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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튼

존 코튼

by 김경호 진실 2010. 12. 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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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튼은 “뉴잉글랜드의 창시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변호사인 롤란드 카튼과 메리 헐버트 사이에서 1584년 12월 4일에 더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청교도주의에 온정과 공감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카튼은 케임브리지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13세의 나이에 입학해서 1603년에 학사로 졸업했다. 그러나 여전히 회심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후일 윌리엄 퍼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기뻐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퍼킨스의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강력한 설교가 “[카튼의] 마음을 포위해서 옴짝달싹못하도록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카튼은 보다 청교도 지향적이었던 임매뉴얼 칼리지의 펠로우가 되었다. 그곳에서 로렌스 채더튼의 지도를 받으며 1606년에는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사무엘 휘팅에 따르면 그후 6년 동안 카튼은 “수석 강사 및 학장 겸 요리문답교사”였고 “많은 학생들의 부지런한 개인지도선생”이었다. 이 시절 동안 카튼은 리차드 십스의 목회사역으로 인해 회심하기에 이르렀다. 십스의 설교들은 카튼으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 위에 두기보다는 스스로의 지적인 역량위에 세우려고해왔음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십스의 중생에 관한 설교들을 통해서 카튼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카튼의 회심은 사적으로도 아울러 공적으로도 이로 인한 모종의 결과들을 낳았는데, 즉, 그로 하여금 과거에 강단 위에서 청중을 향해 사용했던 고상하고 점잖은 스타일을 더 이상 고수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선천적인 성향을 거부하면

서까지 그는 퍼킨스의 청교도적인 간명한 스타일의 설교 방법(plain style preaching)을 지향해서 받아들였다.

카튼은 1610년에 임매뉴얼 칼리지에서 신학사를 받았고, 그해말에 링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612년에는 27세의 나이로 링컨샤이어의 보스톤에 있던 성보톨프의 대교구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21년간 머물렀다. 카튼 마더에 따르면 존 카튼은 성보톨프교회에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스 호록스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날에 믿음의 충만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카튼 마더는 그날 존 카튼이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받았으며 효과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은혜와 생명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평생을 기쁨으로 그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는 후일 종종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날 내가 두 번 결혼하도록 만드셨다!’라고 말하도록 이끌었다” (Magnalia,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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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튼은 보스톤에서 매우 유명했다. 교회적인 일과 민사적인 문제들 모두에 있어 그의 영향력은 당시의 뉴잉글랜드의 다른 어떤 목사보다 아마 가장 컸을 것이다. 역사학자인 윌리엄 허바드에 따르면, “그가 강단에 무엇을 전하든, 만일 그것이 민사적인 내용이라면 법정의 지시에 반영되었고 교회적인 관련사라면 교회의 행습으로 자리잡았다.” 버논 패링톤은 이렇게 말했다: “이민세대가 그 자녀들에게 남겨준 뉴잉글랜드는 다른 어떤 목회자보다도 존 카튼의 빚는 손길의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남긴 곳이었다” (『미국사상의 주요 흐름』, 27쪽).

카튼은 그 시대의 세가지 주요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인 논쟁들에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그는 앤 허친슨을 소용돌이 속으로 끌여들였던 율법폐기론자 논쟁에서 중심에 서있었다. 카튼을 추종했던 허친슨은, 회심에 있어서 은총과 하나님의 주권의 우선성을 강조한 카튼의 견해를 고수할 것을 신세계와 보스톤에 주장했다. 이에 그녀는 모든 다른 뉴잉글랜드의 목사들(그곳에 갓 도착한 자신의 매부인 존 휠라이트를 제외한)을 은혜언약 대신 행위언약을 설교한 죄목으로 고소했다. 즉각적 계시(immediate revelation)의 교리를 열렬히 받아들이면서 그녀는 믿음의 확신이 선행의 증거보다는 성령이 즉각적으로 증언하는 내적 감정(inner feelings)에 의해 경험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녀는 성화의 필요성과 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의 가치를 경시하였다. 이 범상치 않은 여인은 많은 신자들을 자신의 교제권내로 끌어들였고 카튼과 다른 목사들 사이에 불화를 유발시켰다. 일부 목사들과 특히 토마스 셰퍼드 같은 경우는 카튼의 신학적 정통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튼은 처음에는 허친슨과 그녀의 몇몇 생각들,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의 증거로서의 성화와 회심의 준비론(preparationism)을 목회자들이 강조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지지하는 듯 했다. 카튼은 분명 이 두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뉴잉글랜드 목회자들이 이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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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튼은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으로 인해서도 동일한 명성을 떨쳤다. 예를 들면 그의 교구민 중 한 명이 카튼의 설교가 너무 음울하거나 지루하다고 훈계했을 때, 카튼이 “형제여, 당신의 말이 둘다 맞을지도 모르오. 당신의 바람대로 달라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오”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겸손은 많은 충돌 속에서도 카튼을 지켜주었다. 아울러 이는 동료들과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카튼이 뉴잉글랜드의 나아갈 길을 잘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어린이 세례의 근거들과 목적들』(1647)과 『복음적 예전으로서 시편을 노래함』(1646)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버드대학의 감독관이든 혹은 당대의 뉴잉글랜드의 문제들에 대해 글을 쓴 작가로서든지, 카튼은 지도자 중의 지도자였고 그의 견해를 반대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재고해보아야 할 정도로 커다란 힘을 가진 존재였다.

카튼은 1652년 12월 2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일교회에 남아있었다. 그의 생전 마지막 순간에 존 윌슨이 옆에 있었다. 윌슨은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동료에게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데려가실 것을 기도했다. 카튼은 이렇게 대답했다: “형제여, 그분은 이미 그렇게 하셨다네.” 그리고 그는 자녀들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불변의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언약에 맡기고, 홀로 있기를 청했다. 몇 시간 후 그는 소천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사라(그후 리차드 마더와 결혼한)와 그의 자녀들의 후일의 삶은 다음과 같다. 아들 가운데 한명인 시본(Seaborn, 미국으로 이주하는 항해중에 태어났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뉴햄프셔의 햄톤의 목사가 되어 26년간 봉직했다. 또 다른 아들인 존(주니어)은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톤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인디안들을 대상으로 설교했고 존 엘리어트의 성경번역을 개정했다. 딸인 마리아는 인크리즈 마더와 결혼했고 카튼 마더를 낳았다. 저명한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이었던 인크리즈 마더와 카튼 마더는 존 카튼의 망토(역자주: 권위와 명성을 상징하는)를 물려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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