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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펜리 (1563-1593)

존 펜리

by 김경호 진실 2010. 10. 1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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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횃불, 존 펜리 (John Penry, 1563 - 1593)

 

존 펜리는 1563년 웨일즈 브레콘셔의 에핀트(Eppynt) 산지에서 태어났다. 브레콘에서 초기 교육을 받은 다음에 그는 캠브리지로 진학하여 1585년에 졸업을 하고, 후에는 옥스퍼드로 가서 1586년에 석사 학위를 땄다. 그는 청교도 좌파로 자처하였기에, 영국 국교회의 목회에 한번도 임명되지 못하였다. 처음에 그는 장로교 형태의 교회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후에는 분리파나 회중파의 형태를 옹호하였다.

 

그 자신의 저자물이 있다는 사실 외에 또 비밀스런 ‘마틴 마프레레이트 소논문집’(Martin Marprelate Tracts)의 출간에 연루된 것 때문에 펜리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휫기프트(John Whitgift)의 진노를 촉발시켰다. 그는 1587년에 단기간의 감옥형을 받았다. 얼마 후 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가서 건전한 장로교주의의 땅에서 안식처를 얻었다.

 

영국으로 돌아오자 펜리는 다시 체포되어 선동적인 문서의 발행을 책임 맡았다. 4년 후에 그는 국왕의 벤치 감옥에서 급히 끌려나와 허들 운반구로 성 토마스 어 워터링(Thomas a Watering)까지 끌려가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30이었다. 그는 젊은 미망인과 4명의 어린 딸들을 두고 떠난 것이다. 장녀는 그 당시 4살이었다. 그의 물질적 유산은 성경 4권 - 딸 한 사람에게 1권씩 - 뿐이었다.

 

펜리는 죽기 4년 전에 웨일즈의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인 여러분이 멸망하는 것을 봅니다. 그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내 목에 로우프를 감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나를 어떻게 끌고가든지 나는 여러분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노력합니다. 내 생명을 희생한다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바칠 생각입니다”

 

펜리는 특히 팜플렛의 저자로서 어조가 분명하였으며, 위대한 문학적 재능을 소유하였다. 그는 이런 팜플렛을 많이 발행하여, 엘리자베드 1세 여왕에게, 추밀원에, 의회에, 그리고 웨일즈 국민들에게 보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고향 웨일즈 사람들을 위해서 목사 교육을 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무지해서 부패한 땅에서 사단의 무거운 속박에 신음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펜리의 저작은 주로 영국 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 타락상을 들추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사는 복음을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를 모름으로써 지옥에 떨어진다는 확신에 동기 부여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신념이었으나, 펜리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켄터베리와 로마로부터 미소짓는 품위가 결여된 광신자요 급진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펜리와 청교도들에게 구원의 무지는 한 영혼을 영원한 파멸로 떨어지게 하는 것을 뜻하였다.

 

 

http://www.lloydjones.org/data/Puritan15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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