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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재 목사 배경인물들

이인재목사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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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인물들 (4)

 한사람의 인물이 나타나기까지는 항상 그 주변에 영향을 준 훌륭한 인격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살펴보는  귀한 사람 이인재 뒤에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1. 박 수민(朴秀敏) 영수

 밀양마산교회에는 아주 신앙이 좋은 영수가 한명 있었다. 박수민 영수였다. 그는 뒤에 밀양마산교회의 제1대 장로(1930년 장립)가 되었지만 이인재에겐 영수로서 많은 신앙의 영향을 주었다.

인재는 박수민 영수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고 기도생활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박수민 영수는 오산에 살고 있었다.  교회와의 거리가 십리나 되었지만 그 먼 거리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왕래하였다. 주일 낮 예배나 밤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까지도 빠짐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신앙은 철저했고 한결같았다.

박수민 영수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웃에게 도덕군자로 불릴 만큼 삶의 모습이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가 살던 오산리는 당시 진주 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던 곳이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집에서 잔일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웃집에는 강춘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노래 곡조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곧장 그 집으로 달려가 그 노래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것이 빨간 헝겊으로 표지가 되어 있는 무곡 찬송가(1909년도에 발행된 악보가 없는 무곡 찬송가.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이었다고 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밀양마산교회에 출석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찬송이 그를 교회로 인도하는 도구가 된 셈이다. 그가 아직 담배를 피던 시절인지라 긴 담뱃대를 허리참에 차고 교회에 나왔다. 당시 교회의 설립자 중 한사람인 박윤선 영수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손수 긴 담뱃대를 받아 초가지붕으로 된 처마 밑에다 꽂아 놓고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던 중 박수민은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예배를 마치자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피우던 담뱃대를 두 동강을 내버렸고 그 후로는 영영 담배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그는 그 후에 진주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밀양의 많은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뒷날 박수민 영수는 장로가 되었고 어느 날 이인재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1938년 2월경). “이 선생! 오늘 참으로 기쁘이! 큰 아들 평양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가는 길일세, 큰 아들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장 두 개를 받는다 카더라. 하나는 신학 졸업장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어 졸업장이라 안하나. 얼마나 영광스럽노! 이 선생 부디 예수 잘 믿으라이, 예수 믿어서 손해 보는 사람 절대 없니라”

그 큰 아들이 훗날 제일영도교회를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부산 고려신학교 교수요, 4대 교장이 되고 고신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박손혁 목사이다. 그리고 박수민 장로는 박손혁 장로 뿐만 아니라 박순용 장로(둘째 아들)와 박치덕 목사(셋째 아들, 제40대 고신 교단 총회장 역임), 그리고 박정덕 목사 (막내, 제일영도교회 담임 목사)와 같은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을 자녀로 두게되는 큰 축복 받았다.

인재는 이러한 귀한 신앙인인 박수민 장로의 영향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이 받게 되었다.


2. 차재선 전도사

1930년, 밀양마산교회 제6대 교역자로 는 차재선 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였다.

차재선 전도사는 1902년 12월 18일 경남 부산시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1925년 12월에 백영옥과 결혼하여 울산군 웅촌면에 있는 보통 공립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차재선은 전도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문필에도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은 당시 기독교계의 대변지라고 할 수 있는 성결교 기관지였던 ‘활천’지에 자주 발표되었다. 그는 한 때 ‘활천’지의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이인재는 차재선 전도사를 만나서 그의 신앙에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더욱 성장해 가게 되었다.

차재선 전도사는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투병 중 부산 사상에 있는 처가에서 요양을 했는데 그 와병 가운데서 이인재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그를 안타깝게 하였다.

그것은 차전도사가 임종이 가까울 때 쓴 것이었다.

“...이제 주님의 너무나 큰 사랑이 하늘을 덮어 누르듯 내게 덮쳐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감격스러워 견디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이인재는 차전도사의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울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치며 소리쳤다. “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종을 일찍이 불러 가시는 것입니까? 차라리 그를 살려 주시고 나를 대신 데려 가옵소서”

결국 차재선 전도사는 1933년 10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차 전도사와의 만남이었지만 이인재에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귀한 만남이었고 차전도사는 평생 그의

신앙과 생각을 지배할만한 귀한 지도자로서 기억되었다.

3. 신사참배 반대와 갈등

이인재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면서기로 충실히 공무원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이미 교회에서는 집사였다. 그의 직함은 이서기보다는 이집사로 많이 알려졌다. 새벽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면서기는 부업이고 교회 집사가 본업이라고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은 일일이 그가 대접하였다.

그의 부친은 그가 너무 교회생활에 열심을 쏟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꾸짖기까지 하였다. “너는 공무원으로 공무에 충성하여야지, 쓸데없이 너무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거 아이가?” 그때마다 이인재 집사는 겸손히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버님, 언제나 교회 일이 우선적이고 면서기 일은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잠깐이요,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면사무소에 가서 서기 일을 볼 땐 서기로서 일도 열심히 잘 처리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는 데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과부나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을 내 집안사람처럼 친절히 보살피고 편의를 다 돌보아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 날은 유독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웠다. 그는 걸어서 면사무소로 가고 있었다.  길가에 거지들이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 사람을 보고 그

냥 지나 갈 수가 없었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 걸인들에게 둘러주었다.  “날씨가 추우니 입으시오.”
걸인이 너무나 놀라워하며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가지세요. 나는 괜찮아요.” 그에게도 하나뿐인 코트였다.  그것을 벗어준 것이었다.

그는 면에서 수석서기의 자리에 올랐다. 곧 면장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신사참배였다. 1935년부터 신사참배가 학교나 공공기관에 실시가 하달(下達)되었다.  

신사참배는 일본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를 비롯한 역대 천황이나 무사들, 순국 군인의 영(靈)을 숭배하기 위하여 신사를 짓고 그 앞에 참배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처음에는 학교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실시되다가 공무원들에게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기독교계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반대하는 인사들을 처리하면서 까지 강하게 밀어부쳤다.

1937년에 와서는  누구나 이 일에 동참하도록 되었다. 면사무소 직원이면 당연히 신사참배를 해야만 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인재 집사는 자신의 신앙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단안을 내렸다. 성경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천지를 주관하시고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사와 같은 우상숭배는 자손만대에 화(禍)를 자초할 일이 뻔한데 어찌 알고도 신사 앞에 절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한번만 타협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주변 사람들은 쉽게 말했지만 그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누구든 쉽게 신사 앞에 참배하고 일제의 요구에 부응했기에 인재에게도 일제의 회유가 있었다. 이 문제만 간단히 처리해 주면 면장직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장이 되느냐, 그 자리에서 떠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는 시험이 되었다.  사실 면서기 일은 그에게 생계와 명예를 보장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결심하였다. ‘순간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된다. 영원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는 미련 없이 면 서기직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4. 평양신학교 입학

이인재는 13년간 최선을 다해 섬겼던 면서기직을 사면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38년 3월. 그는 평양으로 갔다. 평양 신학교에 들러서 입학원서와 여러 가지 시험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입하였다.  3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영어, 수학, 세계지리, 세계사 등을 공부하였다. 시험을 치루었다.  

이 때는 시대적 이유 때문인지 응시자가 많았다. 알아보니 거의 이인재 집사와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공무원직에서 물러나 신학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왔다. 합격이었다. 이때가 평양신학교로서는 최대의 응시자를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합격자 수는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경쟁률이 높았다. 그런 형편에서 합격이 되었으니 감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험난한 과정을 생각하면 어두운 면도 많았지만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명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 즐거움이 또한 컸다. 이인재는 1938년 4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출처: injaelee.org
http://www.seonjija.net/seon/?document_srl=542&mid=sub3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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