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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임즈

윌리암 에임스

by 김경호 진실 2010. 12. 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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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임즈(라틴어로는 “Amesius"로 표기됨)는 강력한 청교도주의의 중심지였던 써포크(Suffolk)의 입스위치(Ipswitch)에서 1576년에 태어났다. 에임즈의 아버지인 동명의 윌리엄은 청교도에 온정적 태도를 지닌 부유한 상인이었다. 어머니 조안 스넬링은 아메리카의 신세계의 플리머스 기지를 발견하는데 기여한 가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가 모두 에임즈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외삼촌이자 복스포드 근교의 청교도였던 로버트 스넬링이 그를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에임즈는 그 시대와 환경 속의 강력한 청교도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에임즈의 외삼촌은 조카를 위한 교육비를 아끼지 않고, 그를 1594년에 순수한 청교도주의와 라미스트 철학으로 잘 알려진 케임브리지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로 진학시켰다. 에임즈는 매우 빠르게 그의 학습 능력을 보여주었고, 1601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으며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됨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에임즈는 윌리엄 퍼킨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는(rousing preaching)" 설교를 통해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였다.깊은 영적 변화 이후에 에임즈는 이렇게 선언했다: “어떤 사람이 외형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그는 아직 신실한 마음을 지닌 그리스도인
(a sincere- sartsd C ersti- )이 아닐 수도 있다” 그『인간적인 의식들(ceremoniesa에 대한 새로운 탄원』(1633, 1:131).신실한 심령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이자 참 신학자가 되는 일은 에임즈의 평생의 관심사였는데, 이는 구원받고 순종하는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경건을 표현하고자 하는 실천적 기독교 자체를 나타내준다.

에임즈는 아주 빠르게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도덕적 나침반이자 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 역할은 오래 가지 못했다. 1604년의 햄턴 코트 컨퍼런스에서 나온 제임스 왕의 칙령은 대학에서 성공회 체제를 비판하는 어떤 청교도적 활동도 압제하겠다는 왕의 확신을 강화시킨 것이다. 청교도 입장의 주창자들은 곧 그들의 학위를 강탈당하고 해고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청교도주의를 미워하던 발렌틴 캐리를 그보다 훨씬 나은 자격을 지니고 있던 에임즈 대신 학장으로 임명한 1609년에 절정에 달했다. 1609년 12월 21일 에임즈가 성토마스 기념일(케임브리지가 아주 소란스러워지는 연중 축제일)에 신랄한 설교를 전하며 도박 등을 책망했을 때, 대학 권력자들은 그를 구류하고 학문적 위치와 교회적 직위를 정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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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네커 대학에서 11년째 재직 중일 때, 에임즈는 대학 전체의 “청교도화”를 시도했던 “박식한 박사”(Learned Doctor)로 알려졌다. 에임즈가 느끼기에 프라네커 대학이 교리적으로는 정통적이었지만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 단체들은 실천에 있어서 충분히 개혁주의적이지 못했다. 특히 에임즈가 보기에 교수진은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에 의존하였고 부적절하게 인간의 책임과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인간 의지의 작용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에임즈는 대학내 그의 집에 학생들이 기숙하는 “칼리지” 형태의 모임을 다시 한번 조직해서, 개인지도를 할 수 있는 기간이나 강의나 다양한 신학토론을 벌일 때 이를 활용했다. 학장으로서 그는 경건을 증진시키고 안식일 준수를 강력히 추진했고 성탄절과 부활절 연휴를 단축시켰으며 학생들의 훈련을 더욱 엄하게 했다. 그의 노력은 소위 “1620년대의 종교개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프라네커 시절 동안 강의와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에임즈는 강한 반(反)감독주의 혹은 반국가교회주의와 반(反)알미니안주의를 고수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기여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통합된 체계로서 신학과 윤리학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두 위대한 작품인 『신학의 정수』와 『양심론』을 저술했다. 그의 신학과 윤리학의 체계에서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배운 라미스트의 철학과 방법론이 통합되고 있다. 16세기 개혁주의 프랑스 철학자인 페트루스 라무스(1515~1572)에 의해 발전된 라미즘(Ramism)은, 당대에 삶과 사상 및 지식과 실천 그리고 종교적 삶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학과 윤리학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breach)으로 특징지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기교적 궤변법을 교정하려고 했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 에임즈는 자신의 명성과 더불어 그가 가르쳤던 학문기관 또한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전 유럽에서 찾아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그의 학생은 요하네스 칵세이우스(역자주: 코케이우스로 표기하기도 함. Johannes Cocceius)였는데, 훗날 에임즈의 사상을 뛰어넘는 언약신학의 발전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서 잘 만족하며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에임즈도 만족할 수 없었다. 일부 학생들과 교수들은 에임즈의 노력을 더 깊이있고 발전된 개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요하네스 마코비우스(Maccovius)가 이끄는 교수들의 파벌은 에임즈의 노력들을 방해하고 거부했다. 게다가 에임즈와 룹베르투스 및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동료였던 마코비우스 사이의 계속되는 논쟁은 프라네커의 지적인 분위기를 오염시켰고, 프리스랜드의 습한 바다 공기는 에임즈의 건강을 해쳤다. 이같은 문제들은 그의 아내가 동향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하던 마음과 더불어 에임즈로 하여금 사역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찾고자 하는 결심을 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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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하기 얼마전에 에임즈는 뉴잉글랜드의 그의 친구였던 존 윈드롭(John Winthrop)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계 예비하신 또다른 “신세계”가 있었다. 에임즈가 소천한지 4년 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청교도들의 거주지인 매사추세츠의 살렘으로 떠났다. 에임즈의 가족들은 그의 모든 장서를 가지고 갔는데, 이 책들은 비록 후대에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기초를 놓았다.

에임즈의 영향력은 아마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의 『신학의 정수』는 하버드 대학 학생들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고 지역 전체에 걸쳐서 자주 읽혀지고 인용되었다. 교회 문제들에 대한 그의 글은 뉴잉글랜드의 비분리주의적 회중주의의 기초를 놓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사추세츠 만 지역의 회중교회들이 영국 국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1648년의 케임브리지 강령은 에임즈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에임즈의 라미즘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코튼 마더는 에임즈를 “심원하고 고결하며 예리하고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천상의 박사”라고 불렀다.

에임즈의 영향력은 화란에서도 매우 컸는데, 특히 그가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한 사실로인해 더욱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화란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는 특히 그가 결의론(casuistry)을 발전시켜서 구체적인 “양심의 사례들(cases of conscience)”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룬 저서와 관련이 있다. 우트레흐트(Utrecht) 대학의 교수이며 화란의 후대 종교개혁(Dutch Further Reformation)의 지도자였던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는 에임즈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다른 저ht)화란의 신학자인 페트루스 반 마스트리히트(Petrus vat Mastricht)도 에임즈에게 크게 의존했고 특히 언약신학과 결의론에서 더욱 그러했다.

에임즈가 쓴 대부분의 책은 화란에서도 출판되었고 특히 라틴어로 쓰인 책들은 국제적으로도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신학의 정수』와 『양심론』은 화란어로 번역되었고 17세기에만 최소한 네 번이상 재인쇄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임즈는 퍼킨스의 가장 중요한 제자이자 계승자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개인적 영향력이 매우 약했다. 에임즈의 주요 작품들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17세기 내내 잉글랜드 칼빈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신학의 정수』는 청교도들이 특히 높이 평가한 작품이었다. 토마스 굳윈은 “에임즈 박사를 존경하고 그의 『신학의 정수』는 세상에서 성경 바로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책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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