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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조사님의 생애

김인희전도사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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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조사님의 생애

(1908-1950) 

(납북) 장로교 전도사 재건교회 지도자

1. 성장 배경과 신사참배거부운동

1908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여 1926년 선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는데 1년만에 중퇴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시립국민학회 예비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 신병으로 귀향하여 요양생활을 했다. 그동안 기독교를 접하여 이를 믿고 1933년 평북 의주의 토교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38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9월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신학교가 폐교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 신사참배에 대한 일제의 압력이 점차로 강력해지자 그는 순교의 정신으로 이에 대항할 것을 결심 동지를 찾아 나선다.

그에 대한 평양지방법원에 예심종결서 (1943년) 을 보면 그는 1939년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이주원과 함께 박의흠으로부터 한상동을 중심으로한 경남지방회 신사참배거부운동 소식을 듣고 평북에서도 이를 실천할 것을 결심한 뒤 신상참배거부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선천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펴나갔다.

1940년에는 박의흠, 김형락과 함께 만주 봉천에 있는 박지연을 만나고 하얼빈에 있는 김윤섭 등 5인이,

1) 신사참배등 반계명적 정책에는 죽음으로 반항할 것.

2)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고 이를 취소하도록 할 것.

3) 말세절박한 이때에 신의 예정과 진리를 널리 세상에 전도하여 동지를 다수 획득하여 신사참배 등 반계명적 정책에 반대시켜 신의 예정인 지상천국 실현에 서로 협력할 것 등을 협의 결정했다.

또한 김형락의 집에서 이기선, 박의흠, 등과 함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상의했으며 이후 한상동, 이주원, 주기철, 방계성, 안이숙, 최봉석 등과 회합을 가지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다.

2. 옥중생활과 북한교회 재건운동

그런데 추적하던 일경에 의해 1940년 신의주에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불경, 보안법위반혐의로 15년 징역형을 언도 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1년 동안 수감되었으며,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옥중에서도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동방요배, 국기배례, 묵도 등 일체의 숭배행위를 거부하여 남보다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타협을 모르는 철저한 신앙노선은 해방 후 교회재건운동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평양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후 병보석으로 석방,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되자 그는 북한재건운동을 펼쳐 1946년 차련관교회에서 심령부흥회를 인도했다. 이 집회는 그동안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는 눈물의 집회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교회재건이 추진되어 같은 해 6월 선천의 한 미곡창고에서 재건교회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소위 '곡간교회'라는 명칭의 재건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뜨거운 열정으로 6.25 사변 전까지 이북에 설립된 재건교회는 67개에 이르렀다.

3. 월남하여 남한에서의 교회재건운동전개

그러나 해방 후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가중되었다. 특히 재건교회의 수난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1947년 그는 월남하여 이듬해 서울 태평로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태평로 재건교회"를 설립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재건교회를 지도해 나갔다. 이때 그가 내세운 재건운동 3대 방침은,

1) 기성교회 집단에서 끊어 버리고 나와야 하며.
2) 기성성전을 포기하고 새 성전을 지어 예배를 드려야 하며.
3) 기성교회신도들과 교제를 끊고 새 집단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역자가 재건교회에 돌아오려면 1년간 근신해야 하며 평신도는 6개월 이상 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재건운동의 근거로 그는 주장하기를,

1) 신사참배한 현실교회는 구원이 없으며(이와같은 교회를 마귀당이라 불렀다)
2) 신사참배한 예배당도 사용할 수 없고.
3) 신사참배한 기성교회 지도자들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과 교제하면 동참죄라 불렀다) 이처럼 철저한 신앙운동은 교계에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으며 교회분열의 불행이 뒤따르게 되었다.

6.25이전에 그의 지도하에 서울을 중심으로 원효로, 장충단, 해방촌, 영등포, 돈암동, 인천,오류동에 각각 재건교회가 설립되었고 부산의 영주동, 전남의 해남, 광주, 목포 등지에 재건교회가 설립되었다. 남한의 재건교회를 지도하던 최덕지 전도사(후에 목사가 됨) 와 함께 한국 재건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6.25 사변 때에 납북되었다.

일제시대에 천황사진을 절하지 않는다고 큰 고통을 받아 그 후에도 사진을 촬영하지 않아 현재 남아있는 그의 사진이 없다.
 

 출처:  목양신문
http://www.seonjija.net/seon/?mid=sub3_15&document_srl=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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