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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예배의 특징(A. J. de Visser)

제임스 비셔

by 김경호 진실 2010. 2. 1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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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예배의 특징

 

A. J. de Visser

trans. by Seok-Jun Yun

 

비셔 교수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신학대학(온타리오주 해밀턴)에서 교회론(Diaconiology and Ecclesiology)을 가르치고 있다.

본 글은 클라리온 Volume 56, No. 13(June 22, 2007)에 실린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보통 주일에 두 번 교회에 간다. 이것은 좋은 관습이며, 개혁교회 전통의 특징이다. 이 전통은 종교개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성경은 회중이 예배를 위해 두 번 모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개혁교회 전통에서 우리는 언제나 “가르치는 예배(teaching service : 화란어로는 leerdienst)”라고 불리는 이 오후에 다시 모이는 예배가 회중들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확신해왔다.

오후예배의 특징은 오전예배(morning service)와의 차별성에서 나타난다. 오전예배 동안 목사는 성경본문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한다. 오후예배에서 그는 더 교훈적(didactic)인 설교 즉,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요약된 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선포한다. 달리 말하자면, 오전예배에서는 복음의 ‘선포’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오후예배에서는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강조점이 있다(물론 이것들은 강조일 뿐이다 - 좋은 설교는 선포와 가르침 모두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전예배와 오후예배간의 차이점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오후예배의 특징은 오전 예배와 거의 비슷하게 되었다. 그리고 설교에 관한 한, 나는 우리의 교리문답 설교가 “정례의(regular)” 설교와 늘 차별적인 것인지에 관하여 확신할 수 없다(나중에 이 요지로 돌아오려고 한다).

이것은 발전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에 오후 예배가 그 구별된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존재이유(raison d'etre : 레종 데르트)를 잃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방어가 “두번 가는 것이 한번 가는 것보다 낫다”정도로 그친다면, 나는 곧 사람들이 “나는 더 이상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하게 될까 염려스럽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오후 예배에 주의를 기울이게 할 더 좋은 이유들을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 오후에 여러분은 다른, 그리고 같은 복음인 어떤 것을 취하지만, 더 교훈적이고 더 신앙고백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리하는 것이다.

 

역사적 발전

약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개혁 후 초창기에는 오후예배의 특성이 오전예배와 명백하게 다른 것이었다. 아주 초창기에는, 오후 예배는 공적 신앙고백 강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는 질문을 하고 회중의 아이들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 가르치는 대로 답을 해야만 했다. 목사가 교리문답에서 요약된 가르침을 설명했는데, 이 때 그는 오직 한 성경본문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모든 주일에 기술된(하이델베르그는 몇 주일 몇 주일 이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역자주) 다양한 성경본문들을 다루었다.

 

개혁교회 전통에서 교회적 삶이 발전해감에 따라, 오후 예배의 특성은 변화되었다.

 

첫째로, 아이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관습은 사라졌다(아이들은 주간에 학교에서 교리문답을 배우게 되었다).

 

둘째로, 오후 예배가 2등급의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 예전(예배의식)이 더 오전예배의 그것과 유사하도록 강화되었다.

 

셋째로, 목사의 교리문답 설교가 공적인 교리강좌라는 성격에서, 완전히 성숙한 설교(우리의 교회법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혹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요약된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에 관한 선포라는 쪽으로 발전되었다.

 

발전의 다음 단계는 예정된 것이었다 : 간혹 목사가 다른 목사와 교류하기를 원할 때면, 회중들은 오후 대신 오전에 교리문답 설교를 듣게 되었다. 더욱 더 자주 회중들은 전혀 교리문답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두 “자유 본문 설교”만이 남게 되었다.

캐나다 개혁교회는 교회법의 단어를 바꿈으로서 이러한 현실을 보아 넘겨왔다. 옛 판에서(옛 판 68) 교리문답 설교는 “오후 예배시에 통상(ordinarily)”이라고 명기되어 있음에 반하여, 현재 판(52)에는 “일반적으로(as a rule) 매주일에 한번”이라고만 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개선은 아니다.

나는 당회들이 교리문답 설교가 있든 없든, 목사가 강단에 있기만 한다면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들이 종종 그러하듯 나 자신이 brother pulpit suppliers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나는 결코 오후 예배 동안 교리문답 설교를 하라고 내게 압박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 형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가 당신을 강단에 세워둔 한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설교하세요. 우리는 거지처럼 선택권이 없으니까요!(We are beggars, so we can't be choosers!)

나는 당회들이 선택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 그들은 주일에 한번은 교리문답 설교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당회들에게, 비록 그 구문이 교회법으로부터 탈락되기는 했지만 “오후 예배시에 통상” 교리문답 설교를 듣고자 하는 자의적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자 한다.

 

교리문답 설교

관련된 문제로서, 그리고 아마도 더 어려운 것은 교리문답 설교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오후 예배의 특성을 결정짓는 유일한 가장 중요한 요소(factor)는 설교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음과 같다 : “교리문답 설교는 무엇이며, 일반(regular) 설교와 달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이점은 설교를 위한 “본문(the text)”이 교리문답으로부터 취해진다는 점이어서는 안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의견으로는 결코 목사가 “우리 본문은 제 몇 주일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만약에 그것이 완전한 설교가 되려면, 반드시 말씀의 선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른 점에서 교리문답의 본문은 또한 무시되지도 말아야 한다. 때때로 여러분은 교리문답 설교인데, 사실은 목사가 성경의 어떤 본문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것을 들을 것이다. 교리문답의 본문은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나의 의견으로는 이것은 교리문답 설교가 아니며, 단지 교리문답 설교로 가장한 일반 설교일 뿐이다. 나는 그러한 설교가 매우 좋거나, 우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나는 이런 부류의 설교들 중 멋진 설교들을 많이 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문답 설교는 아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교리문답 설교는 무엇인가? 내가 몇 가지 제안을 드릴 수 있다면, 나는 교리문답 설교가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져야만 한다고 믿는다는 점을 말할 수 있겠다.

 

첫째, 교리문답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이다. 비록 설교자가 가이드라인으로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본문을 사용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각각의 주일에 요약된 그 교리가 성경에 기초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는 다양한 성경의 본문들을 사용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더욱 상세하게 하나 혹은 두 본문들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 본문의 다양성을 언급하는데 있어 여전히 신중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주의 날의 본문(하이델베르그 각 주일 분의 본문들-역자주)을 사용해야 한다 - 그것은 설교를 위한 “본문(the text)”와 같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교리문답의 풍요로운 내용들을 사용하는 방법으로서의 사용이다. 교리문답의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국면들을 구체화하는데 있어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일궈냈다. 그들의 술어들을 개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 그들의 잘 다듬어놓은 구문들을 회중들을 훈도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가?

 

셋째, 교리문답 설교는 그 특징에 있어 목회적이다. 다시 한번, 교리문답 본문의 사용이 이것을 이루는데 있어 설교자를 도울 것이다. 교리문답은 특성에 있어 매우 목회적이고, 매우 직접적이며, 매우 개인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교리문답 설교 속에 일관되게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리문답 설교의 특징은 역사적-신앙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혼합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교리문답에 요약된 많은 교리들이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들에게만큼 오늘날에도 적실하다. 그러나 이 적실성은 증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교리문답 설교는 종교개혁 시대의 투쟁의 배경에 대한 학습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설교자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종교적 풍토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학적 추세와 논쟁점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일반 설교에서보다 더욱, 설교자는 이러한 이슈들을 연구하는 데에 시간을 들여야만 할 것이다.

 

다섯째, 교리문답은 52주일로 나눠져 있음으로 해서 다음과 같은 몇몇 복잡한 문제들을 적용하는 데에 유익이 있다. 비록 교리문답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긴 하지만, 몇 몇 문제들은 덜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고, 또한 다른 어떤 문제들은 교리문답에 간단하게도 기술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은 단지 그 문제들이 이후 시대에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한 설교 속에 몇 주일들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맹세하는 것(37주일)에 관한 문제들을 매년의 설교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36주일과 37주일은 한 설교로 묶는 것을 제안해 본다. 반면에 오늘날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한 주일분을 두 주 내지 세 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아마도 성령의 사역에 관한(20주일) 설교, 종말론적 조망, 천년왕국(22주일), 결혼의 문제(41주일), 복음과 선교(48주일)등에 관한 문제는 한 주 이상을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본다.

 

여섯째, 교리문답 설교는 교육과 훈련(instruction)에 더 강한 강조를 가진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이 강조가 설교 스타일에서도 역시 반영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설교자는 교리문답 답의 구조를 회중들과 함께 분석하고, 중요한 단어에 줄을 긋도록 하는 등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노트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설교 요약을 나눠줄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설교자는 그가 설교하는 동안 토론하기를 원하는 현대적 문제들로부터 몇몇 중요한 인용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는 질문을 찾도록 요구하고, 청중들에게 잠시동안 그에 관해 생각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는 만약 그의 메시지로 접근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 진보된 방법들(프로젝터나 파워포인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러한 도구들은 도와주는 역할 이상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종교개혁의 선조들이 오후 예배를 만들어서 회중들이 더욱 철저하게 가르침과 교훈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음 속에 본래의 의도를 잘 유지하고, 우리의 오후 예배가 구별된 가르침의 질을 가지게 하자.

 

 

                                                                                                                                       출처 :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lovereform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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