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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의 신학 사상

그레샴 메이천

by 김경호 진실 2012. 5. 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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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의 신학 사상

 

 

Ⅰ. 들어가는 글

 

  기독교의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이 세상의 발전과 화합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기독교 역시도 그것에 맞추어서 변화해야 하는가?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싸웠던 메이첸을 만난다.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혹시 우리가 그 이상으로 뛰어난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메이첸은 기독교가 어떤 열망이나 훈계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그리고 육체적 부활 같은 객관적 사실 위에 세워진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역사나 과학에 무관한 주관적인 관념에 의해 제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는 이는 먼저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의 핵심과 중심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역사의 틀에 맞아 들어갈 뿐 아니라, 역사의 절정으로 인도한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사건들의 기록이다.” 메이첸에게 기독교는 사실 위에 세워진 삶인 것이다. 메이첸의 이와 같은 가르침 속에서 우리 역시도 역사 속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내일을 준비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근본주의자가 아닌 칼빈주의자로 부르기를 원하였던 메이첸의 신학적인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는 맨 먼저 메이첸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 뒤를 이어 편의상 메이첸의 신학 사상들을 組織神學的 순서下에 다루어 나가고자 한다.

 

 

Ⅱ. J. G. Machen(1881-1937)의 생애

 

  메이첸은 아더 웹스터 메이첸과 메리 그레샴 메이첸 사이에서 세 아들중의 둘째 아들로 1881년 7월 28일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존스 흡킨스 대학, 프린스턴 대학교 및 신학교, 마르부르크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메이첸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청소년기 초기에 성경과 개혁 교리에 대한 굳건한 신앙을 확립했다. 14살이 되던 1896년에 그는 플랭클린 스트리트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1901년 주머니 속에 피 베타 카파 열쇠(우수성적의 대학졸업생 클럽 가입 자격)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전어로 졸업생 답사를 했으며, 최고의 영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에 메이첸은 직업을 결정하지 못한 고민 속에서 존 홉킨스대학에서 바질 길더슬리브(Basil Gildersleeve) 교수 밑에서 고전어를 연구하면서 시카고 대학에서 은행업과 국제법을 공부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자, 그는 1902년에 일년의 시험적인 기간 동안 신학적 훈련을 받으려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프린스턴 신학교에 밀려오는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1921년 워필드 교수의 별세 이후 계속되었고, 결국 1929년 세인트 폴에서 열린 북장로교 총회는 운영 이사회와 재단 이사회를 통합하여 하나의 이사회로 만들고, 오번 선언문에 서명한 2명의 목사를 새로운 이사회 회원으로 선출했다. 이렇듯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세력권으로 이양되는 것을 보고 메이첸은 윌슨, 앨리스(O.T Allis), 반틸(C. Van Til) 교수 등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23년간의 프린스턴 신학교 봉직을 끝마쳤다. 그리고 1929년 9월 25일 필라델피아 파인 스트리트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여 전통적인 개혁주의신학을 가르치며 보존하기를 원했다. 1906년부터 1929년까지 중간에 잠시 프랑스에서 YMCA 사역에 가담한 것을 빼놓고는 줄곧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고전 개혁주의 입장을 옹호한 그는 은사 워필드에게 영향을 받았다. 1921년 워필드가 죽은 뒤 ‘프린스턴 신학’의 지도권을 물려받았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진영으로 재편성되자 학장직을 사임하고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와 오늘날의 미국 정통 장로교회(1936)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1929-1937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학장 겸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5년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불복종 죄로 고소를 당한 뒤 뉴저지 트렌턴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노회는 그가 독립 선교부와 관련을 맺고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단죄하였다. 또한 자기 변호를 금지 당했고, 미국 장로교로부터 목사직을 면직 당하였다. 현대주의와 근본주의가 대립하던 시기에 친구와 정적 모두에게 주도적인 보수주의 변증가로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들에는「바울 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lon, 1927년), 자기 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진술한「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년),「초신자들을 위한 신약성경」(New Testament for the Beginners, 1923년),「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년)이 있다.

 

  메이첸은 일생 동안 독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북 타코타(North Dakota)로부터 크리스마스 휴가 초대를 받고 그 곳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북 타코타 주 주변을 여행하다 슬프게도 심한 혹한으로 폐렴에 걸려 1937년 1월 1일에 서거하였다.

 

 

Ⅲ. Machen이 받은 영향

 

  메이첸의 성장 과정에 있어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는데, 메이첸 교수는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좋아하였고, 생물학과 천문학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메이첸 여사는 메이첸이 중학교 졸업 할 때까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완전하게 암송케 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대학을 마칠 때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계속 읽도록 하였다. 이 교리서는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므로 이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공부할 것 같으면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훗날 메이첸 교수가 독일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조교수로 임명되고, 또한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까지 약 8년간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자기자신과 더불어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던 원동력은 어려서부터 알고 배웠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었다.

 

  한편, 그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벤자민 워필드를 들 수 있다. 벤자민 워필드는 다른 모든 프린스톤인들보다 젊은 메이첸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쳤는데, 메이첸은 워필드의 성경 교리에 완전히 동의하였으며, 그의 교리를 모든 시대를 통하여 교회가 주장했던 영감의 교리로서 옹호했다. 명백하게 메이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던 워필드 신학의 또다른 강조점은 자연주의적인 사고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가는 것에 직면하여 워필드가 초자연주의를 옹호한 것이었다.

 

  워필드는 기독교가 주변의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은 올바른 교리를 확립시키는 것이라 주장했는데, 워필드와 같이 메이첸도 기독교는 주로 올바른 교리의 진전을 통하여 문화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Ⅳ. Machen의 신학 사상

 

  메이첸의 신학사상은 그 당시 교회의 형편을 이해하지 않으면,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메이첸 당시의 교회는 초자연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침식하는 자유주의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메이첸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맹공격을 가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을 향해 무자비할 정도로 맹공격을 가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직접 독일에 건너가 성경을 비평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연구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비참함을 보고 자유주의자가 내세운 이상론의 맹점을 실감했기 때문에 메이첸의 자유주의 공격은 날카롭고 구체적이었다.

 

  메이첸이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은 이유는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성경의 영감설, 성육신, 속죄, 부활, 그리스도의 영생, 초자연적 능력)를 부인했기 때문에 이 근본적인 진리를 옹호하고 천명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1. 성경관(聖經觀)

 

  메이첸에게도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메이첸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교리를 믿었고, 기계적 구술 영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저자들이 일반적인 지식의 자료들을 사용하였으며, 인격적인 자유를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성령의 인도로 사실과 자신들의 해석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진실로 무오한 인간의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얻고, 그것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하여 문법적-역사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

 

  단지 성경의 원본만이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충동과 인도하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많은 것들이 변하지만 변치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히 4:12). 세상은 타락하고 유형교회는 상당한 부분에서 배교의 길로 나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다.

 

 2. 신관(神觀)

 

  메이첸은 하나님을 창조에서 분리시키고 그를 단지 창조 자체의 본질로 만들어 버리는 모든 자연신론과 범신론을 거부하였다.

 

  메이첸이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강조한 것이 그의 기본적인 신앙이었는데, 메이첸이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만큼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 중의 삼위의 임재, 권능, 역사를 하나님의 사역을 논할 때마다 항상 설명하고 있었다. 성령의 사역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지만, 메이첸은 일반 은총을 성령 사역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육신에서의 성령의 사역, 성경 저작에서의 성령의 사역, 그리고 택함 받은 이들의 중생과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그는 칼빈의 전철을 밀접히 따르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적용은 성령의 행위이며, 성령을 통해 신자는 성자와 성부 하나님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의해 제약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행위들은 어떤 외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우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3. 인간관(人間觀)

 

  메이첸은 인간에 대하여 펠라기우스의 가르침과는 달리 전적 부패와 아담으로부터의 죄에 대한 전가를 주장하였는데, 펠라기우스주의는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범죄 행위들로 인도하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남을 거부한다. 그리고 순수 펠라기우스주의 견해와 성경이 아주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어거스틴주의의 견해 사이의 일종의 절충인 반(半)펠라기우스주의는 타락에 의해 사람의 본성은 약해졌으며, 비록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이어받는 이 약함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죄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메이첸은 가르치기를,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자로서 범죄하였으며, 그의 최초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그 자신에게만 미쳤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미쳤음을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인간의 대표자였다. 성경은 첫째로, 죄악된 행위들은 이것들을 행하는 사람이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며, 둘째로 그 본성의 부패 자체가 죄임을 명백히 가르친다. 만일 그가 언약을 지켰더라면,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도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더 이상 시험도 없었을 것이고, 더 이상 위험도 없었을 것이며, 인간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가졌던 의(義)뿐만 아니라 또한 확실한 의(義)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즉, 범죄할 가능성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전적인 부패는 타락한 인간의 부패가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락하고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그 무슨 일들로도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4. 기독론(基督論)

 

  예수에 관한 성경 기사는 비밀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요점은 거의 한마디로 쓸 수 있다.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의 산물이 아니고, 세상 밖에서 온 구세주이다. 그의 생애는 완전한 순결의, 무섭도록 외로운, 그리고 은혜와 최고 권능의 생애였다. 그의 죽음은 단지 거룩한 순교자가 아니고, 세상의 죄를 위한 희생이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였다. 그는 살아 계시고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그에게 향하면 도와주시는 분이다. 그는 단순히 인간들의 아들중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계신 것이다.

메이첸에게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었다. 예수는 도덕 세계의 가장 깊숙한 비밀의 주가 되신다. 그는 다른 이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즉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이다.”

 

 5. 구원관(救援觀)

 

  구속에 대한 메이첸의 관점의 근거는 창조론과 섭리론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는 데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보전하시며, 순간순간마다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6. 교회관(敎會觀)

 

  1922년과 1936년 사이에 교회가 싸웠던 전투들은 주로 신학과 교회론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메이첸에게 있어서 교리가 기독교의 가장 중심에 있었으므로, 그는 교회를 무엇보다도 올바른 교리의 선전에 헌신한 비슷한 마음을 가진 개인들의 조직체로 보았다. 복음주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특정한 메시지에 동의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공포된 신조대로 그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연합해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메이첸은 교회의 연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 설교자들은 교단 내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말한다 : “자, 교리적인 차이는 사소한 것이니까

한 교단으로 합칩시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본질은 교리적인 차이를 사소한 것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회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교리적이며, 극단적으로 불관용이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의 한 방법이 아니고, 유일한 길임을 선언해야 한다. 다른 신앙들의 출발점이 될 수 없고, 변절에 동의할 수 없다. … 다른 종교들에 관대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메이첸의 교회관은 점차로 호전적으로 되어 갔다. 처음에 자유주의 세력에 비해 보수 세력이 압도적이라고 믿었을 때, 그의 교회관은 그저 자유주의에 대해 배타적일 뿐이었다. … 교회 내 논쟁이 점점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에게 불리해져 간다고 느끼자 메이첸의 교회론은 이제 분파적으로 변해갔다.

 

  메이첸에게 있어서 교회의 사명은 올바른 신앙의 보존과 선전이었으나, 어드만에게 있어서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메이첸에게 있어서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진척시키는 것을 통하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메이첸은 교회는 사회적인 문제들과 관련 맺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는 것과 올바른 교리의 선전이 교회가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그의 믿음을 굳게 견지했다. 명백하게 메이첸이 교회가 지적인 영역을 자연주의적인 관점의 해설자들에게 포기한다면, 참으로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점에서 옳았다. 그러나 장로교회를 떠나 초자연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장로교인들의 거대한 다수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메이첸은 문화와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의 기회를 심하게 제한하였다.

 

 7. 종말론(終末論)

 

  메이첸은 전천년설은 “잘못된 성경 해석법 때문에” 틀린 것이고, 결국에는 해로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첸은 그것이 “치명적인 잘못”은 아니기에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과도 얼마든지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전천년설 신봉자들도 장로교회 내에서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불행하게도 메이첸은 종말론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라고 언급한 것은 만일 메이첸이 이 주제에 대하여 신약의 가르침을 완전히 연구하였다면 메이첸이 전천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스승과 지도자로 삼기를 거부하였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키는데 좀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무천년설을 견지하고 있다고 몇 번 언급하였다.

 

 

Ⅴ. 나오는 글

 

  메이첸은 명백하게 미국에서의 지적인 경향들에 대한 날카로운 사상가이자 통찰력 있는 분석가였지만, 순수한 교리만을 추구하는데 대한 그의 흔들림 없는 헌신, 그의 보수적인 동료들의 대부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여, 그리고 원칙의 논쟁에 대한 해결 방식으로 분리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은 그를 복음주의 전통의 주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미국 교회에서 유일한 남부 장로교인이었다.

 

  메이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근본주의 지도자들과 달랐다. 그는 폭 넓은 문화적 관심을 가졌으며, 기독교 교리는 참된 경건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메이첸의 일차적인 관심이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는 것이었지만, 이차적인 그의 관심은 기독교 신앙을 가치 있는 사상 체계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메이첸의 동료이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 부문에서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전기 기술자 Ned B. Stonehouse는 말하기를, “만일 이제까지 고결하고 관대하고 온화하며 상냥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메이첸이었다”고 하였다.

 

  위와 같이 메이첸의 생애와 그의 사상을 살펴보았지만, 핫지(Hodge)나 메이첸(Machen)의 영향을 받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가 기독교의 체계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했던 성경의 인용들과 그 내용들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러한 성경 인용과 본문의 내용에 대한 일치 부분들에 있어서는 후대의 신학자들이 더 잘 연구하여야 할 임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 참 고 문 헌 >

 

김기홍,「프린스톤 신학과 근본주의」, (서울: 아멘서적), 1992년.

그레샴 메이첸,「기독교 인간관」, 채겸희 譯, (서울: 나침반社), 1996년.

데이빗 F. 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과 화란 개혁주의」, 박용규 譯, (서울: 엠마오), 1996년.

브래들리 J. 롱필드,「미국 장로 교회 논쟁」, 이은선 譯, (서울: 아가페 문화사), 1992년.

홍치모,「신학지남」- 통권 제252호, (서울: 신학지남사), 1997년.

「교회사대사전 I」, (서울: 기독지혜사), 1994년.

「기독교 대백과 사전 - 제 6권」, (서울: 기독교문사),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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