 임하려면 불이 임해야 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루디아가 구원을 얻을 때 불이 임했는가?  빌립보 간수가 구원을 얻을 때 안수를 받거나 불이 임했는가?  모두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곡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Richard Gaffin, Jr 가 쓴 <Perspectives on Pentecost> (P&R 1978) 을 참고 바랍니다.

Gaffin 박사는 동부 세계적인 명문교이며 오늘 남아 있는 유일한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이십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말로 “은사론” 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책방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그 <부흥사> 라는 사람에게 이 책을 꼭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십자가 사건처럼, 또 노아의 방주사건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한번 일어났던 단회적인 사건이지  반복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쓰신

성경 주석에서 사도행전 2장을 참고하세요.


흔히 히 13:8을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말을 증거구절로 삼는 경향이 있지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속성이 변함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구속의 역사 (redemptive history) 를 위해서 전쟁, 이적, 기적, 천사의 내방, 환상, 계시 등으로 역사하셨고 그 모든 것들은 성경의 일부로 정경이 되었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런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고 주신 말씀 완성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역사하십니다. 성경 해석도 항상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측면에서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s 즉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부흥사를 포함하여 많은 목사들이 사도행전을 오해하여 그대로 모방하려 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구약이나 신양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나타난 모든 초자연적 사건들은 그것들을 우리가 모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성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주신 사적들입니다. 디시 당부하거니와 Gaffin 교수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라며 또한 Princeton  신학교 신약교수였던 개혁주의 신학자 Benjamin B. Warfield 박사가 쓴 <Counterfeit Miracle> (거짓 기적) 이라는 책도 꼭 권해 드립니다.  Baker 출판사에서 1947년에 간행되었지만 근자에 Tennessee 주 Unicoi 에 본부를 두고 사역하는  Trinity Foundation 에서 다시 출판했습니다.  모든 책들은 www.amazon.com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책값도 저념 합니다.


목사나 부흥사가 <수도꼭지> 구실을 하다니....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부흥사에게

요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의 그 불휴의 명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어 있는 죄인들“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이라는 1741년 7월 8일

오전 11시 Connecticut 주 Enfield 회중교회에서 신명기 32:35절을 가지고 한 그 설교를 책방에 가서 사서 읽어보며 공부를 더 하라고 하세요. 참다운 설교가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세요.  이 설교는 너무 유명하고 감동적이어서 이 설교만 따로 책자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그 설교는 원래가 40분 분량 설교 원고이지만 그 설교를 든는 회중교회 성도들이 너무 회개하고 울기 때문에 한 시간 반이 걸려서 그 설교를 마쳤다는 이야기가 있는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가 진짜 목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만 가감 없이 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짐작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결과가 됩니다. 만일 잘 못된 설교로 교인 중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면 그 목사는 큰 연자 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어야한다고 마태복음 18:6 에 엄히 명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목사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주님의 제자로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요 14:15. 21, 23, 24, 요일 5;3, 요이 6).


목사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재자가 아닙니다.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는 한 분 그리스도뿐입니다 (딤전 2:5). 그 부흥사는 신학도 설교도 모르는 사람이 목사 행세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3중직이 있는 것을 우리 성도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도 삼중 직이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중간에서 “다리를 놓는 분” 은 바로 예수 한 분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목사가 중재자가 아닙니다. 목사나 일반성도나 모두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위로부터 둘로 가라졌습니다. 이제는 제사장이나 어느 누구의 중재가 필요 없이 우리 모두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에

직접 나아 갑니다 (히브리서 4:16 을 읽어 보세요).


교회 성도들이 그런 부흥사의 설교에 “아멘” 하는 것은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이며 그들이 무엇을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부흥사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는 목적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분위기 에서 사이비 목사들은 안심하고 여러 교회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비싼 강사료를 챙겨 호화롭게 살며, <목사 섬기라> 고 기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이비 목사들과 그런 사이비 목사에 아멘하는 사이비 신자들이 있는 한 한국 교회는 정화되지 못하고  순수성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끝으로 질문하신 안수의 의미를 말씀드리지요

구약은 신정국가 (theocracy)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큰 <교회> 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 세 가지 직분을 가진 사람이 성전 지성소에 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 세 가지 직분 가진 자를 세울 때는 기름을 부어 안수를 대신했습니다.  이 예식은  안수 받는 자로 하여금 그 맡은 일을 감당하도록 성별해 세웠으니 그 일을 감당하도록 안수 은혜를 간구하며 행하는 예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왕하 13:16에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 한다는 말이 구약에 꼭 한번 나오지만 이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며 임시로 어떤 일을 맡길 때 구약에서 행한 유일한 경우이므로 여기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하 13장 말씀을 잘못 이해한 어느 신학생이 사람을 안찰한다고 하면서 어느 여자 환자를 때려서 죽인 사건이 옛날 내가 일하던 어느 보수 신학교에서 일어났었습니다. 경찰이 나에게 와서 <석방 탄원서> 를 쓰면 풀어주겠다고 종용했으나 나는 단연 거절했지요. 그런 사람은 신학교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인죄로 형을 살고 지금은 외국에 나가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 했습니다. 요즘은 교단마다 헌법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법대로 징계하는 법도 없는 하나님 부재의 무법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을 독립해서 고립시켜 해석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영국의 <Thirty-Nine Articles 신조> 는 제29조에서 강조하며 이런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체의 흐름에 따라서 어는 성경구절이든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그 기름을 붓는 일이 안수로 변합니다.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할 때 기름을 붓지 아니하고 손으로 안수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특별히 성별하여 세웠으며 하나님이  그 사명을 다하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는 행사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모두 안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임하여 중생하고 회개하는데 중생하며 회개하게 하는 이는 성령 바로 그 분 이시며 성령은 사람의 안수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나 루디아가 안수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말을 성경에서 읽어보지 못합니다. 문제의 부흥사가 말하는 <안수> 란 세례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례 받은 다음 다시 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안수와 세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중생할 때 받은 성령을 다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모

성령세례란 바로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일생에 단 한번 받는 것입니다. 그 부흥사가 이런

세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다시 안수를 받아서 무엇을 합니까?  이미 성령을 받아

중생하여 영생을 얻었는데 왜 또 안수를 받아 무슨 성령을 받습니까? 오직 성령의 충만 만이 있을 따름인데 성령 충만은 죽을 때까지 지속하는 과정이며 안숨받는다고 되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정전도사님

이렇게 답변 드립니다. 그 교회를 시무하는 본 교회 목사의 신학을 탐색하세요. 부흥사 목사는 한번 지나가면 그뿐이지만 (많은 해독을 끼치고) 그 교회 담임목사 마저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다면 단연 그런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알아보세요.  그리고 요즘은 가장 어려운 시기인데 바른 신앙 즉 역사적 신앙고백서 이를테면, 아다나시우스 신경, 베르기 신경,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프랑스 신앙고백서, 스콧틀란드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 요리문답, 케임부릿지 선언 등 을 바로 믿는 개혁주의 교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서을 문자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입니다.  


참고로 “참교회”란 첫째로, 말씀의 바른 선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부흥사와 같은 설교를 한다면 그 교회는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둘째 참 교회는 성례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성찬식에 참여하게 한다든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을 세례하고 교회의 임직자로 세운다는 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셋째로 참 교회는 권징이 바른 교회입니다. 부흥강사가 아무리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그냥 내버려두는 교회,  와 그가 속한 교단 (어떤 교단인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을 부흥회 강사라고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에서 성도들의 귀중한 헌금을 탈취해가도록 주선해 주는  교회는 참교회가 아닙니다.


정전도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말씀에 굳게 서서 칼빈의 후예로서

바른 신앙을 위해서는 조금도 타협이 없는 귀한 사역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정지현 성도

에게 문안 드려주십시오.  감사 합니다.


김명도 교수

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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