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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재건운동

이기선목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2. 5.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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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타락과 재건운동의 태동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오점은 1938년 9월 9일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음을 이해하며,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
황국시민으로서 정성을 다하기로 함" 이라는 성명서입니다.
이 성명서는 오랫동안 일본의 탄압을 이겨 나오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일본의 우상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한국교회의 공식 표명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한국교회는 일본의 우상 앞에 절하는 이세벨의 무리와 신실한 성도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러한 절망된 상황속에서 순교적 각오로 일어난 운동이 재건운동이었고 그 이후 재건운동의 열매로이 땅 위에 개혁신앙을 갖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식민지로서 갖은 탄압과 온갖 착취를 감행하던 나머지 드디어 황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문자를 빼앗고, 사회에서는 문화재를 파괴하고 마침내 우리의 성까지 빼앗아 한 민족 고유의 민족사상을 말살하고, 우상국 일본이 자랑하는 팔백만 신에게 숭배를 강요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일본 황제를 현인신이라 명칭하여 궁성요배를 감행케 하고 방방곡곡 전대미문의 신사라는 것을 탐조하여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을 더럽히고 우리 동포에게 이방신을 숭배토록 강요하였다. 한편 교회에 탄압의 마수를 뻗치게 되었는데 교회가 세운 학교에 성경이 필수과목인 것을 수의과로 변경하여 신사참배에 앞서 학교에서부터 신사참배를 감행케 하였다. 이로인해 193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는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고,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서 윤산은 교장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학교를 폐문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드디어 교회에도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기독 신자에 있어서는 신앙의 정조를 보존함이 생명보다 귀중하지만 이미 신앙이 타락한 교회인지라 진리 투쟁에 항거할 힘이 없어 모든 교파들이 굴복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다 굴복하고 최종까지 거절하던 장로교도 일제의 총칼의 위협 아래 드디어 1938년 제27회 "예수교 장로회 총회" 석상에서 신사 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서 천추에 성경을 모독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신사 참배 교회라는 공적 죄악을 남기게 되었다.

- 신사참배를 이행하기도 하고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당시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범죄

1. 비행기 헌납 : 영,미 출신 목사들이 침략 전쟁에 자진하여 금품을 모집해 바침, 평화의 종교를 깨뜨림
2.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부인 : 기독교 근본진리를 부인하고 신일합일의 부정
3. 천조대신의 미소기 세례 : 한국 기독교 대표 30여명이 한강에서 일본 우상신에 굴복함
4. 예배당 종 헌납 : 참된 영을 일깨우는 성종을 군함과 대포 만드는데 내어줌
5. 성일을 작업일로 만듦 :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일을 봉사 작업일로 만듦
6. 성전축소 :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당을 병기 제조공장, 군인 환송 대합실로 만듦
7. 만왕의 왕설 부인 : 에수는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함을 부인토록 찬송가, 성경 고침
8. 신사참배 거부 성도 고발 : 목사가 진리를 지키는 순진한 양들을 일본 관헌에 고발, 구속함
9. 영,미 격멸기도 : 해방되는 아침까지 신사참배는 계속하고 영,미 격멸을 위해 기도함
10. 시국인식 순회강연 : 진리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할 목사가 시국인식 선전만 함

이와같이 한국교회가 범죄하여 교회의 신성한 강단에 일본 국기를 걸고 또한 가미다나(즉 신사를 축소한 것)을 걸어놓고 하나님께 예배하기전 가미다나에게 절하고 일본 국가를 부르고 예배드리게 함으로서 한국교회는 성령이 떠나가고 마귀당으로 변해 버렸다.
이를 반대하는 많은 성도들이 일경에 구금되고 투옥되었다.
많은 박해와 무수한 매를 맞아가며 진리와 투쟁하기를 해방까지 7,8개 성상 옥고를 치루었고 이 때 13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이 고문을 두려워한 자는 산간토굴에 피신하여 기도하다가 해방이 되어 산간토굴에서 나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 항복함으로 이 땅에는 자유와 해방이 왔다.
그동안 진리를 파수하던 종들이 옥중에서 풀려 나왔다.

※ 신사 참배와 투쟁하다가 순교한 분들
1. 주기철목사(경남 웅천) 2. 최상림목사(경남 동래) 3. 최봉석목사(평남 평양) 4. 박관준목사(평북 영변)
5. 이변주전도사 6. 이춘관전도사 7. 이용희전도사 8. 김윤섭전도사(평북 선천) 9. 박의흠전도사(평북 의주)
10. 이병규집사 11. 안영애(한국 첫 순교자)

※ 부산, 광주, 대구 형무소 수진성도
주남구, 손양원, 김두석, 김영숙(재건), 염애나(재건), 이술연(재건). 김야모(재건)

※ 평양형무소 수진성도
이기선목사(67세) 평북 의주출생, 김린희전도사(38세) 평북 선천(재건), 김영낙씨(농부, 43세) 평북 정주, 박신근집사(37세) 평북 선천, 김화준전도사(47세) 평북 의주, 고흥봉목사(51세) 평북 강계(재건), 서정환전도사(40세) 평북 강계, 장두희서기(35세) 평북 위원 , 양대록집사(35세) 평북 초산, 최정민목사(74세) 평남 개천, 안이숙선생(38세) 평남 박천(여), 이광록집사(39세) 평북 의주(재건), 한상동목사(45세) 경남 의창, 조수옥전도사(32세) 경남 하동(여), 이현숙전도사(46세) 경남 함안, 최덕지전도사(45세) 경남 고성(여) 재건, 손명옥전도사(35세) 경남 창원, 이수원(40세) 경남 밀양, 방계성전도사(58세) 경남 부산, 오윤선장로(75세) 경남 함양, 이인재전도사(40세) 경남 밀양

해방과 동시 한국에는 많은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정치, 교육, 산업도 재건이 필요했다. 그러나 양심의 재건, 신앙의 재건이 더 필요했다. 그러므로 과거에 범죄한 죄를 회개하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이 재건교회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다.


1) 재건교회의 원리는 성경의 원리이다.
성경의 원리는 인간편에서는 범죄와 반역의 역사요, 하나님 편에서는 은총과 구원의 역사다. 재건교회는 과거 범죄한 한국교회를 회개케하고 구원하시려는 특사의 선물이요 은총의 기업으로 세운 제단이다. 하나님은 재건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교회로 세워 주셨다.

2) 재건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나는 여호와니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 : 8)는 말씀에 근거해서 재건교회의 표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3)재건교회의 지도원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산다"는 것이다.

4) 재건교회의 3대주의는 다음과 같다.
-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 철두철미 회개하자
-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연혁

1. 재건교회 설립 이전의 재건운동

1) 1940. 1. 1 마산 소재 태매시 선교사 댁에서 한상동, 태매시, 최덕지, 이인재씨 등이 모여 다음과 같은 재건운동 실행 지침을 결의하였음.
(1) 신사참배한 현노회(총회)는 해체함.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는 세례받지 않음.
(3) 신사불참배 신도들로 새노회를 조직함.
(4) 신사불참배 동지들의 원조를 도모함.
(5) 신사불참배 신도만이 모여 예배한다.

2) 1940. 3. 이기선목사가 주동하는 평안남북도와 만주에 분포되어 있던 신도들은 위의 결의문에 동참하여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실행하였음.
(1) 신사참배하는 학교에는 자녀를 보내지 않는다.
(2) 신사불참배운동을 전개하여 기성교회를 해체한다.
(3) 신사불참배 교인들은 가정예배를 드리고, 차후에 교회를 설립할 것.

3) 당시의 재건운동 주동인물
- 신의주 지방 : 이기선, 이광록
- 강계 지방 : 고흥봉, 서정환
- 의주 지방 : 김린희, 박의흠, 박신근
- 평양 지방 : 주기철, 채정민
- 부산 지방 : 송명복, 조수옥
- 마산 지방 : 태매시, 최덕지, 김영숙, 염애나, 김야모, 최달석
- 남해 지방 : 최상림
- 진해 지방 : 주상수
- 함경 지방 : 이계실
- 만주 지방 : 한부선

4) 신사불참배로 수감된 인물들
최상림(순교), 고흥봉, 김린희, 박의흠(순교), 박신근, 이광록, 최덕지, 김영숙, 염애나, 박열순, 이술연, 김야모, 조복희, 최달석, 강성화(재건교회에서 헌신한 인물들)

5) 1945년 해방 직후 출옥성도
고흥봉, 김린희, 박신근, 이광록,최덕지, 김영숙, 염애나, 이술연, 김야모

6) 출옥성도들의 재건구상
1945. 8. 17 출옥한 20여명의 출옥성동들은 평양교회에 약 2개월 체류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 재건구상을 발표하였음.
(1) 신사참배한 지도자들은 자숙한 후에야 교역에 나설 것.
(2) 권징 방법은 자숙으로 하되 3-6개월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 장로, 전도사 휴직 중에는 일반교인이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전국교회에 통지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재건 복구할 것.
그러나 이 안에 대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정면으로 반대, 거부했기 때문에 재건교회가 구별된 제단을 쌓게 됨.

2. 재건교회의 설립 해방과 더불어 남북이 양단되는 정치적 상황으로 이남과 이북의 독자적인 조직을 가지고 재건교회가 출발하게 됨.
1) 조선 예수교 재건교회 창립 과정.
1946. 1 평북 차령관교회에서 김린희전도사를 부흥강사로 하는 부흥회가 열렸는데, 교회사택에서 재건교회 창설의 발의가 있어 위원장에 김린희전도사가 피선 되고, 재건교회 창설 취지문을 전국교회에 발송함. 동년 4월평북 선천읍 황금동의 미곡창고를 빌려서, 최초로 재건교회의 간판을 달고,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예배를 드림.(이때 참석한 교회대표가 71명)

2) 예수교 재건교회의 설립
부산과 대구 교도소에세 출옥한 성도들은 1945. 12월 월남한 최덕지선생을 중심해서 각처에서 집회를 열고, 신앙 동지를 규합하던 중에, 1946.10월에는 이광록집사가 월남하여, 하구교회 집회를 시작으로 경남 일원에서 재건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음. 1946. 12월의 함안지방 집회시에는 강명, 외암의 우상 섬긴 교회당을 불사름.
1948. 2. 8 교회의 질서있는 운영과 성도의 신앙 연락의 필요를 절감하여,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교회에서 30여교회 5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조선 예수교 재건교회 임시중앙위원회가 회집되어 위원장에 강상은목사를 선출하고, 재건교회 표어·주의·주장·규약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

3)서울 중심의 이북 재건교회 설립
1946. 이원칠 전도사가 월남하여 아현동에서 회집하다가 47년 가을에 김린희전도사가 월남하여 서울 태평로 364번지의 2층 가옥을 구입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이 간판을 단 것이 서울에서의 최초의 재건교회가 됨.
1948. 4. 5 돈암동교회에서 재건교회 전국교역자 대회가 모이고, 회장에 고흥봉 목사, 부회장에 김린희전도사가 피선되었으며, 교회수는 15개처.
1949. 2. 1 재건교회 중앙위원회(2회)가 진해에서 소집되었는데 김창인전도사가 합류하였으며, 호주선교사 태매시선생도 가담함. 6.25사변으로 피난한 교인들이 부산 영주동교회에 운집하면서 고흥봉목사가 당회장으로
1951. 4. 24 최초로 성례를 베풀었음. 수세자가 100여며, 장로장립 5명, 정찬준씨가 목사안수 받음.
1951. 4. 3 부산교회에서 제6차 중앙위원회가 모였는데 최덕지선생을 목사로 허락함.
1951. 9. 마산교회에서 재건신학교가 개학됨, 교장에는 강상은 목사, 학생은 현역 남교역자 전원
1952. 5. 13 중앙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예수교 재건교회 제1회 남한 지방회」가 부산교회에서 개최됨.
1954. 3. 9 개최된 제3회 남한 지방회에서 주상수장로가 목사안수 받음. 「재건교회 헌법」통과.
1954. 7. 15「여성직에 대한 성경적 천명」이라는 강상은목사의 성명서를 계기로 해서 여성직을 반대하던 주상수 목사 이하 6명의 교역자와 9교회가 분리됨,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측에서는 신학생들을 중심해서 신학적 의견 차이를 일으켜 1952년 3월에 고흥봉목사를 필두를 134명의 전도사가 집단 탈퇴함.
1952. 10. 8 개최된 제8차 전국 교역자 대회에서는 함북의 덕천에서 신앙을 지킨 이계실목사가 가담하여 회장에 피선되어 내려오던 중에 1955. 9월에는 자기를 따르는 18명의 장로, 전도사를 이끌고 재건교회를 이탈하여 나감.
1955. 5. 2 남한지방회 제4차 총회에서 최덕지, 김영숙, 김소갑숙 제씨에게 강상은목사가 안수하여 목사로 장립함.
1958. 4월에 소집된 제8차 교역자대회에서는 김응진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남한 지방회의 주상수목사측과 통합할 것을 결의함.
1958. 11. 10 2년간 끌어오던「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측과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 지방회」측이 통합.
1958. 12. 2 영주동교회에서 소집된 통합대회에서는 그 명칭을「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대회」라 칭하고 회장에 주상수목사를 선출함.
1959. 9. 22「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14차 총회」가 개최되어 「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로 명칭을 바꾸고, 총회 산하에 동부, 중부, 서부지방회를 두기로 결의함.
1962. 5. 1 마산교회당에서 회집된 제19회 재건교회 총회에서 헌법 수정안 통과
(찬성 32, 기권 12, 가표 473, 부표 13, 기권 13)
1962. 10. 24 서울 남창동교회당에서 개최된 재건교회 대회에서는 그 명칭을 「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로 변경하고, 노회장에 주상수목사를 선출함.
1964. 2. 21 개최된 재건노회 제3회 임시노회에서는 김문제목사가 수요일 예배에 한부선선교사를 세웠다는 이유로 이탈함.
1972. 7. 19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은 재건오사교회 양영례 유년부장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국기경례를 거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0월을 선고함 (단, 거부학생 60여명은 훈방됨)
1974. 7. 2 부산교회당에서「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와 「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노회」는 「통합공동 성명서」를 내고 통합 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박재준, 부총회장에 박은수씨를 선출하여 30년동안 양립되어 온 재건교회를 통합함.
1987. 9. 20 재건여수교회당에서 회집한 제14회 총회에서 「헌법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헌법개정을 위해 1987년 11월 3일(화) 재건서면교회(전포동)에서 헌법개정위원회 제1차 회의로 모였고 제2차 회의는 1988년 3월 14일 부산시 동대신동의 애린 유스텔에서 열렸다. 제3차 회의는 1988년 4월 18-19일 서울에서 모였다. 결국「양쪽이 상반된 해석의 견해를 갖는다」는 회의록을 남기고 7명의 위원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1988. 9. 20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는 부산재건성은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총회에서「헌법개정안」이 통과됨, 따라서 지역노회와 총회신학교가 운영되게 되었음. 또한 이때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의 이념과 행동 강령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1989. 9. 19 통합총회를 구성하고 서울노회(박재준 목사), 부산노회(박성규 목사), 재건노회(최일구 목사)는 서울중앙교회당에서 합동총회를 열고, 이 총회를 제71회 정기총회로 명명하고, 총회장에 최일구 목사를선출하였다. 동 총회에서「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헌법」제정을 했다.


1938년의 신사참배 가결이전까지의 27회.
1938∼1945년 기간동안의 정기총회는 인정하지 않음.
1945∼1989년 통합까지의 44회. 그래서 27호와 44회를 합산하여71회로 결정함.
참고로 1989년 당시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측의 합동합의문서를 게재한다.

예재 총 제 89-4호 대한예수교 재건 부산 노회장 귀하

합동합의 문서의 건
표제의 건에 관하여 총회가 전권 위임한 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측과 합동에 관하여 양측 전권위원들이 수차에 걸쳐 회동한 결과 합의에 도달하여 별지 합동합의 문서에 서명날인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989년 5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 총 회 장 박 재 준
합동전권위원대표 박 성 규
총회위원 목사 박 성 규, 목사 박 재 준, 목사 신 종 구, 목사 김 정 윤, 장로 차 균 희, 장로 이 장 덕, 재건노회 목사 최 일 구, 장로 이 상 철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와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노회 합동 전권위원 합의문

과거 일제하의 수진을 위하여 투쟁하고 범죄한 한국교회의 재건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출발한 재건교회가 그동안 본의아니게 분열되며 각자의 교단으로 나오던 중 금번 하나님의 하나되라는 지상명령을 따라 하나되어야 겠다는 동일한 의지하에 양측의 전권위원이 수차 합석하여 의논한 결과 아래의 사항을 합의하였습니다.

1. 먼저 합동 후에 개혁이라는 문제에 합의함.
2. 창립총회 회원은 노회단위로 하여 서울노회 16인, 부산노회 16인, 재건교회노회 16인으로 한다.
3. 총회 회수는 과거 27회 총회를 기점으로 하여 산정토록 한다.
4. 장소와 소집일자는 양측의 대표 2인씩으로 구성하여 정하기로 한다.
5. 경비는 한 노회 30만원씩 90만원을 거출한다.
6. 창립 합동회의 개회 사회는 목사 중 연장자가 하도록 한다.

주 후 1989년 5월 16일

자료출처 : 성터교회 홈페이지 http://www.schurch.net/intro/intro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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