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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목사의 생애와 사상

조지 길레스피

by 김경호 진실 2010. 3. 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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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목사의 생애와 사상

 

 

서창원 목사(삼양교회, 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조지 길레스피 (George Gillespie) 목사는 정열적인 설교자요 목회자인 부친 존 길레스피 목사와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요 역사가인 패트릭심프슨(Patrick Simpson)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1613년 1월27일, 스코틀란드의 커칼디(Kirkcaldy)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조부로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습득하였고, 부친의 탁월한 설교능력을 바라보면서 자랐다. 이때에 길레스피는 부친과 외조부로부터 장로회 사상을 확고히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장차 삶이 어떻게 인도되는지를 결정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 외 그의 어린시절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또 그의 어머니에 대한 것도 거의 없으며 자신의 가정생활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길레스피목사가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이 설명해 주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가 그 이유를 밝힌다고 본다. 이미 앞에서 이 당시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살았던 시기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험난한 여정이었고, 특히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에게는 핍박으로 인하여 개인에 대한 세밀한 기록을 거의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길레스피 목사의 경우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사역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교구목사로서의 활동보다도 당시 스코틀란드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대처해 나가는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분주히 보낸 그의 생애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나이 16세 때, 길레스피는 성 앤드류스 대학에서 M. A.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그의 수학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부친이 목회하는 지역의 커칼디 노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더 공부하도록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 능력이 아주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학교의 강의 시간을 할애해 주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너무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나이에 비하여 그의 사고력이나 행동 몸가짐이 아주 조숙하였다. 따라서 그는 노회의 도움으로 신학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당시 언약도들의 뛰어난 지도자중 한사람인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의 후원하에 켄뮤어(Kenmure) 자작의 가정 목회자로 임직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루터포드 목사와의 친분관계를 맺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루터포드 목사는 종종 켄뮤어에 들려 길레스피와 담화를 나누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길레스피가 배운 것은 신학적 논쟁에서 루터포드의 빠른 두뇌회전과 논리성이었는데, 이것이 후에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때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1634년 그의 나이 21세 때에 켄뮤어 자작이 죽자 길레스피는 카실리스 공작 영내로 옮겨가 그곳에서 공작의 가족들을 돌보며 1638년까지 가정목사로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언제나 주일 설교문을 작성하였고 공작의 자녀들에게 신앙교육과 문답을 가르쳤다. 길레스피는 카실리스에 머물면서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정치적인 반박문을 작성하였다. 1627년에 출간된 이 책자는 <잉글란드의 로마교적 예식들을 향한 반박문>(A Dispute against the English Popish Ceremonies)라는 제목하에 잉글란드의 감독주의 제도를 실랄히 비판한 글이었다. 이 소책자는 화란에서 까지도 출판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글의 논리성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되자 마자 당국은 매우 당혹해 했고, 결국 추밀원에서 출판된 책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에 태웠으며, 저자에게 큰 분노를 발하였다. 더구나 이 책은 당시 찰스 왕의 하나의 통일된 종교정책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앞길은 평탄하지 못한 여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의 명확한 논리전개와 풍부한 지식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그의 대 선배인 루터포드의 것을 능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감독주의 예식들의 필요성, 그들의 편의주의적인 사고, 감독주의의 합법성 및 무관심성 등을 명확하게 비난한 것이었다.

 

이 책자의 영향은 스코틀란드 국민들의 언약정신에 입각한 장로회사상을 더욱 확고히 하며 이에 반대하는 왕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최초로 스코틀란드에서 성공회식 예배를 집전하려던 때에 제니 게데스(Jenny Geddes)라는 소녀의 의자 집어던지기에 힙입어 폭도로 번지자 급기야 1638년 2월28일에 길레스피가 나중에 와 잠시 목사로 봉직하게 될 그레이 프라이어 교회에서 <국가 언약>을 맺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자는 길레스피 목사를 일약 언약도들의 지도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젊은 사람인 줄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7세기 스코틀란드의 장로교도들은 언약도들의 학자로서 루터포드 목사를, 대외적인 정치가로서 핸더슨 목사를, 그리고 집필자로서 길레스피 목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1638년 <국가언약>이 선포된 지 두달 후인 4월 26일, 길레스피 목사는 파이프(Fife)에 있는 웨미스(Wemyss)교회 목사로 청빙되어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것은 주교의 동의없이 순수히 노회의 결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최초의 위임식이었다. 이때부터 노회에 의한 목사 위임식이관례가 되었고, 그는 본격적으로 장로교 신앙의 보호와 발전을 위하여 교회 일선에 나서게 된다. 그 해 여름에 길레스피 목사는 '스코틀란드에 강요된 예식서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들'(Reasons for which the Service Book urged upon Scotland should be refused)을 출간하였다. 4쪽 밖에 안되는 짧은 글이지만 당대의 현안문제들을 명쾌히 지적하고 반박한 뛰어난 내용이었다.

 

지역교회 목사로서의 길레스피의 사역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그가 목회한 웨미스교회 당회록 조차도 그의 사역을 기록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소지하고 있던 당회록을 분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교회 성도들의 슬픔과 고난을 함께 위로하고 헤쳐나갈 만한 역량을 키워 나가는데 있어서 웨미스에서의 그의 사역이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었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지 한 지역교회 목사가 아니었다. 스코틀란드 교회는 그를 필요로 하였다. 그의 목회자적 역량을 발산할 기회를 많이 가지기 보다는 당대의 교회와 국가 사이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양들을 돌보는 일을 많이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640년 5월에 노회가 그의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노회원들은 교인들의 단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성도들은 길레스피 목사를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성격은 대외적인 일에 사려깊이 대응하며 명쾌한 글로 늘 압도적이기는 했어도 상당히 밉살스러울 정도로 개인주의가 강한 자였다고 한다. 또 지나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같은 성격이 후에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 기간 동안 그가 작성한 <출교에 관한 지침서>(1645년 2월 3일)를 발간했을 때 너무나 지나치다는 평을 받았고, 결국 통과되지는 못하였으나 출교당할 만한 죄악들을 열거하는 선에서 매듭된 경우도 있었다.

 

길레스피 목사는 성찬시즌에 여러 교회에서 강사로 청빙받아 설교하였고, 그의 메세지를 들은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곤 하였다. 1638년 11월 스코틀란드에 제2의 종교개혁이 단행될 때 그는 총회석상에서 설교한 자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나이다'였다. 길레스피 목사는 상황을 뒤집는 혀는 가졌는데 대의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길레스피 목사의 결혼은 정확히 언제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642년경 에딘버러로 목회지를 옮기고 나서 결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의 부인의 이름은 마가렛 머레이로 부친이 아주 유명한 로버트 머레이 목사였다. 길레스피 목사는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의 장남인 로버트 길레스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고, 그 역시 복음을 전하는 신앙 때문에 죽기까지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길레스피 목사의 둘째 아들인 아키발드(Archibald)는 아버지가 죽고 난 지 8개월 후에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남편 사별후 오랫동안 과부로 지내다가 1674년 지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녀의 신앙 역시 길레스피 목사 못지않게 깊은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남편이 런던에 가 있는 동안 처음에는 혼자 남아 있다가 나중에 런던에 가서 함께 지낼 수 있있는데 이 때가 부부의 생활중 가장 행복한 기간을 보낸 것 같다. 장인에게 보낸 1645년 5월 21일 자 편지에서 길레스피목사는 "내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내가 그녀를(마가렛) 나와 함께 데려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곳에서 일년내내 보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몸이라면 나 자신의 덕을 함양하고 고귀한 기회들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이곳 런던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선호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부인과 함께 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몹시 아쉽다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 편지를 쓴 지 근 3개월 만인 8월 5일에 런던에 도착하였다.

 

1641년 그의 나이 28세 때 종교적인 문제 개선을 위하여 스코틀란드 대표로 핸더슨과 블레어, 베일리 목사와 함께 런던에 처음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길레스피 목사는 동료들과 더불어서 장로교 신앙의 확산을 위하여 사방으로 노력하였다. 이들의 노력은 장차 잉글란드에 장로교신앙을 심는 일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고, 그 결과는 2년 후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나타났다. 당시 청교도들의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이들이 원하는 신앙의 자유와 장로교 사상의 확산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스코틀란드에서 온 4명의 대표들은 런던에 머물면서 여러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알렉산더 핸더슨 목사는 <스코틀란드 교회 정치와 모범>이라는 글을 썼으며, 길레스피 목사는 장로교 정치제도를 확고히 다지는 논문인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정치 이론들>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길레스피는 장로교의 직분론, 특히 목사와 장로직의 확고한 구분과, 장로회 정치원리를 분명히 선언하였다. 사실 이 책은 장로회 원리를 처음으로 논리적으로 쓴 귀한 저술이었다. 이전까지는 실천적인 문제나 이론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렇다 할 만한 체계가 없었는데, 길레스피 목사의 글은 그러한 의미에서 큰 공헌을 남긴 것이었다.

 

길레스피 목사는 큰 명성을 얻어 가지고 다시 스코틀란드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마자 아버딘 노회는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를 그들의 목사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이 젊은 목사가 북쪽의 주된 도시의 목사로 오는 것이 자신에게 큰 영광으로 생각하여 쉽게 오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전혀 과소평가를 하지 않은 길레스피 목사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총회는 그를 성 안드류스 근처에 두기를 원하여 아버딘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길레스피 자신도 에딘버러에 있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그는 1642년 8월에 국가 언약이 선포된 에딘버러의 그레이 프라이어 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소집되어 그는 다시 한번 스코틀란드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리하여 곧 런던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양 국가 간의 종교적 통일을 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서 길레스피는 장로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스코츠(SCOTS) 대표들은 한 나라의 대표인 것을 주지시키면서 종교회의를 언제나 주도하였다. 모든 제안들이 잉글란드에서 가장신학적인 분명한 심성을 가진 자들 앞에서 통과되었다. 스코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신앙적인 문서들이 작성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저인 역할을 담당한 자가 바로 길레스피 목사였다. 토론에 있어서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웨스트민스터 문서들(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등)은 장로회 문서들이 되기가 어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한 예를 들면, 감독주의자인 존 셀덤 교수가 감독제도의 성경적타당성을 강의하고 나자 많은 회원들이 감독제도를 옹호하게 되었다. 이 때 루터포드 목사의 권고로 일어나서 뒤이어 장로회 제도의 성경적 근거를 딤전 5:17, 고전 12:28, 롬 12장 등에서 찾아 장로회 제도의 타당성을 길레스피 목사가 연설하게 되었다. 연설이 끝나고 존 셀덤 교수가 한 이야기는 길레스피의 연설이 어떠하였는지를 드러내 준다: "나의 십년간의 연구생활을 단 한 시간의 강연으로 날려 보낸 장본인이 바로 당신이오". 또 하나의 일화는 신론을 정하는 데 있어서 먼저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기도는 길레스피 목사가 인도하였다. 그의 기도가 끝나고 나서 위원들이 한 것은 그의 기도문이 신론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하여 그의 기도내용을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종교회의에 참여한 무리들 중에 가장 나이 어린 목사의 영적 깊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그의 연설은 원고가 준비된 것이 아니고 다만 성경만을 들고서 쟁쟁한 신학자들 앞에서 반대되는 논리들을 정확하게 반박하며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 갔다는 사실은 길레스피 목사의탁월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1645년에 그와 베일리 목사는 스코틀란드 교회에 교회정치 이론과 예배모범을 보내었고, 총회는 곧 교회문서로 가결시킨 것이다. 그의 동료인 베일리 목사는 그의 서신들 속에서 길레스피 목사의 탁월한 능력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공개토론에서 그처럼 논리있게 진리를 전개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를 경탄해 마지않는다. 그는 우리 종교회의에 등장한 모든 문제들을 명확히 연구하였다. 그 회의에는 학식이 뛰어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토론 석상에서 그처럼 예리하고, 분명하며, 확실히 전개할 사람은 없었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이 용감한 젊은이가 한 것처럼 합리적으로 세밀하게 요점을 분명히 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모든 논리에 편협적이 되었을 것이며 잘 진전되기를 소망했던 모든 것들이 엉망으로 진전되었을 것이다(baillie의 서신 2권, P.159)".

 

1647년에 스코틀란드 총회에 보고한 길레스피의 보고서는 당대 어느 목사의 글 보다도 최고로 명쾌한 설명이었다. 1647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종교회의에 참석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알렉산더 핸더슨 다음으로 사무엘 루터포드와 함께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반언약적인 요소들을 배격하는 일에 잉글란드 장로교도들을 촉구하였고 베일리와 함께 시편 찬양 문제를 소개하였다.

 

1647년 9월 22일 에딘버러로 돌아온 그는 High Kirk로 옮겨 목회하였고 1648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는 정치적으로 크롬웰의 등장으로 인하여 왕권이 붕괴될 위기에 있었다. 왕정 옹호주의자들이 찰스1세를 구하려는 움직임에 스코틀란드 언약도들도 이 문제로 의견이 분리되어 나누이는 아픔을 겪을 때였다. 그러나 교회는 완강히 거부했다. 찰스 1세가 1143년에 맺은 <거룩한 협약과 언약>을 진심으로 지킨다고 확신되지 않는 한 찰스를 왕으로 다시 옹립하는데 반대하였다. 그러나 하밀톤 공작을 주축으로 한 찬성론자들은 스코틀란드가 군사를 모아 지원하여 크롬웰을 몰아내면 찰스는 스코틀란드에 장로회주의를 견고히 심어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만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크롬웰과 대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8월 17일 프레스톤 전투에서 크롬웰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이 일이 있고난 후 몇개월이 안되어 찰스1세는 크롬엘에 의하여 목이 잘려죽게 되었다.

 

길레스피는 바로 왕정 옹호주의자들과 손을 잡지 않고 언약 정신에 충실할 것을 호소하였다. 1643년에 맺는 언약문제를 파기시킨 교회 정치적인 현안문제를 다루어야 할 길레스피는 결국 건강 때문에 해결도 못 보고 1648년 12월 17일, 36세의 생일을 20일 앞두고 더 이상 슬픔과 아픔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안식에 들어갔다. 길레스피 목사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에 언제나 종교개혁 원리를 굳게 붙들었고,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교회의 온전한 개혁을 위하여 몸부림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두달 전에 교회와 국가 안에 만연되어진 언약정신과 위배되는 죄악과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타락현상을 경고하는 서신을 써서 총회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타협과 불의와의 연계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내용이었다. 그는 언제나 정확한 판단과 현명한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나, 상처받은 심령을 달래준다든지 험악한 논쟁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핸더슨의 은사는 가지지 못하였다. 권징의 무기로서 그는 출교를 언제나 교회의 순결을 위한 정당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교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타협한 협약자들(왕정 옹호주의자)은 교회에서 출교되었으며, 결국 언약도들은 분열의 아픔을 맞보게 되었다. 핸더슨이 교회를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면, 길레스피는 교회를 광야로 이끈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스코틀란드의 교회에 큰 손실이었다.

 

사무엘 루터포드는 그가 병상에 있을 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위안하였다: "고통스러워 하지 말게. 믿음의 삶이 요구되느니라. 갈2:20을 묵상하게. '그럼에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1648년 9월 27일). 병문안 차 찾아온 루터포드 목사와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내가 어두움 가운데 걸으며 빛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주님의 이름을 믿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네의 환영하는 손님이 아닌가?'라고 묻는 루터포드목사에게 그는 '환영이요? 그리스도는 내가 만난 자 중에서 가장 최고로 환영하는 귀빈입니다'. '자네의 영혼은 이 모든 것들 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라는 물음에는 '나는 마음을 다하여 그 분을 사랑합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의 이 모든 대화 가운데서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속히 벗어나 임마누엘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를 열망하였다. 그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해줄까?'라고 묻는 한 친구에게 그는 "주님을 더욱 즐거워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가 부인과 나눈 최후의 말은 "당신의 안식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려 왔소. 주님 나라에 있는 자들은 복된 자들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길레스피는 자신의 고향인 커칼디교회 뜰에 장사되었고,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찰스 2세의 폭정 하에 1661년 1월 16일 그의 기념비는 철거되어 버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유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위험한 것들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후 길레스피 목사의 손자인 조지 길레스피 목사에 의하여 1745년에 커칼디 교회에 다시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의 사후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 '잡다한 질문들'이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그의 깊은 사상과 학식 및 영적 능력을 증거하는 것들이다. 그는 그의 모든 정치적인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고귀하게 움직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모든 일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추진한 자였다. 자신이 섬기는 일을 위하여서는 그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충실하게 종사한 사람이었다. 조지 길레스피 목사는 칼을 뽑아들고 그의 갑옷은 빛난채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그가 남긴 충절어린 교훈의 말씀으로 본 글을 맺고자 한다 :"나는 종종 나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이 오염된 이 나라를 주께서 정화시키실 것을 소망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작업을 시작하셨으며 그 위대한 긍휼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반역자들을 제거할 것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 언제나 위선자들이 섞여 있음을 압니다. 그거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고 문제를 야기시켜도 눈감아 줄 수 있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자들에게 충고합니다. 하나님 경외함을 신중히 생각하십시요. 성경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첫째로, 하나님의 원수들을 도와준다든지 악한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주님을 최고로 불쾌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둘째는, 그같은 죄는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또 다른 죄를 범하도록 꼬드기는 것입니다. 세째로, 그러한 죄악은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심관이 보여진 후에도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전적으로 파멸뿐임을 두려워 하십시오." (1648년 12월 15일, The ScotsWorthies,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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