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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웰 해리스 - 교회사의 영적거성 5

하웰 해리스

by 김경호 진실 2010. 3. 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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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애드워드 모건

 

 

지평서원

 

하웰 해리스 - 삶과 부흥 소명
The Life And Times of Howell Harris
 
"..그의 설교가 마을이 빠져 있는 깊은 죄를 드러내며 마치 번갯불처럼 청중의 양심에 생생하게 불을 내뿜자 그들은 심판의 날이 닥쳐온 것처럼 두려워했다. 말씀의 영향력이 너무도 강력해서 아무리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혼절할 정도였으며, 두려움으로 거리에서 주검처럼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다.." <본문51쪽>
 
"..진정한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열매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좁고, 찾는 자도 적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것을 배우는 자도 극히 드뭅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신실하십시오.." <본문276쪽>
 
"..구주와 그분의 의에 목말라하는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깨울 수만 있다면, 그 일에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충분히 즐거워할 이유입니다. 그분께 쓰임 받는 것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본문340쪽>

 

 

-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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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머리말
지은이 머리말

제1장 1735년 - 그해 여름 그의 영혼은 뜨거웠다
제2장 1736-1738년 - 복음의 씨와 함께 고통의 씨도 뿌려지다
제3장 1739년 - 휫필드와의 교분은 도타와지고, 박해의 먹구름은 짙어지다
제4장 1739, 1740년 - 폭도들의 돌팔매와 거듭되는 체포와 재판에 시달리다
제5장 1740년, 1741년 - 욱죄이는 시련과 거기 걸맞는 담대함
제6장 1742년 - '그들은 내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국교회에 남은 한 조각의 누룩. 그린에게 로우란즈를 변호하고
제7장 1739-1743년 - 교리에 눈을 뜨다. 예정론, 그리고 '주어진 믿음으로 믿었다' 논쟁도 다만 오해를 풀기 위해
제8장 1742년 - 해리스가 주도하여 빛을 본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연합회는 휫필드를 비롯한 많은 형제들의 도움과 섬김으로 지석되다
제9장 1743년 - 하나님의 신실한 종, 웨일즈의 사도 해리스, 잉글랜드 연합회를 돌아보다
제10장 1743, 1744년 - 웨일즈의 영적부흥을 편지로 사방에 널리 전하다
제11장 1744-1749년 - 결혼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깨닫는다
제12장 1746, 1747 - 애정 어린 편지로 설득하고 조언하며 격려하다
제13장 1746-1750년 - 그리스도의 인성과 죽음에 관한 교리의 견해차로 로우란즈와 결별하다
제14장 1751-1759년 - 트리페카에 세운 해리스 공동체는 천상의 마을처럼 아름다웠다
제15장 1756-1762년 - 전투중에도 설교한다는 조건으로 시민군의 대령으로 참전하다
제16장 1763-1768년 - 천상의 호흡을 나누며 대학 설립의 꿈을 키우다
제17장 1768-1770년 - 선지 학교로 발돋움하는 대학, 열방을 향한 선교의 열망
제18장 1770-1773년 - 들의 풀처럼 들의 꽃처럼, 그의 마지막은 시작보다 복되었다
제19장 높이 올라 표상이 되었던 그의 포용의 날개
제20장 해리스를 기다리는 애가, 트리페카의 들녘에 메아리치다

부록_인명색인

하웰 해리스

교회사의 큰별 하웰 해리스는 1714년 1월 23일, 영국 웨일즈의 브레콘셔 지방 트리페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부친을 읽고 해리스 자신이 표현한 대로 한때 '허영과 교만과 청춘이라는 유희의 물결'에 휩쓸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21세가 되던 해인 1735년 봄, 그는 성찬에 대한 의미를 새기던 중 '말뿐이었던 신앙고백'에 머물렀던 자신의 죄성에서 크게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옥스퍼드의 성 마리아 홀에서 공부하던 그는 고향 웨일즈의 칠흑 같은 영적 암흑을 깨우라는 소명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평신도의 신분으로, 죽음이 그를 쉬게 할 때까지 불꽃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본문을 미리 정하지도, 원고를 준비하지도 않았지만 성령이 이끄는 설교를 사자의 포효처럼 토했고 그 설교는 지금까지 국교회의 판에 받은 건성의 설교에 무감각해졌던 수많은 영혼들에게 천국의 생기를 불어넣기에 족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영혼들을 회심시켰고, 회심한 자들을 신앙 모임으로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양육했습니다. 그의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운동은 웨슬리 형제의 그것보다 4년이나 빠른 것이었고, 그의 노천 설교는 조지 휫필드의 그것보다 역시 4년이나 빠른 것이었습니다. 훗날 교회사가들은 하웰 해리스가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의 선구적 모델이었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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