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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봉 목사 2

김현봉목사

by 김경호 진실 2010. 7. 1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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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김현봉(1884-1965)8)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소천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 ?’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 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 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내기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김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소천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길옹 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안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9)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http://blog.daum.net/yongje/578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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