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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목사님 인터뷰

이병규목사

by 김경호 진실 2010. 11. 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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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 목사 인터뷰(1996년 빛의 소리 5호 발췌)

 

일제와 공산치하의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장차 오실 주님의 영광을 보며 50여 년간 목회 중, 진리의 영을 사모하시고 영광의 자유함을 이루는, 저 높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서 계시기를 소망하며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계신측 총회장직을 지내셨고 지금까지 독특하고 과감한 목회 방법으로 가는 곳마다 부흥의 물결을 일으켰고 국내외 100여개 교회를 개척 하시는 등 저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신촌 창광교회 이병규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사회자: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사회자: 목사님 지금 연세가 얼마나 되셨지요?

 

목사님: 73세입니다.

 

사회자: 제가 뵙기에는 아직도 정정 하신데요. 목회는 몇 년 하셨습니까?

 

목사님: 48년간 했습니다.

 

사회자: 50년 가깝게 하셨군요. 근 반세기이군요. 지금 시무하고 계신 창광교회 연혁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님: 1967년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29년간 시무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교세로 보면 국내․외 교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목사님: 우리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가 국내외 100여개 됩니다.

 

(미국11개, 캐나다4개, 일본3개, 호주 1개, 알마타5개, 러시아1개, 우즈베키스탄2개 등)

 

사회자: 참 많군요. 목사님 어렸을 때 신앙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까.

 

목사님: 믿지 않는 가정에서 17살 때 교회에 나갔습니다.

 

사회자: 네 그럼 고향은 어디이십니까?

 

목사님: 평북 정주군 고독면 관내동입니다. 거기서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친구를 따라서 부흥사경회 에 한 주간 참석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나 갔습니다.

 

사회자: 평북 정주가 고향이시라면 기독교 박해가 심하던 곳 아니겠습니까? 개신교 선교사인 토마스의 순교의 피가 평안도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싹트게 했는데요. 그때 다인 박해가 어느 정도였는지요.

 

목사님: 왜정 말 때 나갔기 때문에 그 때 박해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그랬는데 저 는 처음으로 나가서 잘몰랐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목사가 순교당한 순교의 피로 인해서 평 안남북도에는 교회가 많이 부흥이 되고 신앙의 불길이 많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사회자: 17살 때 부흥회에 참석해서 말씀에 사로 잡혀서 주님의 종이 되기를 헌신 하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때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부흥회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었는지요.

 

목사님: 자세히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 는 것, 또 안 믿으면 죄 값으로 지옥 가는 것, 그런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거기서 믿어야 되겠다 작정하고 우리 친구들 몇 명이 믿기로 작정해서 그날부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자: 그 때 이후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목사님: 그 이후로는 믿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려고 애를 쏙, 성경을 매일 읽고, 전도하고, 또 밤에는 예배당에 가서 자고 철야기도함네 하면서 기도 좀 하고 자기만 했지만 예배당에 늘 있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것 같네요. 지금은 오래돼서 다 잊어버렸지만.

 

사회자: 그 때 말씀을 사모하게 되셨는데요. 특별히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 때 당시?

 

목사님: 이북에서 존경하는 목사님 두 분이 계셨는데 첫째, 이기선 목사님을 많이 존경하고 성경을 이기선 목사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특별히 성경 대,소지를 신,구약성경 다해서 조직적으로 가르쳤고 또 깊은 뜻을 가르쳤고 강경한 신앙의 터 위에 강경한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희웅 목사님이 문산교회에 있었는데 김희웅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30년간 연구 한 목사님이신데 그 목사님에게 요한계시록을 많이 배웠고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 본 교회 는 문산교회에서 15리 밖에 있는데 본 교회에 배운 것을 가지고 와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특별히 명절날 많이 가르쳤습니다. 명절날 다른 아이들은 다 노는데 우리들은 모여서 성경공부를 늘 하곤 하고 명절 한번 지내면 요한계시록 한권 뗄 때도 있고 또 많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사회자: 그 이후로 월남은 6.25때 하셨는지요?

 

목사님: 네, 6.25때 피난을 와서 제주도에 갔다가 부산 고려신학교에 와서 박윤선 목사님의 철저한 성경교리, 칼빈주의 교리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사회자: 네, 그러셨군요. 만약 지금 통일이 된다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세요?

 

목사님: 교회를 세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신학생들 보고도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통일이 되면 전부 이북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준비하고 교회기금도 어떻게 하든지 다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고향이 이북이신 만큼 누구보다도 북한에 교회 세우는 일에 아주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북한에서의 뼈아픈 경험으로 주일 성수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듯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권면의 말씀 좀 해주십시오.

 

목사님: 우리는 본래 배우기를 이기선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특별히 십계명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주일날은 생명 내놓고 지켜야 되는 것을 배워서 그 배운대로 우리가 주일날을 생명 내놓고 지키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어떤 날은 주일날 잡혀간 때도 있고, 감옥에 들어간 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주일날은 생명 내놓고 지켜야 된다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오늘까지 지켜나왔습니다.

 

사회자: 네! 그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될 줄로 생각이 되는데요, 처음에 말씀해 주신 김희용, 이기선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시고 목사님이 목회의 길을 가시면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는데 주로 그분들이 주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요?

 

목사님: 이기선 목사님께서는 진리를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면 생명 내놓고 순교의 자세를 가지고 나가서 지켜야한다는 것을 배웠고 김희용 목사님은 주로 요한계시록을 가르쳤는데 예수 생활화하자, 예수 생활화하자는게 목표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가 예수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 그 다름에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 목사님이나 다른 교수들을 통해서는 교리, 장로 교리를 어떻게 하든지 세워 나가야 된다는 것, 그 다음에 아현교회에 있는 김현봉 목사님에게는 수복 이후에 배웠는데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된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었는데 얻은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고 또 중생한 영혼이 자라나야 되고 인격을 건설해 나가야 된다, 예수님과 같이 될 목표를 가지고 우리가 모든 도덕적인면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 에베소서 4장 15절에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라고 했으니까 자라나야만 된다는 것, 이런 것을 특별히 많이 배웠습니다.

 

사회자: 좋은 스승 목회자들을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이 만나신 것 같아요. 그 말씀을 이제 목회에 반영하고 계신데요, 목사님께서는 성경 전권 강해서를 집필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어떤 것들이고 또 모두 몇년에 걸친 작업으로 이루어진 것들입니까?

 

사회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 신구약 강해를 다 냈습니다. 신약은 마태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12권으로 되어 있고, 구약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1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강해서 28권으로 신구약 강해서를 다 냈는데, 이것은 성경 주석과 같은 것입니다. 20년간 걸려서 된 건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입니다.

 

사회자: 그 작업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일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힘든 것도 있고 또 기억에 남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한 토막 들려주시죠, 목사님.

 

목사님: 강해서에 있는 것을 다 말하려면 한정이 없는데 특별히 제가 집필한 강해서의 장점이라고 하면 과거 선배들에게서, 좋은 스승들에게서 바로 배운 교리 위에다가 많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깨달은 진리와 주일 설교한 것, 또 기도원 사경회도 했고 그런 체험적인 모든 면을 주로 기록했습니다.

 

사회자: 강해서 집필하시면서 신앙도 많이 굳어지셨을 것 같습니다. 은혜도 많이 받으시고요.

 

목사님: 매일 아침 새벽기도 인도하고 연세대 뒷산 기도처에서 오전 11시까지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연구하며 이렇게 하는 동안에 많은 은혜를 받고 깨달은 진리를 이 성경 강해서에 기록했습니다.

 

사회자: 부산에 계실 때 포로수용소 전도도 하셨다면서요? 그때 당시 그 상황과 경험을 통해서 목회와 신앙생활의 도움을 얻으셨을 것 같은데요. 피난오신 분으로 고향 생각과 포로들 대부분은 공산당 강요에 못이겨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때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목사님: 6.25 사변 때 포로수용소가 두 곳 있었는데 거제도 거제리라는 데 하나 있었고 또 부산 동래 거제리라고 하는 데하나 있었습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최희선 선교사와 목사님 몇 분이 전도를 약 2년간 했습니다. 그중에 처음엔 다 인민군으로 나왔으니까 믿는다고 하지 못하고 나왔지만 우리가 전도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 성경책도 많이 배부를 했고 수용소 안에 들어가서 성경공부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 석방할 때 한국에 많이 석방돼서 신학교 하고 목사된 사람도 많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전도한 보람을 느끼고 있고 여자들도 포로가 있었는데 그분들도 석방이 되어서 전도부인(전도사)으로 일하며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자: 월남하실 때 가족들도 함께 오셨습니까?

 

목사님: 월남할 때는 청년들만 월남했습니다. 우리 동생, 우리 교회 청년들, 여기 나와서 그분들 다 목사 많이 되었어요. 최낙길 목사, 임세빈 목사하며, 많이 목사가 되어서 지금 각처에서 일하고 있고, 동생은 미국 L.A 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시무하고 있는데 약 400명 정도 모입니다.

 

사회자: 월남하시기 전에 이북에서도 목회를 하셨나요?

 

목사님: 네, 이북에서 목회를 좀 했습니다. 1948년부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황해도 금산교회를 좀 보다가 그 다음에는 평북 정주군 갈산교회를 약 2년간 시무하다가 6.25사변이 나서 피난왔습니다.

 

사회자: 월남하신 후에 목사님의 첫 목회지는 어디셨습니까?

 

목사님: 부산 송덕교회에서 시무를 좀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포로수용소 전도하다가 송덕교회를 다니면서 시무한적이 있습니다.

 

사회자: 그 다음에는 어느 곳을 시무하셨는지요?

 

목사님: 1953년 정부가 수복하는 때인데 그때 이북에서 같이 신앙생활하던 안희룡 집사가 서울 창경원 옆 명륜동에 있었는데 개척교회를 하자고 해서 무턱대고 빈손 들고 올라왔는데 교회를 할 장소도 없고 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예배당 자리 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는 동안에 어떤 적산건물을 하나 발견하게 됐어요. 적산건물이라는 것은 일본인 소유인데 패전 후 다 내놓고 가서 그것을 한국 사람들이 임대해 사용하던 것인데 그 주인은 없고 다 빈집이고 해서 무조건 그 집에 가서 예배드리자, 그래서 무조건 예배드리고 있었는데 대지는 약 50평 되고 예배당은 약 40평 정도 될 것 같은 집인데 예배를 몇주간 드리며 수리하고 있었는데 임대해서 사용하던 한국인 주인이 나타나서 왜 남의 집에 벽을 허물면서 있느냐, 그래서 우리는 당신의 집인 줄 몰랐는데 예배당하려고 한다, 당신의 요구대로 사라면 사고 나가라면 나갈 것이니 요구가 무엇이냐고 했더니 사라는 것이예요. 권리금만 얼마 내라고 해서 사방에서 얻어다가 그 돈을 주고 사서 임대차 계약을 우리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적산건물이고 우리 건물은 아니었어요. 그때 교회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수복하는 단계여서 부산에 피난갔던 사람들이 올라오는 바람에 교회가 많이 부흥이 되었어요. 한 1년 동안에 200여명이 모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사고가 생겼는데 그 예배당을 불하맡으라고 했습니다. 불하 맡겠다고 신청을 했는데 조사 나온 사람을 우리가 대접을 좀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조사 나온 사람을 그냥 보냈더니 이 사람들이 불하 맡는 날을 우리에게 통지를 안 해주었어요. 그 바람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입찰하는 날짜가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가서 물어보니까 당신들이 오지 않았지 않느냐, 우리는 몰라서 안 왔다, 왜 통지를 안 해주느냐, 관제구법에는 개인에게 통지해 주라는 법이 없고 7일 전에 신문에 공고하라는 법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그럼 어디에 공고냈느냐, 평화신문에 공고했다는 거예요. 그럼 7일 전에 했느냐 했더니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공개 입찰에서 다른 사람이 많은 돈을 써내서 그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불하 맡은 사람이 와서 집을 내라 우리가 산 것이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기도하고, 철야기도하고 애를 쓰는 가운데 그 7일 전 공고한 신문을 한번 찾아보자, 그래서 평화신문사에 가서 몇 달치 신문을 다 뒤지고, 그때 김성칠 집사가 특별히 많이 노력을 해서 찾아냈어요. 광고를 보니 6일 전에 했어요. 관제구에서는 7일 전에 하라고 법에 되어 있는데 6일 전에 했으니 무효다, 거기서는 7일 전에 신문사에 보냈는데 신문사에서 두었다가 냈기 때문에 6일 전에 낸 것이다, 우리측 변호사가 법에 7일 전에 공고하라고 했느냐, 보내라고 했느냐, 그래서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를 했습니다. 값은 먼젓번 사람이 기록한 그 값으로 사야 한다고 해서 많은 돈을 주고 불하를 맡았습니다. 그 후에 그 옆집도 사서 예배당을 짓고 많이 성장했어요.

 

사회자: 그리고 부임하신 교회가 지금의 창광교회인가요? 부임하실 때와 지금의 창광교회를 비교하신다면 어떠신지요?

 

목사님: 부임할 때는 예배당도 없고 교인이 약 4~500명 쯤 됐는데 지금은 예배당도 좋은 곳에 짓고 예배당도 서너 번 증축을 했는데 예배당의 대지가 약 600평 정도 됩니다. 예배장소, 지하실, 2층, 3층 다해서 건평수는 1000평 정도 됩니다.

 

사회자: 많은 축복을 부어 주셨군요. 목자는 교회가 시험들었을 때, 또 영적 침체의 늪에 빠졌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온전히 맡긴다면 오히려 그 어려움을 봉해서 죄를 제거시키고 양심을 씻고 돋는 해처럼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빛을 바라는 목자로 만들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회에서 가장 큰 고비였다면 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 목회에서 고비라고 하면 명륜교회에서 예배당 불하맡는 것이 잘못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서 그 사람이 매매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예배당 내라고 할 때 그때가 제일 고비였던 것 같아요. 교인들이 다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고, 앞이 캄캄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고, 그 후에도 몇 번 큰 시험들이 명륜교회나 창광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있었는데 시험이 들어올 때마다 의지하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고, 무슨 방법으로 시험을 이겨야 될까 연구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해주셔야지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성경말씀대로만 바로 걸어나가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는데, 인간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오늘까지 붙들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사회자: 온전히 맡길 때 모든 것을 순조롭게 해결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늘 만나셨군요.

 

목사님: 온전히 맡기는 것, 회개하는 것, 말씀대로 바로 걸어가는 것, 세 가지예요.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다 해주십니다.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자: 기도 생활 때문에 곤혹을 치루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셨다는데요,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들어보기로 하지요.

 

 

[출처] 이병규 목사 인터뷰(1996년)|작성자 com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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