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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카프카즈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

선교

by 김경호 진실 2010. 8. 2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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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즈1)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

        

이광호(목사 . 철학박사)

 

 1. 서론

    우리 한국 민족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살고 있다. 해외동포들은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그들이 이주해 간 이유나 경로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재 러시아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 가운데 특히 북카프카즈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구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인 1991년 까지만 해도 우리는 카작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등 중앙 아시아 지역에 까레이스키라 불리우는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1937년 이후 스탈린에 의해 하바로프스키, 사할린, 블라디보스톡 등 러시아의 원동(遠東)지역2)에 살다가 강제이주 당한 사람들의 자손들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1999년 현재 러시아 내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원동 지역과 북카프카즈 지역에 주로 몰려 있다고 할 수 있다.3) 하지만 이러한 정보를 가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들 가운데 러시아에 속한 북카프카즈의 고려인들은 독립국가가 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과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러시아 원동지역의 동포와는 동일한 정치체제하에 있으면서도 상당부분 상이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4) 그래서 카프카즈 고려인들은 독특한 하나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내의 고려인의 수나 분포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5)

  필자는 이 글이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러므로 민족학이나 역사학적 업적을 위한 접근 보다는 기독교 선교와 그에 대한 한국교회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있다.   

 

 2. 고려인과 체첸인   

    카프카즈의 고려인들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체첸인을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슬렘들인 체첸인들은 북카프카즈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지는 민족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력한 중앙정부에 저항해 오고 있다. 주변의 다른 종족들은 체첸인들이 강력한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힘을 얻기도 하고 동시에 평화를 파괴하는 종족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런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북카프카즈에서 매우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체첸인들이 1940년대 이래 고려인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 중앙아시아의 이방인들 : 버림받은 민족들의 동병상련(同病相憐)

      카프카즈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과 체첸인은 특별한 관계이다. 고려인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서 카작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다.6) 1930년대에 당시 일본제국이 위세를 떨칠 때 소련은 일본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다. 예상대로 1937년에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위력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소련은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면서 원동지역의 고려인들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18만 명이나 되는 고려인들을 수 개월에 걸쳐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이다.7)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그들의 강제이주는 단순히 장소적 이동을 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집단 고려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당시 러시아는 이주한 고려인들을 집단농장에 수용하여 통제하며 노동을 시킨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이주정책의 목적이 생명박탈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스탈린은 고려인들을 소금기 많고 척박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기차로 실어 내다버리면 그들은 거기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여긴 것이다. 외부에 드러난 정책에 대해 피해당사자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해야만 할 대목이다. 스탈린의 예상대로 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지만 또 많은 남은 사람들은 근근히 생명을 연명해 갔다. 그 척박한 곳에서 농사를 시작하며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8)

  카스피해 서안 가까이 살던 체첸인들 또한 고려인들의 경우와 비슷한 역사적 경로를 걷게 된다. 1940년대 초 소련과 독일이 갈등상황에 놓여있을 때9) 스탈린은 체첸인들이 독일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체첸인들의 제거를 시도하게 된다. 원래 스탈린은 체첸인들은 카스피해에 수장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고위책임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있게될 부정적인 시각을 우려하여 그들을 척박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옮겨다 버리기로 한 것이다. 1942년 스탈린은 체첸민족을 척박한 카작스탄에 강제 이주시키게 된다. 그때 버림을 받게 된 체첸인들은 수십만이 넘는 많은 수였다. 그들 또한 스탈린에 의해 생고려장을 당하게 된 것이다.

  체첸인들이 척박한 땅 중앙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이미 얼굴이 다르고 습성이 다른, 그러면서 그보다 6,7년 전에 스탈린에 의해 버림을 받은 고려족이라는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체첸인들은 고려족들에 비해 농사하는 기술이 떨어졌으며 집집마다 자녀수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그 지난 6-7년 동안 농사일을 통해 서서히 기반을 잡아가고 있을 때였으므로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끌려온 체첸인들을 환대했으며 굶주리는 어린이들까지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10) 고려족들은 피부색깔이 다른 그 사람들이 구걸할 때 외면하지 않고 애써 수확한 넉넉하지 않은 곡식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들이 아프면 함께 마음아파 하며 동정을 베풀었다. 체첸인들이 카작스탄에 사는 동안 그들은 고려인들의 품꾼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동병상련(同病相憐) 하던 시대가 10년을 넘겨갈 즈음인 1953년 스탈린이 죽었다. 저들을 죽음에 내다버린 스탈린의 죽음은 새로운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2) 체첸인의 귀향과 고려족들의 동승(同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정책을 비판하였으며,11) 1956년 이후 부분적인 거주이전의 자유와 함께 강제이주자들의 고향으로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체첸인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족들은 남의 땅에 살다가 강제이주되었음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모들이 살던 원동지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강제이주 당한 그 저주의 땅에 살기가 지겨웠다. 거기다가 고려족의 은혜를 입은 체첸인들은 농삿일에 탁월한 고려인들과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 때 많은 고려족들이 체첸인들의 귀향길에 함께 동승하게 되었다.12) 이미 나름대로 어느정도 터전을 잡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냥 눌러 앉았다.

  고려인들 가운데 가장 미리 북카프카즈지역으로 간 경우는 집단이주 보다 10년 정도 앞선 1946년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족들은 카즈지역에서 끌려온 체첸인들을 통해서 카프카즈지역의 기름지고 드넓은 땅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기가 극도로 힘들었던 고려족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비밀리에 서쪽을 향했다.13) 그들에게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다.14) 그 이후로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고려족 이주가 있었으며 본격적인 이주는 1956년부터 시작되었다.   

 

    (3) 체첸인들의 귀환 이후

       체첸인들이 고향땅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곳에 이미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땅은 이미 다른 러시아인들이 소유하여 경작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살던 옛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 위해 소련에 강하게 저항했으며 집권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체첸인들은 더욱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버려진 땅에서 만난 이웃을 따라 남의 땅에 와서 예기치 못한 입장에 놓인 고려인들은 카프카즈 이곳 저곳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의 도움과 배려를 기대하는 순박한 마음으로 낯설고 물선 그 땅으로 이주해왔지만 그들의 기대는 도착 즉시 무너졌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역시 뛰어난 농삿꾼으로서 열심히 일했고 점차 근면한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체첸인들이 자기 땅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가운데 주변의 여러 민족들에게 과격한 종족으로 인식되어 가는 동안 고려인들은 근면하고 인정많은 민족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4) 현재의 체첸인과 고려족

       현재 체첸인들은 주변 종족들로부터 과격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들은 과격하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고나서부터 더욱 과격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러시아인들을 살해하고 있다. 그래서 주변 종족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두려워 한다.

   지난 1994년에서 1996년 사이 대규모 전화(戰火)에 휩싸였던 체첸 사태에서 약 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그 이후에도 산발적인 게릴라식 전투가 있었으며 필자가 그 지역을 떠난 다음날인 지난 8월 8일부터 다시 이웃 다게스탄 산악지대를 점거한 체첸군에 대해 러시아 보안군이 전투를 개시했던 것이다. 첫날 최소한 40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이 일제히 보도되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기화로 앞으로 더욱 전투가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15)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에서 체첸인들은 전투와 살상을 일삼는 과격한 종족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주변으로부터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카프카즈인들은 고려인들을 근면하고 성실한 좋은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과격한 체첸인들 조차도 고려인들에게는 여전히 매우 친절하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여전히 기억하며 고려족을 형제 민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16)   

 

    (5) 현재도 지속되는 고려인의 이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부터의 고려인 이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북카프카즈의 고려인은 약 5만 정도 이지만 이 수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카작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대거 그곳을 떠나고 있으며 그럴 채비를 하고 있다. 그들중 다수는 원동이라 불리우는 러시아 동쪽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사할린 등지로 이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상당수는 카프카즈 북부로 이주하고 있다. 어쨌거나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다수의 고려인들은 그곳을 떠나려 하고 있다.17)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이미 여러 세대를 살아오던 그 땅을 떠나려는 이유는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의 민족주의 노선과 언어사용에 원인이 있다. 카작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은 소련시대에 공용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했었다. 그러나 시골이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해 왔다. 즉 가정언어나 비공식 통용어는 자기들의 고유한 언어였던 것이다. 이제 독립국가가 된 그 나라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있으며 러시아어 대신 자기들의 고유언어를 채택하고 있다.18)

   그러므로 러시아어와 약간의 고려말밖에 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에게는 정책적 기반을 두고 전환되어가는 그러한 언어문제가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본의와 무관하게 러시아어 이외에 우즈벡어나 카작크어 등 그들의 언어를 익히든지 그곳을 떠나든지 선택을 해야만 할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 형편에 놓인 고려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현재 북카프카즈로 이주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많은 수로 늘어나게 될 전망이다.19) 이렇게 되면 북카프카즈는 고려인들의 더욱 큰 규모의 새로운 터전이 될 가능성이 많다.

 

3. 이방인들 속의 고려인

   북카프카즈 지역에서 고려인들의 위치는 다른 여타 종족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매우 특이하다.

 

   (1) 인동초 같은 고려인들

       카프카즈의 다른 여러민족들은 그전부터 살아오던 민족이었다.20) 그러나 고려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낯설고 물설은 그곳으로 그냥 흘러 들어왔던 것이다.

   고려인들에게는 구소련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국 땅이었는데 거기에서 다시 중앙아시아라고 하는 이전에는 가본적이 없는 불모지에 버리움을 당한 상처의 아픔이 있다. 그런 그들이 또다시 원 조국으로 부터는 더욱 멀어지는 생소한 카프카즈로 들어가 어렵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2) 러시아정교회와 이슬람의 배경을 가진자들 속의 이방인

       북카프카즈 지역은 오랫동안 기독교적 종교와 이슬람이 대립해 온 지역이라 할 수 있다.21) 체첸인들은 모슬렘들이다. 그리고 다게스탄인들도 모슬렘이다. 그 이외에도 카프카즈 민족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이슬람을 받아들인 민족들이 여럿 있다.

  한편 그 다양한 민족들 가운데는 희랍정교를 따르는 러시아 정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자들도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신앙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명목상 기독교적 종교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발을 내디딘 고려인들은 기독교도도 아니었으며 모슬렘도 아니었다. 고려인들은 그러한 종교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동양사상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 양 종교들을 거부했다. 그들의 종교성은 아시아의 샤마니즘과 유교적 조상숭배사상을 가진 특이한 종교였던 것이다.  

    (3) 황색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의 이방인들

       카프카즈에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눈에는 서로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그들은 피부가 희고 키도 크며 머리카락의 색깔도 우리처럼 새까맣지는 않다. 그들은 대개 고려인들과는 달리 키가 훤칠하고 얼굴빛은 희고 머리카락은 주로 노란색의 곱슬머리 사람들이다.  

  그런 지역에 동양의 키작은 생소한 사람들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주 초기의 고려인들은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종족일 수밖에 없었다. 키가 작고 안쪽으로 약간 굽은듯한 다리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황색 피부 얼굴에 코가 납작하고 검은색 직모인 머리카락을 가진 고려인들은 신비한 이방인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카프카즈 고려인의 문화

 

   (1) 음식

       . 개고기 - 고려족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지금은 고려족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북카프카즈 지역에 사는 거의 모든 종족들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 김치 - 그들은 우리와는 다소 다르지만 여전히 김치를 즐겨 먹는다. 밥을 주식으로 먹지 않고 다른 카프크즈인들 처럼 빵을 주식으로 먹으면서도 여전히 김치를 즐겨먹는 것이다.22) 과거 고려족과 함께 했던 체첸인들 가운데는 간혹 한국말을 몇마디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려족을 보면, '김치없소? 개고기 없소?'라고 말을 걸어오는 자도 있다고 한다.23)     

       . 요리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밥과 장국, 국수24) 등을 즐겨 먹는 것도 우리의 식생활과 같다.

 

   (2) 성(姓)

       고려족은 우리와 같은 성(姓)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특색은 성은 달라도 본관이 같으면 친척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동일한 성씨를 가지면 일가(一家)라고 생각하지만 본관이 같으면 더욱 가까운 친척이 된다. 필자가 카프카즈의 '모즈독'의 한 가정집에 머물었는데 그 집 주인은 우리말을 거의 알지 못하는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로 경주(慶州) 최씨였다. 그 부인은 다른 한국말은 거의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경주 최씨'라는 사실만은 또렷한 한국말로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가 경주(慶州) 이가(李家)라고 소개하자 친척을 만났다며 매우 반가워했다. 처음 어리둥절했지만 그 이유를 알고나서는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성명을 지을 때 대부분 러시아 이름을 따오고 있으나 남자 형제들의 이름에 러시아식 돌림자를 사용하는 예들도 있다.25)     

 

   (3) 언어

       고려족들 가운데 우리말을 이해하는 수는 지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간단한 말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말을 약간이라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 그 부모들을 통해서 배워 가정에서 가끔씩 사용했던 말을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즈 고려인들의 언어는 러시아어이다. 그들은 가정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고려인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더 이상 고려말을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26) 러시아말만 하게 되면 아무런 불편도 없으므로 그들에게 고려말이 주는 의미는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나이많은 노인들의 뇌리에 우리말의 잔재가 남아있를 따름이다.  

 

   (4) 민족

       그들은 그 세계안에서 고려족의 정체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우리가 그들을 두고 우리와 동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데 비해 그들은 우리에 대해 그 동질성을 덜 느끼고 있다. 즉 그들은 고려족으로서 러시아인인 것이다. 주변에 다양한 민족들이 있지만 모두 러시아 국민이듯이 그들은 러시아 국민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나이가 젊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현재의 대다수 고려인들은 철저히 현지화 되어 조국애나 모국의식이 매우 희박하다. 지금 고려인 사회의 주역이 되어있는 2세 및 3세들은 자신의 출생지를 곧 조국으로 여기고 있다.27)

 

   (5) 복식

       카프카즈 고려인들은 우리 복식을 거의 잊어버렸다. 지난 인고(忍苦)의 세월 가운데 우리의 복식을 찾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복을 입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같은 동양계인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한복의상을 어느정도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계 선교사들을 통해 한복이 새로 소개되고 있다. 축제나 명절 때가 되면 행사를 위해 우리처럼 세련된 의상은 아니라할지라도 한복을 입는 예가 점차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6) 탁월한 농삿꾼

       고려인들은 근면하고 부지런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카프카즈의 고려인들은 탁월한 농삿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고려족들은 농사에 종사한다. 과거에는 주로 벼농사28)를 지었지만 지금은 수박, 참외, 배추 등 특수 작물을 한다. 카프카즈의 사람들은 고려족 덕분에 많은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북카프카즈 지역의 사람들은 과일이나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이 고려인들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일 만큼 고려인들은 농사와 밀착되어 있다.29)

  농사는 주로 4월에서 9월까지 하는데 일해야 하는 노동인구는 대부분 몇 달씩 장기간 밭에 나가 기거 한다. 밭은 대개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졌으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을 밭에 나가 일한다.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는 집에 돌아와서 생활한다.

  

   (7) 놀이

       북카프카즈 지역에는 어른들이 즐길만한 놀이문화가 발달해 있지 않다. 취미생활이라든지 수영, 등산 같은 운동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먹고 살기에 바쁜 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고려인들 사이에는 화투놀이가 성행한다. 부모 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익힌 놀이이기 때문이다. 농사일이 없는 긴 겨울 밤에는 사람들이 모여 화투를 치며 논다. 고급종이로 된 세련된 화투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조그만 종이쪽지를 이용해 화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비단 큰 '노름'은 없을지라도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과거에 화투놀이를 좋아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 부터는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했다.30)                  

   (8) 숫자 세는 법

       고려인들이 숫자를 세는 방법은 우리와 다소 다르다. 우리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 이천, 삼천, 사천, 오천 .....을 셀 때 그들은 한천, 두천(양천), 세천, 네천, 다섯 천 이라 한다. 그리고 일만 대신에 열천 이라고 한다.

  그들은 십만, 이십만, 삼십만 ... 오십만 등의 계수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백천, 이백천, 삼백천 ... 오백천 이라 한다. 그리고 백만은 러시아어나 영어에서 처럼 그냥 '밀리온'이라 한다.

  이러한 계수 방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500,000 이라 써놓고 50 만 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500 천 이라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31) 카프카즈 고려인들이 사용하는 계수방법은 영어 등에서 Five hundred thousand를 우리말로 500 천 이라고 불러 사용하는 것이다.     

  

   (9) 노래와 춤

       카프카즈의 고려인들은 힘든 과거 역사 가운데 우리의 고유의상을 서서히 잊어갔으며 우리 고유의 노래와 춤도 젊은 세대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층에서는 흥이 나면 우리의 어깨 춤을 추기도 하고 우리의 옛 노래가락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들은 '아리랑'이나 '눈물젖은 두만강'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32)

  최근 들어 이에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카프카즈 지역에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축제, 혹은 명절이 되면 각 민족이 고유한 춤과 노래 등을 선보인다. 한국계 선교사들이 그곳에 들어가 고려인들을 접한 이래 그들은 한복의상을 하고 부채춤 등 우리의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의 의상, 춤, 노래 등은 현재 그 지역에서 인기가 최고이며 자주 다른 지역에 초청되기도 한다. 이는 원래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던 카프크즈인들에게는 특이한 동양적인 것이기에 집중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0) 가정 및 결혼에 관한 개념

       현재 카프카즈 고려인들 가운데 특히 젊은층은 타민족과의 통혼을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이에대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의 사고에는 못미친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짙다.33)   

   또한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카프카즈의 고려인들은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을 예사로 생각한다.34) 그들은 스무살이 채 되기 전에 자유롭게 결혼하고 자녀를 몇 가져도 자유롭게 이혼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자연스럽게 재혼한다. 한 사람이 서너차례 결혼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모들이나 가족 조차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비윤리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고려인과 다른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러시아인들은 이혼하고 나서도 이전 배우자를 자연스럽게 만나고 생일을 당하면 꽃다발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간다. 현재의 배우자가 함께 있다해도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다.

   그에반해 고려인들은 그점에 있어서 다른 러시아인들 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혼한 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을 꺼리고 그가 생일을 당했다해도 꽃다발을 가지고 방문하는 일은 드물다. 헉시 예기치 않은 다른 자리에서 이전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어색해 한다는 것이다. 카프카즈의 러시아인들은 고려인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고려인들은 이혼을 하면 원수가 되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한다고 한다.      

  

   (11) 러시아인들에 대한 반감과 현재의 상황

        고려인들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지난 역사 가운데 있었던 '상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현재의 피부빛깔이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멸도 한몫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을 '마우자'(馬牛子)라 지칭한다. 그것은 우리말 욕의 '개자식' 이라는 말과 버금가는 욕설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체첸인들과 동일한 마음일 것이다. 체첸인들은 아예 러시아인들을 원수 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체첸인들이 현재 러시아인들과 더욱 철천지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데 반해 고려인들은 그들과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어 가고 있다. 이는 그러만한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국인 계통의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를 통해서 신앙 안에서 관계가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고려인들의 조국인 한국의 경제적 위상을 점차 알아가면서35) 차별주의적이던 고려인들에 대한 시각이 변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그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신뢰가 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12) 고향에 대한 향수

       젊은 사람들과 40세 미만의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지 않다. 60세 이하의 사람들은 그 부모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어느정도는 고향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러나 70세 정도 이상의 노인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강하다. 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끌려갈 당시 초등학교에 들어갈 정도의 나이 이상이었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곳에 있는 짧은 기간동안 어느 부인의 70세 생신에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초대받은 몇 사람과 함께 답례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노래 불렀는데 그들의 감격해 하는 모습들을 잊을 수 없다.

     

 

5. 결론과 선교적 과제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의 촛점은 '선교'에 맞추어져 있다. 민족학이나 역사학적 관심이 일차적이지 않다. 카프카즈의 형편을 파악하고 우리 한국교회가 선교해야할 방향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카프카즈 고려족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카프카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지역이지만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어서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정학적 위치, 이슬람과 기독교가 만나는 종교문명의 충돌지역, 슬라브족과 투르크족이 대립하는 지역이다. 그 지역에 우리 동포인 고려인들이 들어가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그 곳이 선교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91년 이전 까지는 우리가 카프카즈 고려인들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가지기 어려웠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개방이 된 이후에야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에대한 소개는 정부보다 선교단체들의 역할이 오히려 컸다. 처음 대부분 선교단체들이 관심을 보인 대상은 고려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 살고있는 모슬렘들이었다. 선교사들이 카프카즈 지역의 모슬렘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고려인들의 형편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몇몇 기독교 선교단체들에서 카프카즈의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조차도 우리 정부는 그들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서 조차 그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36) 근래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정보들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체첸인들과 각별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변 카프카즈 여러 종족들에게 좋은 인정을 받고있는 고려족에게 우리 한국교회가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필자는 1999년 7월 28일부터 8월 7일 까지 러시아의 몇몇 도시와 카프카즈 지역을 방문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필자가 한주간 강의했던 '카프카즈 장로교 신학교'에는 80명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했는데 그 가운데 반 정도는 고려족 학생이었고 나머지 반은 다양한 종족의 카프카즈 러시아인들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매주 화요일 저녁시간에 있는 장년 성경공부반을 지도했는데 1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그 성경공부반 역시 러시아계와 고려인이 반반이었다. 필자는 그들의 순박한 신앙자세를 통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신앙의 연륜이 오랜 사람이라 해야 신앙연령이 겨우 5년 조금 넘을 정도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신앙은 진지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 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증거되던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을 연상하게 했다. 사람들은 항상 모여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기 원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곳에 있는 고려족을 중심으로 한 카프카즈 러시아인들을 통해 부흥의 물결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국의 건전한 교회들이 아직 복음의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그곳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이 풍성하기를 바란다.  

  그곳은 크게보아 기독교와 이슬람 지역이다. 물론 그 기독교란 러시아 정교로서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경직된 하나의 종교일 따름이다. 이슬람 또한 러시아 정부에 강하게 저항하는 과격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선교에 염두를 두고 있는 성도들이라면 이 북카프카즈 지역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체첸이나 다게스탄인들은 거의 모두가 모슬렘들이며 최근에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이슬람 국가들이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어떻게 보면 경직된 기독교적 러시아 정교회와 전체 러시아 가운데는 특별한 종교라 할 수 있는 이슬람교 사이에 동양적 샤마니즘의 경향을 가진 고려인들이 지금껏 살아왔다. 그들이 복음으로 잘 훈련된다면 그들이 경직된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며 카프카즈 모슬렘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특별히 카프카즈의 모슬렘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고려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면 진리에 무지한 그들에게도 복음의 서광이 비쳐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특별한> 모습의 고려인들이 경직된 기독교와 과격한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카프카즈 러시아인 모두에게 좋은 이웃으로 있다는 점은 복음을 증거하려는 우리에게 커다란 기득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일을 기억하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주석  

1) 카프카즈는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해발 5천미터 정도의 고산들로 이어지는 험준한 카프카즈 산맥을 중심으로 북카프카즈와 남카프카즈로 나뉘어진다. 북카프카즈는 현재 러시아에 속해 있으며, 남카프카즈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독립국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관심을 보이는 지역은   카프카즈 산맥 북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평야지대인 북카프카즈 지역이다.   

2) 고려인들은 러시아 동부지역을 '원동'이라 부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극동'에 해당하는 말이다.

3) 그 중 1995년 8월 현재 북카프카즈 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5만명 가량이 된다. (국가안전기획부가    1997년 11월에 발간한 <CIS 한인관련 자료집>에서 북카프카즈 지역 고려인을 2만 5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정확한 수치가 되지 못한다. 동자료집 p.23에서는 북카프카즈의 전체 고려인 2만 5천 명 중 체첸거주 고려인의 수를 600명이라 기술하고 있으면서 같은 자료집 p.41에서는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와 인 근지역에만도 약 15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4) [고려인과 조선족]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고려인과 조선족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 및 중앙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와 러시아 원동지역 및 중국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사이에는 상당한 선이 있다. 연변, 흑룡강 등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조선족이라 불리며 스스로도 그렇게 부른다. 러시아의 원동(극동)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도 대개 조선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라 지칭하고 지칭되면서도 우리 말로는 고려인이 아니라 조선족이라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 지역과 러시아 카프카즈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고려인이라 불리며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필자가 만난 조선족 출신 두 사람은 고려인들에 대해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이야기 한바 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했다.(①성니꼴라이, 남, 1948년 생,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 거주, ② 최덕수, 남, 1945년생, 러시아 카프카즈 '모즈독' 거주). 또한 카프 카즈 고려인들 대부분이 우리 언어를 잊고있는 반면 극동의 조선족은 여전히 우리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카프카즈 고려인들은 가정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호간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조선족 역시 현재 거의 우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간혹 우리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Patrick Johnston(Operation World, 1995, p.477)에 의하면 러시아내 고려인의 수는 107,000명이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는 1997년 11월 115,000영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외교통상부는 1999년 5월 현재  러시아 거주 우리 민족의 수를 129,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1998년도 한국 외교통상부 자료에서는  러시아내 동포현황을 125,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분포는 모스크바 5,600명, 상트 페테르부르그  3,600명, 사할린 43,000, 연해주 10,000명, 로스토프 13,000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통계 중 로스토프 13,000명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며 북카프카즈에 대한 통계는 옳지 않다)

6) 이 때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1860년대 이후 당시 조선에 기근이 심하고 살기 어려울 때와 당시의 정치행태에 반발해 러시아로 이주해 간 사람들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당시 러시아에 살던 사람들은 소위 하층민과 지식층이 섞여 있었다.  

7) 원동지역의 고려인들에 대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는, 1937년 8월 21일 스탈린과 인민위원회 위원장 몰로도프 간에 서명된 <소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중앙위원회 결의안>에 의해 결정되었다. 1937년 9월부터 11월 까지 2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한지역씩 진행되었으며, 원동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에 도달하기 까지는 평균 1개월 정도 걸렸다.

     고려인 강제이주문제를 총괄하였던 소련안보위원회 위원장 예조프가 몰로도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1937년 10월 25일 극동지역 조선인 3만 6천 4백 42가구 17만 1천 7백 81명이 1백  24대의 열차로 퇴거 완료되었으나 특별이주자 7백명 정도가 추가로 11월 초까지 이주조치될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다.(이창주, 유라시아의 고려사람들,명지대학교 출판부, 1998, p.144. 참조 - 참고로 지역별 이주자 통계를 보면 우즈베크 공화국에 1만 6천 2백 72가구 7만 6천 5백 25명, 카자크 공화국에 2만 1백 70가구 9만 5천 2백 5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이주과정에서 해외이주를 희망하는 자는 러시아를 떠나게 하고 반발하는 자들은 현장처형하는 등 조선인 극동지역 잔류를 원천 봉쇄하였다.

8) 당시 대다수의 고려인들은 농사를 지었지만 일부는 공장노동자나 광산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9) 소련은 1941년 6월 독일인 자치공화국을 해체했다.

10) 이알랴 증언, 여, 60세,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출생, 현재 카프카즈 '모즈독' 거주. (이알랴의 부모는   1963년도에 부카프카즈로 이주함)

11) 흐루시초프는 스탈린과 달리 러시아인의 일방적 우위체제를 버리고 소수민족들과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화해와 융합을 이룩해 전체 성원을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 고미라, 여, 1951년 우즈베키스탄 생. 1957년 부모들을 따라 북카프카즈로 이주함. 당시 28세의 나이로 함께 이주했던 모친 김올리가는 70세 노인으로서 자식들과 함께 예센도끼에 거주하고 있음.   

13) 최꼰스딴찐, 남, 54세, 카작스탄 출생, 1946년도 4개월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카프카즈로 오게 됨, 현재 카프카즈의 '날치크' 거주.

14) 국가안전기획부, CIS 한인관련자료집, 1997. 11, p.49. 참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공민증<公民證>에 거주지 제한이라는 도장이 찍혀 이동의 자유를 제한 받았는데, 이러한 조치는 1951년 까지 존속됨으로써 고려인들은 거주이전의 자유 박탈은 물론 거주제한 지역의 교육기돤 입학과 군대복무도 허용되지 않았다).  

15) 1999년 8월 9일 이후 몇일간 간행된 거의 모든 일간지. 참조.

16) 얼마전 체첸인들이 러시아인들이 타고 있는 버스를 납치했다. 마침 그 안에는 고려족 두 사람이 함께 타고 있었다. 버스를 납치한 체첸인들은 그 버스에 타고 있던 고려족 사람들을 보고 매우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며 돌아갈 수 있는 길 까지 배려하며 보내주었다고 한다.(미국 시민권자인 이소영 선교사 증언, 남, 1994년 5월 이래 '모즈독'을 중심으로 선교활동 중)  

17) 강벨라 증언, 여, 1950년 우즈베키스탄 생. 1998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음.

   김제냐, 남, 28세, 우즈베키스탄 출생. 1996년 북카프카즈로 이주하여 현재 '프로슐라드니'에 거주하고 있음.

18) 소련시대의 우즈벡어나 카자크어는 그 지역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소련 이전의 문헌이 나 역사서들에 그 언어로 된 문헌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우리말인 고려어는 그 렇지 못했다. 문헌연구 등을 위한 학문성 있는 언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매우 단순한 시장언어로서의 기능을 했을 따름이다.   

19)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왜냐하면 중앙아시아의 국가들과 러시아는 이미 다른 나라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이주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소련 시대에는한 나라로서 거주이전이 오히려 용이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훨씬 복잡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즈의 고려인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동세화, '모즈독' 고려인 회장 증언)  

20) 북카프카즈 지역에는 수십이 넘는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종족은 체첸, 다게스탄, 잉구쉬, 체르케스, 발카르, 오세친, 칼리크, 카라챠이, 아바르, 레즈기안, 다긴인 등이다.  

21) 이에 대해서는 북카프카즈 지역을 동서로 양분할 수 있다. 카스피해쪽의 동부지역에 있는 잉기쉬, 체첸,  다게스탄 등은 강한 모슬렘 지역이며 흑해쪽의 서부지역으로 가면 점차 이슬람 세력은 약화되고 대신  러시아정교가 강하다.

22) 국가인전기획부, CIS 한인관련 자료집, p.67. 참조.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중 거의 매일 김치를 먹는다는 사람은 전체의 63.6%, 일주일에 한번 이상 12.2%, 한달에 몇번 이상 14% 라는 통계가 나와 있다. 이를보면 전체 고려인들 가운데 90% 정도가 여전히 김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카프카즈 고려인들 가운데도 대동소이한 수치라 생각된다).

23) 동세화 증언, 남, 1945년 생, 오세찌아주 고려인 회장, 카작스탄 출생, 현재 '모즈독' 거주.

24) 고려인들은 국수를 국시라 부른다.

25) 국가안전기획부, CIS 한인관련 자료집, p.63. 참조. (형제들의 이름이 발레리<Valery>, 블라지미르<Vladimir>, 바랴<Varja>에서 처럼 이름의 첫 자에 "V"를 사용함으로써 변형된 돌림자로 쓰는 것이       다).  

26) 필자는, 여러 면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열세의 고려인들이 그곳 사람들과의 '인종차별'을 줄이기 위해 우리말을 더욱 빨리 포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7) 국가안전기획부, CIS 한인관련자료집, p.56. 참조. (1937년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현지정착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연방정부의 러시아화 정책에 물들어 왔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거의 완전한 소련인으로 동화되었다).

28) 고려인들은 벼농사를 '벳질', 즉 '볏질'이라고 한다. 고려족의 과거 중앙아시아 시절에는 주로 '벳질'에 메어 달렸었다. 고려인들의 쌀농사법 소개는 중앙아시아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할 만큼 영향력   이 컸다.    

29) '모즈독' 고려인 회장 동세화 및 여러 고려인들의 증언.

30) 이알랴 등 최근 예수를 알고 믿게 된 여러 고려인들의 증언.

31) 우리는 50만을 아라비아 숫자로 500,000이라 기록한다. 그것은 오히려 500천이 옳다. 50만을 아라비아 숫자로 쓰려면 500,000이 아니라 50,0000이라 쓰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쓰지 않고 있다.  

32) 필자가 '마이스키'에 있는 송유다의 70세 된 모친의 생일에 초대되었을 때 주 메뉴는 개고기였다. 개고기 국에다 개고기 무침 등 개고기로 만든 다양한 요리가 준비되었다. 식사후 노래를 선사할 것이 요청되었는데 그들이 요구한 노래는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   

33) 국가안전기획부, CIS 한인관련자료집, p.62. 참조. (중앙아시아의 경우, 일반화된 이민족간 혼성결혼이 고려인 사회에도 보편화되어 있다. 현재 젊은이들 가운데 고려인은 고려인과 결혼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은 48.9%에 지나지 않는다).

34) 김석환, <러시아인들의 '이상한 사랑'>1999년 8월 12일자 중앙일보 13면. 참조.

35)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한국산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을 통해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 보고 있다.

36) 이소영 선교사, 동세화 고려인 회장 증언. 이 선교사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영사관에 연락을 했을 때 영사관에서는 카프카즈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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