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구절은 원래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1장을 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파벌로 나눠져서는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폴로파다”하는

 말들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또 개중에는 세상의 지혜로 충만하여 스스로 교만해져서는 복음의 단순함을 경멸하고

 아폴로의 복음 전파 방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에게는 비둘기의 순수함과 함께 뱀의 지혜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결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본문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결론은 진실로 대사도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그 빛나는 가치가 바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세상 끝날까지 잊지 말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중점으로 다루겠습니다.

첫째,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하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다른 것들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해야 하는 지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말씀을 실제적인 삶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여러분들에게

몇 마디 권고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으로, 또 구주로 불리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죄의 능력과 죄악으로부터 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여호수아처럼(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이끌어내어

하늘 나라라는 가나안으로, 약속된 유업의 땅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실 선지자로 속죄를 담당하실 제사장으로,

그리고 우리를 다스리실 왕으로 성령님께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가 저주를 받았음은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신 21:23)하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고난을 받으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선언하신 선고의 결과입니다.

그의 죄는 우리 모두에게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분의 신성한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에덴 동산의 주인으로 세우셨을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두고 "그것이 좋아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만 말씀하셨을 뿐,

인간들이 자기 의지대로 금지된 열매를 먹으려고 했을 때 억지로 말리진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엄정하시면서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인간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시자 마자, 보십시오, 그들에게 구주를 계시해 주십니다.

‘여자의 씨’ 말입니다.

그분은 때가 되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또 율법에 명시된 법들을 모두 준수하심으로

우리가 범한 율법을 완성하고 영원한 의를 이루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법칙을 주셔서,

마귀의 능력을 분쇄하고 그를 통하여 인간이 처음 지음받았던 그때보다

더 나은 상태로 회복하게 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음을 의미하는 경건의 신비는 분명 성경적인 계시입니다.

이 세상의 신에 의해 눈이 가리워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즉각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자,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응시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시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손수 창조한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꼭 그 만큼의 선과 악을 그들에게 물려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안에 선함밖에 없다면, 그분은 처음 인간을 지으실 때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모습이나 오염된 것들을 집어넣지 않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그분은 오직 자신처럼 완벽하고 온전하며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존재로 만들었을 것임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간은 창조주의 손으로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 짐승을 혼합하여 놓은 듯한, 이 벌거벗고 눈멀고 가련한 존재를 만들어 놓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분명 원래 모습에서 타락한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인류 전체는 그에 대한 응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으로 혼란과 무질서를 가지고 들어온 것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들도,

그래서 죄를 지을 기회조차 없는 이들도 이 죄를 전가받게 되었습니다.

마치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온 땅을 덮듯이, 처음의 그 죄악들이 온 인류를 뒤덮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는 이 교리를 이 세상의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말로 치부됩니다.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무고한 인간들에게 죄를 전가시키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 맞는 겁니까?”

 

그렇지만 누가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증명해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굳이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놓으신 거라면 잠자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합당해 보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러나 이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한마디 말로 깨끗이 마무리 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죄가 전가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전가시킨 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며, 그분은 인간의 원죄와는 무관한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여자의 씨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 치리자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과,

그분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지에 관해 예언되어 있던 선지자들의 예언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함 가운데서 처형을 당하셨지만,

 능력으로 부활하신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또 전파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오직 그분만을 알기로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알다’라는 단어를 그저 역사적인 지식을 취하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대적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게 못박혔다더라,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그건 가이사가 로마에서 그의 친구들에 의해 참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본문에서 그분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인정한다, 혹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12)라고 하셨을 때의

‘알다’와 그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분을 안다고 함은, 그분과 그분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즉 그분을 우리의 선지자로, 대제사장으로, 또 왕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구원을 얻고 더불어 그분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것 말입니다.

즉, 그분의 십자가형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능력을 힘입어 우리 스스로를 세상에 대하여 못박아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요"(빌 3:8).

 

사도 바울은 이 지식에 너무도 심취해서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그 사실을 공부하고, 자신의 삶에 있어 지표와 원칙으로 삼으며,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해야

하는 지 그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곧 영생입니다.

 이것 외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어떤 이들은 세상적 지식이 많다는 것에 기꺼워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외국어를 서너 개쯤 할 줄 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여기저기 자랑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과 천사들의 말을 동시에 할 줄 안다 할지라도,

심지어 별들의 숫자를 다 알고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부를 수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박히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적 지식은 우리에게 다소간의 명예를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멸하는 불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그분은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계 13:8)이십니다.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문 외의 다른 문을 통하여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바벨탑을 쌓아올려서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우쭐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사람을 정화시키고 지혜롭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에서는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일 지라도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학식 있는 선생일지라도 그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는 결단코 하나님께 받아들여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철학이란 결국 우스갯소리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지혜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음의 범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것들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가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합니다.

학식이나 배움에 관한한 그는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였고, 유대교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세상의 지식을 섭렵했으며,

언어나 수사학 혹은 문장력에서 당대의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되고난 후 그는 이전의 지식에 관하여,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빌 3:8)

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도 식자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박히심 외에는 알지 않기도 했노라고 단언해 버렸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담겨 있고,

 그리하여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할만큼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성경은 펴보지도 않고, 그저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후일 자신들의 지식이라는 것이 피레네산맥에 서식하는 새가 흘리고 간 깃털 하나만한 유익도

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몹시 당황할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있고,

어떤 일에 관해 도덕적 합리성 따위를 논할 수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한 결국 바보임이 드러날 자들이 허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구속의 위대한 사역과, 우리 죄를 속죄하셨다는 진리,

그리고 행위의 언약을 온전히 충족시킨 것에 관하여,

또 새로운 삶의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완전히 반푼이나 다름없기 일쑤입니다.

결국 그들의 학문이라는 것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

헛똑똑이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들의 혼을 취해가시면 그들은 어찌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담대함을 지닐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이 헛똑똑이들은 그 자리에서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세상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 그들은, 세상에서 무식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우편까지 높여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을 보면서 또 얼마나 큰 슬픔을 느끼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거룩한 승리 앞에서 이렇게 외칠 지도 모릅니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고전 1:20).

 

사족을 조금 달자면, 저는 지금 인간의 학문을 저주하거나 비난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아래 모든 지식들을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앎들이 결국은 헛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당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박히심에 대한 좀 더 깊은 지식을 얻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이러한 지식에 탐닉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를 반대하여 저질렀던

 큰 악행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학문이나 진리에 대한 무지가 아니었다면, 그 수많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그렇게 멀리 하려 했겠습니까?

인간의 지혜나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과학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속에

 부패함이 없었다면, 왜 그들이 그토록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이 지식이 없으면 우리의 선한 행위나 인격은 그분께 받아들여 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자라고 증거를 받았으니..."(히 11:4).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혹은 그분을 아는 실질적인 지식이 있어야,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의 희생제가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향기로운 향으로

바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갈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 기도를 올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거룩하신 그분 앞으로 나아가 기도를 올릴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거룩한 속죄, 온전한 희생제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없이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나답과 아비후의 죄를 범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상한 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가 그분 앞에서 죽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리의 헌신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인간들에게 베푸는 자선도 그분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가난한 자들을 먹일지라도,

 그분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 넌지시 던져놓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많이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이를 통해 우리는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를 향한 그분을 아는 참 지식이 있어서 행한 선행들만이,

 우리가 마지막 날에 가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선 행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실제적인 지식이 없다면,

경건이나 자비를 드러내는 행위들, 고상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결코

그분께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이성적이라고 하는 현학자들은 이것과 전혀 다른 행동의 원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두고, 어떤 일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따져서

시민으로서의 도덕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악다구니를 써댑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눈 먼 자들입니다.

볼 수 있는 척 해도 기실 그들은 맹인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의를 정해놓고 살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 하나님의 의에는 완전히 무지한 것입니다.

 

물론, 자비는 우리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행동의 원칙으로서의 도덕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히 이루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덕적이고 예의 바른 행동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믿는 믿음, 혹은 그분을 아는 실제적인 지식에 기인한

새로운 본성의 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께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는 지속되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께 기도를 하든 아니면 인간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든지 간에,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야 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야

 하며, 가장 일상적인 행동들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원칙을 따라 산다면, 즉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면,

우리가 하는 가장 작은 행위들도 그분께 받아들여지는 희생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을 무시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경배는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영적인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쳐놓은 그물의 희생제가 되고 맙니다.

행위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행위들은 결코 그분께 받아들여 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한 죄인들이 돼놔서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기준을 따라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타락을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회복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오직 그분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하여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우리 행위에 대하여 사도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을

여러분들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라는 촉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마음속으로 이렇게 맹세하십시오.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선 가만히 앉아서 이리저리 따져보고 난 뒤,

이 지식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공부해볼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그 때 이 지식을 공부의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유일한 목적으로 삼으며,

 또 진정 알아야할 한 가지 사실로 시인하십시오.

그리하면 세상의 하찮은 지식들은 이 참된 지식을 쫓는 열정에

 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못배운 사람일 지라도 이것까지 못배워선 안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있다면

다른 건 하나도 몰라도 여러분은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100% 갖춘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이 없다면, 다른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여러분은 결국 영원한 비극을 맞이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결정을 공언하고 실행에 옮길 때,

친구들이 업신여길 지라도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 앞서서 그런 모욕을 이미 감내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가장 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결심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박해를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박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증명할 기회이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신실한 그리스도의 군사인지 아닌지 스스로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복된 주님을 담대히 시인하여서,

이 완악하고 비뚤어진 세대에 태양처럼 밝은 빛을 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멀리서 따르는 데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늘 그분의 제자임을 드러내고,

실로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이 우리를 감쌀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멸시하던 무리들 위로 산들이 날아와 그들을 덮치고,

 그들이 선 자리가 언덕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면전에까지 높여져서,

저 하늘에서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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