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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조지 휫필드)

조지 휫필드

by 김경호 진실 2011. 5.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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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조지 휫필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7-28)

제가 믿고 있는 바도 그렇거니와 일반적으로도 나쁜 행위들은 좋은 법을 탄생시키기 마련입니다. 이 법칙을 이 세상 모든 일들과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 법칙과 관련시킬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쁜 행위들이나 불건전함, 듣기 거북한 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그라들어서 결국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나온 가장 멋있는 설교들의 재료가 된 예가 많습니다. 혹자는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능력을 지니고 오셨으므로, 신성한 권위를 지니신 까닭에 그분이 말씀하시면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서서 입을 열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혜를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혹은 당대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에 압도되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인정하는 데 모두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좀체 설교를 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그들은 늘 이것저것 트집을 잡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종종 그들은 예수님이 설교하시면 중간에 끼여들어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이 적의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그들의 손에 넘겨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실 때 나타났던 그들의 증오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을 있는 그대로 읽노라면,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되돌려받는 반응은 고작 마귀들렸다는 비난이나 미친 사람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말들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그들 가운데는 『그는 마귀들리고 미쳤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듣느냐?』 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집의 주인이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그 종들은 무얼 기대하겠습니까? 조금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마귀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요 10:21).

정말이지 마귀들린 자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설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요 10:21). 주님은 밑바닥 인생들과도 교분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역을 착실히 수행해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을 닮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날과 나쁜 날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견디어 나갈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뭐라고 짖어대는 자들로 인하여 한 순간이라도 사역을 멈출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마귀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때 예루살렘은 수전절을 지내고 있었고,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아마 7일에서 8일정도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수전절은 안티오쿠스(Antiochus)로 인하여 더럽혀진 성전과 제단을 다시 복구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는 그저 인간이 만든 행사에 불과했습니다. 거룩한 분의 그림자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도 없는 그런 행사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행사를 혹평하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면 사람들과 복음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교회 의례라든가 행사에 관하여 논쟁하면서 시간을 죽이진 않을 것입니다. 의식이나 행사 따위엔 아예 무관심해질 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행사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그물을 던지시기 위해 그 장소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논쟁에 휩싸일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감리교는 칭찬을 받을만 합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지난 40년간 우리 감리교 설교자들 중에 비본질적인 부분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고 일어선 이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최상의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요 10: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강단에 세우고 온갖 아첨으로 그분이 설교를 하시도록 유도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그분이 회당 사이를 걷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분은 홀로 걸으셨을 것입니다. 따라붙는 사람 하나 없이 말입니다. 그분은 성전을 거니시며 또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다가, 성전이 어떻게 훼파되어갈 것인지를 마음에 또올리고 계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생각에 잠겨 그 땅에 임할 끔찍한 재앙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재앙의 날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24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유대인들이 와서 주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고 하니』 그들은 주님이 솔로몬 행각을 거니고 계신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주님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저자를 잡자. 잡아서 한번 싸움을 걸어보자." 시편에는 그들의 행태를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이 벌떼와 같이 나를 에워쌌어도...』(시 118:12).
그들은 속으로 말합니다. '그를 우리 가운데로 끌고와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우리가 그 자를 억누를 수 있는 지 한번 시험 해 보자.' 그들은 주님께로 다가와 말을 던집니다.『..."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요 10:24). 그럴듯하게 들리는 질문입니다. "얼마나 물어댔는데, 언제까지 우리를 의구심 가운데 내버려둘 생각이시오?" 어떤 이들은 그 말에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언제까지 우리의 살며시 훔치는 짓을 계속할 겁니까?" 그들은 그분이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메시야로 내세우려는, 압살롬처럼 뱃속이 검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인간들은 늘 선한 사람들의 행동을 곡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의심에 빠져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그들의 책임입니다.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 '선생이여,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마시고 조금만 더 명확히 말씀해 주시오. 우리에게 그대가 누구신지를 밝혀 주시오, 당신 입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오.'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게게 분명히 말하라...』(요 10:24).
그들은 그분을 책잡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분이 자신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그 말을 근거로 그분을 비난했을 것이고, 만일 그분이 자신에 관하여 그리스도라고 밝히셨다면 그들은 또 그 말을 듣고 당장 로마 관원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의 위정자들은 메시야를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란 로마 황제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드는 불손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자들인 그들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정부에 반역을 꾀라여 한다는 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주 심어줍니다.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게게 분명히 말하라...』 주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곧장 대답하십니다. 조금도 숨기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요 10: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만일 그분이 명백히 "나는 메시야다."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당장 주님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셨습니다. 비둘기 같이 순수한 분께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말씀을 듣고서도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요 10: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의 불신은 주님께 더없는 슬픔의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요 10: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느니라.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하는 일들을 보고 너희가 분노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의 생각이 그릇된 까닭이니라.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의 Stoddard는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아주 훌륭한 설교를 했습니다. 흔하지 않은 설교 본문이고, 또 회중을 각성시키는 데 그 본문이 쓰인 적인 전무하다시피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교를 축복해 주셨고, 300명의 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의 신실한 사역 태도를 보시고 그런 각성이 일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침례 교도와 조합 교회파 혹은 감리교도와 장로교회로 나누는 구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양과 염소의 무리로 나누셨습니다. 오늘 이 참에 여러분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비유되고, 믿지 않는 자들은 늘 나쁘고 별로 볼 게 없는 것들에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혹자는 물을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양으로 불리느냐고. 제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짧지만 마음에 흡족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양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양떼는 자그마한 가축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양떼로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보기에 작은 자들이고, 또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도 작은 무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 즉, 왕과 군주들이 우리편이면, 그러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로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우리 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러면 교회가 더 나아질 것 같습니까? 궁정과 민간 사이에서 감리 교인이 되는 것이 대유행이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소설책 대신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다니겠지요.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양지에서 부흥되는 법이 없습니다.
(고전 1: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양은 흔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짐승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온순한 동물로 평가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한량 없는 자비로 우리가 그분의 양임을 알게 하시고, 또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복된 성품을 가득 부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서 배우라...』(마 11:29).
무얼 배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기적을 행하는 법? 아닙니다.
(마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어느 위대한 믿음의 선배는 말하길, "내가 가장 원하는 성품이 있다는 그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즉, 나쁜 처우를 참아내고 잊어버리며 용서할줄 아는 성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입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그 악을 극복한 뿐만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얻기를 나는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 온유함은 없어서는 안될 성품입니다. 무자비한 인간은 늘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정자들은 모두 온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가차 없고 용서할 줄 모르는 위정자는 태양의 전차를 이끌고 가는 파에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을 불태워버렸다는 위인 말입니다.
양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짐승보다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동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양에 비유되는 것은 너무도 적절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잃어버린 양같이 길을 잃었으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이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같은 구절을 인용하곤 합니다. 개나 말은 길을 잃어버릴 지라도 곧잘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좀 다릅니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내 갈 길 좀 알려주오 하기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서 메에! 하고 울면서 방황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도 우리를 벗어나 정처없이 헤매기 일쑤입니다. 선하신 목자의 눈을 피해 이 들판 저 들판, 또 이 골짝 저 골짝을 돌아다니다가 털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을 한 연후에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양에게 그렇게 못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땅에 거름을 쏟아놓곤 하는데 이 거름은 땅을 씨앗이 발아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며, 또 그 털로는 옷을 만듭니다. 양에게서 나는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저를 양과 닮은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저버리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이는 의의 전가라는 교리가 가장 흔하게 부딪치게 되는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상입니다. 염치없는 중상모략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늘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입을 수 있을 만큼의 양모를 생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손수 수고하고 일하며,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에 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막함에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택함을 받은 양들입니다. 그분은 『내 양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양들은 모두 값을 주고 산 것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하찮은 설교자의 고별 설교를 듣기 위해 이 장막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설교하는 자를 잊어버리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은 이 장막보다 어 먼 곳으로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 어디로 이끌어 가고 싶느냐구요? 바로 갈보리입니다. 갈보리 산으로 여러분을 인도해가고 싶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값지고 보배로운 피를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를 양자로 택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신 이 거래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과감히 거래를 성사시키셨습니다. 여러분과 나를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의 날에 우리는 그분께로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양들에 대하여 특별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0:4)“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 목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목자가 양들을 뒤따라가는 모습이 몇 번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7:8과 시편 78:71이 그것입니다. 우리 영국에서는 목동이 양 뒤로 따라갑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좀 다릅니다. 목자들이 양 앞쪽에서 걸어갑니다. 그들은 손에 지팡이를 쥐고서 양들만이 알아듣는 독특한 음성을 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4).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7:5)“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도 말씀하십니다.
(요 5: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자, 이 말씀은 결국 다음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에 앞서 우리는 모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의 음성 말입니다. 율법은 시온산이 아니라 시내 산으로 곧장 뻗어있는 길 위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자신이 회심한 때를 기억하지 못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 전 그렇게 믿습니다. 대개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다루신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더 신속히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주님을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율법의 책망을 들었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려면 우선 율법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폭풍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외투를 꽉 잡아서 몸에 단단히 밀착시키려들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패상을 바짝 다가가서 목도하게 만들기 마련입니다(롬 7:7-9).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그들의 혼에 비치면 그들은 그토록 가까이 다가오던 부패상들을 모조리 훌훌 벗어던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아, 딸들아, 힘을 내라. 너의 죄들이, 그 숱한 죄들이 모두 용서되었느니라."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요 10:3).
이는 그들이 항시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지를 드러냅니다. 악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에 치중하고, 마귀가 때때로 속삭여대는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도 회심하기 전에는 모두 다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구속주의 보혈이 주는 평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게 됩니다. 즉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증거는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기쁨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고 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가 어디를 향하든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따릅니다. 옆에 있는 양의 발을 밟기도 하고 서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천상을 향하여 가는 그 길을 서둘러 따라갑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삶 전체에서 그분의 말과 행동을 닮아가고 또 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도 그분의 뜻을 좇아 가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마 14:28)“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그리스도와 무한한 자비를 전파하러 물을 건너가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위대한 목자의 지팡이가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에 있어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의 본분입니다.

자,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우리가 더 오래 산다 할지라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몇 달에 걸쳐 설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한 말씀 드려야겠군요. 여러분들 중 어떤 이들은 오늘 아침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열로 들어오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아주 진지하고 진솔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온전히 그분께 자신을 드리고 있으십니까? 저는 믿겠습니다. 떠나야할 마당에 이렇게 믿는 게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이들을 앞에 두고, 즉 그 고귀한 혼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맞다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토록 빈약한 열매를 맺어드리고, 너무도 자주 그분을 떠나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양으로 남아 그분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사실입니까? 여러분들 마음속에도 이런 말들이 웅웅거린다면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그분의 우뚝하고 위대하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송축합시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내가 특별한 혼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저를 통하여 자신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 주셨다면, 이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은 행복한 나그네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드립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나니,』(요 10:14).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은 양의 숫자도 아시고 또 그들의 이름도 다 알고 계십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얻은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계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은 모두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나이다."...』(요 18:9).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아십니다. 양이 몇 마리인지 아실뿐만 아니라, 자신들끼리 주고받는 특별한 정보나 지식들을,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양들 한 마리 한 마리를 온 세상에서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돌보듯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성도들을 아시며, 그들의 슬픔들을 헤아리고 계시고, 그들이 당하는 시험과 겪고 있는 유혹을 다 인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가정에서 겪어야 하는 시험을 세세하게 살피고 돌보아주시며, 그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부패한 것들을 또한 바라보고 계시며, 그들의 방황을 아시고 그들을 양 우리로 다시 데려오는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대중적인 언어로 설교하는 좋은 설교자인 매리어트(Dr. Marryat)박사는 어느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저는 강단이 이런 설교자들로 가득 차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데려오시기 위해 큰 개를 한 마리 보내십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양이 방황할 때, 목자는 그들에게 개를 보냅니다. 양을 다시 양 무리 속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이 무리에서 떠나 곁길로 빠지려하면 주님은 그에게 마귀를 보내십니다. 그러면 마귀는 그에게 들러붙어 미친듯이 어댑니다. 그러면 양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그리스도의 양 우리로 달려오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할 고귀한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내 양들을 알고』
저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여러분이 어떤 시험에 처한다 할지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우리에 관해 전혀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그분이 자비 베푸시는 것을 잊으신 게 아닌가? 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그분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고소하면, 즉 마귀에게로 돌이켜 그와 한편이 되면, 우리는 형제를 고소하는 자들이 됩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판단한다면 무엇이 그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흠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기에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냐구요? 이겁니다.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34년 전 제 마음에 이 말씀이 역사할 때처럼 부드럽고도 강력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시길! 저는 지우들의 추천으로 성직을 얻게 될 때까지도 제 개인적인 삶에 스며있는 부패상을 놓고 기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벤슨 주교는 황송하게도 저와 교유를 해 주시고 계셨는데, 그분이 저를 성직자로 추천해주었습니다. - 그리고 그 외에도 저를 위해 애써준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 지우들은 아직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도 저를 강단에 세우고 싶어 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인 저를 강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설교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많은데 저는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간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설교하고 사역하는 일에 얼마나 적합한지 아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수천 번에 걸쳐 기도했습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질 때까지 그분의 자비에 호소하며, 그분의 부르심이 있지도 않은데 혼자 생각으로 성직으로 나아가는 일이 없도록, 그분의 사역을 침노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 방이 기억나는 군요. 글로스터(Gloucester)에 있던 집이었습니다. 그 집이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될 때면 저는 항상 그 방의 창문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그 창문과 침대, 그리고 마루, 다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그 마루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기로를 했습니다. 
"주님, 저는 못합니다. 전 자만심으로 목이 뻣뻣해지거나 마귀의 비난에 낙심하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주님, 제발 가지 않게 해 주소서. 전 여기 옥스퍼드에 2,3년은 더 남아 있고 싶습니다."
저는 150편 정도의 설교를 준비한 후에, 즉 사역에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후에 강단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때를 기억합니다. 하나님과 다투고 씨름하며 기도하던 날들을 말입니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전 아직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설교를 하기엔 아직 어림도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 제발 저를 놓아주십시오. 전 아직 강단으로 나아갈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모든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주교가 추천을 거두게 하라고 기도부탁을 했지만, 그들은 끝끝내 저를 강단으로 내몰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고작 스물 둘이었습니다. 그들의 간곡한 말들이 저의 귀와 마음을 무수히 두드린 연후에, 제 마음에 이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8).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복된 주님의 음성이길 원합니다. 제가 그 부드러운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느꼈던 것과 같은 축복을 느끼길 원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하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아주 없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 근처에 있는 도버 섬에서 수주를 갇혀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심한 풍랑으로 섬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150명이나 되는 성도들을 책임지고 있었고, 주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한 사역자가(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분입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기억나십니까? 그 말씀으로 평안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특별한 말씀이 다시 계시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리석은 양들이 늘, 나 이러다 혹시 하늘나라에게 못 가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성경에 이렇게 못을 박아두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요 10:28).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중요한 선언, 혹은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내가 내 양들을 알고』인데, 즉 그분이 우리들 하나하나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때로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이나 내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져 멸망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에서 자신에게로 데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겠습니까?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주님께 영생을 구하십시오. "그렇게 할 겁니다."가 아니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십시오. 떤 이들은 우리가 백보좌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란 예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심판을 받는다면, 거기에서 심판 받을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의롭게 된다면, 거기서 다시 의롭게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맹서이며, 주님은 이를 확실히 보장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마음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저 세상에 영광스런 미래를 예약해 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양들을 손에 꼭 쥐고 계십니다. 즉, 그분의 권능으로 꽉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분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마귀도, 육신의 욕망도, 눈의 정욕도, 생의 자랑도, 그 어느 것도. 그것들이 모두 달려들어 주님의 손에서 양들을 강탈하려 하겠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요 14: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오래토록 지켜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적으로 몹시 기진했을 것이고, 스스로를 위하여 열렬히 노력하라고 경고하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이보다 더 여실히 드러내는 성경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일지라도(튼실한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교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악인도 구원을 영원히 보장 받는단 말인가?" 그들은 이 거룩한 교리를 헐뜯는 자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좋은 음식을 망치려 들지만, 우리가 이 음식을 못 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여러분을 의탁합니다. 여러분들과, 제 친구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의 양들을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사랑과 보호하심에 의탁합니다. 오늘 아침 이 도시의 저쪽 끝에서 마차를 타고 여기에 당도하던 즈음 저는 제 자신이 공개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오고 있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마차를 끄는 말이 걸음을 멈출 즈음, 저는 여러분들이 잰 걸음으로 예배당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들은 나의 공개 처형장으로 몰려오고 있구나, 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가운을 입으면서, 저는 그리스도를 위해 내 피를 흘리기 위해 옷을 입는 중이리라,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 땅과 하늘, 그리고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을 증인으로 채택하고 싶습니다. 제게 성경이 주어졌고, 주교(성공회 주교)가 저를 그의 팔에 안아 주었고, 또 스물 두 살이 되기 이전에 벌써 두 개의 교구를 맡기고 자신의 식탁에 동참하게 해 주었지만, 말하자면 사역자로서 오를 만큼 높이 올랐지만, 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고통을 받는 사역 외에는 바란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 그 마음을 가지고 여기 런던으로 왔습니다. 저는 야곱이 지팡이 하나를 들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읽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여기에 왔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전 친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옥스퍼드에 친구도 없고 하인도 없었으며, 저를 인도해 줄 사람도 한 명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저를 세우셔서 그분의 거룩한 이름으로 설교를 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이렇게 사역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역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애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 역시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여기와 또 한 장소에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송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처음 조지아(Georgia)로 부르셨을 때, 저는 런던의 사역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했습니다. 런던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저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사람들이 밀어닥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2에서 14명의 경관들이 문을 지키고 있던 즈음에, 저를 사역자로 임명하겠다는 데가 수백 군데나 줄을 섰지만, 저는 그 모든 곳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외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 때와 동일한 목적과 소망을 가지고 외국으로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해야 할 처지입니다. 저 혼자선 그 충격을 감당해내지 못할 테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잘 견디게 해 주시리라고 믿으며, 또한 여러분으로 하여금 저를 복된 하나님께 의탁 드려 그분이 저를 통해 그 거룩한 뜻을 성취시키게 해주시게끔 인도해 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큰 바다를 또 건너가면 이제 13번째가 됩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현재 이 시기로서는 별로 큰 일이 아닙니다. 내 영은 어느 정도 사기진작이 되어있을 지라도, 여전히 저의 강함은 연약함 속에서 나옵니다. 저는 저의 부르심의 소명을 명징하게 알고 있으며, 주님은 제 마음에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타인이 간섭하지 못할 평안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분의 손에 저는 제 영을 의탁 했습니다. 저는 다음의 말들이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의 손에서 그들이 우리 중 어느 하나라도 빼앗지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켜오셨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지켜주실 줄 믿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맡아온 교구는 지금껏 아무 일 없이 잘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가 여행을 떠나게 되어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 기도를 듣고 계신 그분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잘 지켜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제껏 저는 파벌을 만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 어느 사역자라도, 제가 어떤 사역자를 헐뜯는 말을 했노라고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 늘 사람들의 손에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 중 얼마는 돌아서서 저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영을 소생시키기를 기꺼워하시는 것은 모두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앞으로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 할지라도, 저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와중에도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런던을 보살펴 주소서. 영 안에서 교유하던 친구들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 얼마는 틀림없이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분 앞으로 불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괘념치 마십시오. 우리가 여기선 헤어지지만, 그 언젠가는 다시 만나 영원을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헤어지고 나면 여러분은 저에게 올 수 없고, 여러분도 저에게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저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심히 짓누르지만, 머지않아 모든 이별을 끝이 납니다. 모든 눈물이 훔쳐질 날이 곧 찾아옵니다. 지금 제가 떠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는 분은 없겠지만, 언젠가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혹 이중에 아직 그리스도의 양 우리게 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들어오십시오. 오십시오, 어서 와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서두르십시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선한 목자시여, 어서 이 혼들을 양 우리로 인도하소서.

자, 이제 이미 그분의 손 안에 들어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방황의 길로부터 지켜주시길 소망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여러분들이 위대한 목자시오, 혼들의 감독이신 그분을 바짝 따르기만 한다면, 다른 작은 목자들과 관련해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길, 그분의 얼굴빛을 항상 여러분에게 비춰주시길,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평안이 가득 하시길, 아멘.

 

-1769년 8월 30일 수요일, 아메리카로 마지막이 될 선교 여행을 떠나기 직전 런던에서 했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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