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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교수의 생애와 사상

그레샴 메이천

by 김경호 진실 2011. 5. 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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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J. Gresham Machen 교수의 생애와 사상


 


1. 가정 배경과 학창 시절


  메이첸 교수는 1881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 주 발티모어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아서 웹스터와 어미니 메리 그레샴 메이첸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메이첸 교수의 조상은 영국계로서 미국에 이민 온 이후, 주로 버지니아주와 조지아주에서 살았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줄곧 우등생으로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특히 라틴어와 헬라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메이첸은 철저하게 보수주의적인 배경 속에서 신앙을 배웠다. 그는 “내가 12세 되던 무렵에 습득하고 있었던 신구약 성경 지식은 오늘날 신학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가정교육을 통해서 철저하나 성경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2년 9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는 워필드가 교수하고 있던 시절이라 그는 워필드 교수 아래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1905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04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병행하여 취득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가 특이한 부분은 1905년 독일에 1년간 유학하면서 소위 구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 그는 Herrmann교수의 강의 한 때 깊은 감명을 받고 많은 갈등을 갖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소요리문답을 읽고 공부하므로 신앙적 정체성을 찾을 것에 대해서 권하기도 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 헬라어와 신약성경 전임 강사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 유학으로 생긴 신앙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8년 동안 목사 안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2. 프린스톤에서 웨스트민스터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즉, 1914년 패튼 학장이 퇴임하고 그 후임에 J. Ross Stevenson박사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포용주의와 타협주의를 표방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학교는 점점 자유주의적인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정 깊이 비판했던 인물이 바로 메이첸이었다. 이런 갈등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은 어드만 박사가 19개의 복음적 교파와 연합하자는 합동안을 지지하는 의사를 공적으로 표시하였고, 스틴븐슨 교장도 이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메이첸을 철저하게 반대를 했다. 메이첸은 이것을 두 가지 내용을 들어 반박하였다. 첫째로 합동안을 발의하는 제안문의 서론이 신학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둘째는 합동안에는 목사들이 신조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메이첸이 신학교 사역 중 또다른 중요한 사건은 1923년 발표된 “기독교 자유주의”의 출간으로 드러난 메이첸 교수의 분명한 보수주의적 색깔이었다. 이런 메이첸의 입장으로 인해서 자유주의와 대립하게 되는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프린스톤 신학교 안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 양상은 학생들에게서도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생들이 복음주의 학생 연맹을 조직하고 지도교수를 초빙하는 과정에서 메이첸과 어드만 사이의 심각한 신학적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에는 워필드 이후 변증학 교수로서 메이첸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앞서 있었던 신학적 갈등이 이 문제에까지 파급되어 변증학 교수 임용이 취소되었다. 결국 학교는 신학적 대립으로 운영 이사회와 재단 이사회로 양분되었고, 이런 과정 속에서는 메이첸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공격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3. 메이첸과 독립 선교회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보수주의적 신학적 입장이 더 이상 가르쳐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Robert Dick Wilson교수와 Oswald T, Allis, Van Til 교수 등과 학생 20명이 합세하여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메이첸의 생애와 관련해서 중요한 또다른 사건은 예일 대학교의 교회사가 S. E. Mead 교수가 “선교의 재고”라는 글에서 제기했던 내용이다. 여기서 미드 교수는 현대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선교정책도 바뀌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 선교사들이 치러야 하는 교리 시험같은 것은 꼭 치러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문제제기 했던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상에 대해서 메이첸은 1930년 5월 “Christianity Today(1930년 5월호)”에 기고하기를 “역사적, 정통적 기독교와 현대주의는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Robert E. Speer박사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도 했다. 스피어 박사는 평화주의자, 포용주의잗, 관망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메이첸은 이처럼 보수주의도, 현대주의도 아닌 제3의 입장을 표명하는 신학자들도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스피어 박사는 “외지 선교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 대해서 Pearl S. Buck여사가 지지를 표명하고 메이첸과 대립을 갖게 된다. 펄벅 여사는 중국 선교에 있어서 복음보다 물질 원조가 앞서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입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래서 메이첸과 펄벅 여사는 선교문제에 대한 갈등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녀는 New Republic지의 논객이 되어 메이첸을 더욱 비판했다.


4. 메이첸의 마지막 투쟁


  펄벅 여사는 1933년 1월호 “Harper”지를 통해서 보수주의자들의 선교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메이첸은 보수주의자들을 대표해서 반박했다. 그는 뉴브런스윅 노회를 통해서 총회에 상정하도록 1933년 1월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펄벅 여사를 선교사의 직책에서 해임시키라는 것과 기독교 5대 교리를 믿지 않는 선교사들을 선교지로부터 소환하여 심문하고 각서를 쓰게 하든가, 아니면 해임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 중에서 펄벅 여사는 자의로 선교국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메이첸에게 더욱 악화되었다. 필라델피아 노회와 아버딘 노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부결시키고 오히려 메이첸 교수 와 그 일파를 각 노회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벌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 중에 H. McAllister Griffith목사는 새로운 독립 선교국을 설치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독립 선교 단체를 의미했다. 결국 1933년 6월 27일에 새 선교 기구는 탄생하였고 메이첸 교수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일로 총회는 1934년과 35년 총회 이전에 메이첸과 그 일파를 책벌하였다. 그리하여 메이첸과 그 일파도 1936년 6월11일 필라델피아시에서 아메리카 장로교회를 창건하였다. 역시 여기에서도 메이첸이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1월1일 미국 서북부 North Dakoda에서 독감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5. 사상적 배경


  메이첸이 이처럼 강경한 보수주의적 사상을 표명한데 대해서 많은 비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의 “교회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 교회관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7항목에서 좀더 세밀하게 다루어 주고 있고, 본 항목에서는 주로 보수주의적 사상을 받게 된 배경을 제시해 주고 있다.

  메이첸이 철저하게 보수주의적 신학사상을 형성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소요리문답을 교육 받으면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배워고, 커서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워필도와 패튼 교수를 통해서 칼빈주의에 대해서 확고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6. 성경관과 성경 연구


  메이첸은 조직신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적, 고증적 방법과 변증적 방법을 제시했고, 이런 방법은 철저하게 정통적 성경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 미국 신학교들은 앞다투어 독일에서 도입한 고등비평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메이첸은 1905년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지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탄생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메이첸은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은 자유주의만의 방법이 아니라 보수주의 성경학자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되 성경에 기록된 사실과 내용이 참되다는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바울 종교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도 바울의 기독교 제2의 창시자로서 예수의 교훈을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라는 주장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문제 삼고 있던 테마를 연구함으로써 성경 말씀의 초자연성과 신적 권위를 변증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7. 교회관


  메이첸 사상 중에 가장 많이 비판 받는 부분이 바로 교회관이다. 그의 분리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바로 이 교회관의 변지를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의 신학 사상과 그 역사를 살펴보면 극단적 분리자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취한 입장은 개인의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취해왔던 교회적 고백 안에서 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는 1차부흥 운동 이후로 교리를 무시하는 모습이 팽창되었고 이것을 비판하는 세력이 구파로 이것을 인정하는 입장이 신파로 나뉘어 졌다. 미국장로교회는 결국 1729년 9월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채택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예비안과 완결안으로 나누어져서 채택하게 된다. 2차 부흥운동이 18세기 말에 일어나면서 장로교회는 처음과 같이 교리 채택에 대한 갈등을 다시 나타내게 된다. 역기서도 구학파와 신학파로 나뉘어 갈등을 드러낸다. 교회는 남북전쟁 후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북장로교회는 큰 변화를 갖게 된다. 즉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연구에 있어서 고등비평의 방법 채택과 관련해서 갈등이 터졌다. 결국에는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개정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당황한 보수주의자들은 1910년 기독교 근본 교리 5개 조의 확인과 책택을 총회적 차원에서 천명하였다. 이 때 1924년 오번 선언이 발표되어 5개 조항을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핫지나 워필드 등은 철저하게 보수주의적 입장을 고집했고,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메이첸도 동일하게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첸의 행동은 개인적 판단의 행위라기 보다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8. 메이첸의 현대 사상 비판


  메이첸이 비판한 현대주의는 문예 부흥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쳐서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가미로 원죄에 대한 부인, 그리고 윤리성만 강조하는 성향 등이 도입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방법론을 도입하여 기독교의 특수성을 종교의 보편적 원리의 단순한 시대적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단지 종교의 보편적 원리 속에 편입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자연주의 사상이라고 지적한다. 메이첸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종교이기 때문에 과학과 타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화시킬 수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http://cafe.daum.net/Creed/6SP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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