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배의 역사
1. 초대 교회의 예배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성찬식에 사용하는 길고 훌륭한 기도가 있음을 본다. ‘디다케’(Didache)는 주후 1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는 문서인데, 이 문서의 둘째 부분은 세례를 어떻게 집례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배에 대한 수칙을 가르치고 있다.
비투니아(Bithynia)의 지사로 있던 역사가 플리니우스(Plinius)는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리스도인들이 정한 날 이른 아침마다 모여서 그리스도에게 신으로 화답하는 찬송을 하며,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는 등 죄를 범하지 않기로 맹세한다는 것이며, 죄를 범하지 않기로 맹세하는 일은 주일 예배에 죄를 고백하는 기도였거나 아니면 십계명을 외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도 있다.
2세기 중엽, 즉 주후 15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Justin)이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보낸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변증서에서 기독 신자들이 ‘태양의 축제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모여 드리는 예배 순서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된 예배 순서로는 최초의 것인지도 모른다.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기독교 예배 형식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제 3세기의 예배
한 세기 전 저스틴이 마련한 예전과 비교할 때 말씀 예배와 성례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예배의 근본 구조나 성격에는 별 변화가 없으나 좀 더 의식이 부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와 회중들간의 인사가 그런 것이다. 즉 목사가 “주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계실지어다.” 혹은 “여러분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하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있을 지어다”라고 기원하면, 회중은 “당신의 영에게도 함께 있을 지어다”라고 화답한다.
3세기에는 보다 예전의 형식이 많이 첨가되기는 했어도 예배하며 기도 하는 데는 아직 상당히 자유롭게 하는 편이었다.
3. 제 4세기의 예배
313년 황제 콘스탄틴의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서부터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예배와 목회에서 맡는 임무를 따라 주교, 장로, 집사, 서리집사, 성경봉독자, 성가대원 등으로 교직자들의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서서히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예배에서 상징하는 것이나 예전을 좇아 하는 행위가 점차로 신약보다는 구약적인 전통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로마의 국가적인 제의(祭義)의 요소와도 접합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초기의 예배 정신이 왜곡되게 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예배에는 교회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화가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심미적(審美的)인 것을 추구하는 헬라 문화(Hellenism)권에 있는 동방교회에서 그러한 점은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예배에서 요한계시록에 묘사되고 있는 천상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배 광경을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신비성을 위하여 예배실을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듯이 철책 휘장으로 두 부분의 장소로 구분하였다.
동방교회가 서방교회보다 예배를 더 현란하게 드리게 된 이유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으로는, 서방교회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은혜의 교리가 발전한데 반하여, 동방에서는 보다 율법주의적인 공로주의에 머물었던 것을 그 이유로 들기도 한다.
4. 중세 로마 교회의 미사
서방에서는 로마가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므로 로마의 예배 의식이 보편화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지방에 따라서 여러 형태의 예전이 사용되어 오다가 주후 500년 이후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예배 형식이 있게 되었다. 즉 로마의 의식(the Roman rite)과 골 의식(the Gallican rite)이 있었는데, 로마의 의식은 주로 로마에서만 사용된 반면에, 골 의식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른 형식을 갖게 되었다. 이 두 예배 형식은 피차 영향을 주고 받았으나 9세기에 이르러 페핀(Pepin)과 샬마뉴(Charlemagne)의 간섭으로 골 의식은 자취를 감추고 로마의 의식으로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예배 형식은 조금씩 변화를 격다가 트랜트회의(1562)의 결과로 1570년 에 ‘로마의 미사 예전(Missale Romanum)'이 제정되면서부터, 로마 교회 내의 예배 의식은 통일을 보게 되었다.
5. 종교 개혁자들의 예배
중세 교회는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성경봉독을 위한 본문(lections)은 정해져 있었으나 이를 생략하는 것이 예사였다.
예배는 라틴어로 인도하기 때문에 회중은 사제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찬송의 뜻도 알지 못했다. 회중은 찬송도 같이 부르지 못하고 시종 침묵할 뿐이었다.
성찬의 떡과 잔은 매번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신도들은 사제가 떡을 들어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것을 미신에 찬 눈으로 그냥 보거나 혹은 혼자 기도함으로써 참여하는 것을 대신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일년에 한번 그나마도 떡만을 맛봄으로써 성찬에 참여하였다.
1) 루터의 예배
루터(1483~1546)는 로마 가톨릭의 의식 자체보다는 미사를 제사로 보는 일과 그럼으로써 파생되는 모든 폐단에 대하여 반대를 제기하였다. 루터는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성례(sacrament)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결코 구약적인 의미의 제사장이 아니며 모든 믿는 자가 다 제사장임을 주장하였다.
1525년의 ‘독일 미사’에 실린 예배 순서를 참고하자면 아래와 같다.
찬송 또는 시편(독일어로)
키리에(Kyrieleison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Kollecten Gebet, Collect, 예배 시작을 위한 짧은 기도)
찬송
복음서(곡조를 부쳐 낭송)
신앙고백의 찬송(독일어로)
설교
주기도(풀어서 하는 기도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
성찬 제정의 말씀
배찬(성찬을 받는 동안에 ‘거룩’-Sanctus나 찬송을 부름)
성찬 후의 기도
아론의 축도
2) 영국 교회의 예배 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처음에 신학적인 면에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발단이 되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고 난후 대주교로 있던 크랜머(Cranmer,1489~1556)는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하여 예배 의식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주로 1552년의 것을 따른 것인데, 영국성공회에서 지금까지 별 수정 없이 쓰고 있다. 거기에 있는 성찬 예배의 순서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 말씀의 예배
주기도(목사가 혼자 기도한다)
정결을 간구하는 기도(Prayer-collect for purity)
십계명과 키리에스 (Kyries, 영어로)
기도(Collects, Prayers)
성경봉독 : 서신에서
신앙고백(니케아 신조)
설교
■ 성찬식
성찬 준비(Offertory, 성경구절을 읽고는 기도하고, 떡과 포도주를 준비한다)
중재기도(Intercessions)
권면과 초대(Exhortation and Invitation)
죄의 고백과 사죄의 선언(General Confession and Absolution:"Comfortable Words")
너희 마음을 위로 향하라(Sursum corda)
봉헌의 기도(Consecration Prayer)
서문경(序文經, Preface)과 ‘거룩’의 화답(Sanctus); '겸손히 나아감을 위한 기도‘;
기념하는 말씀; 성찬 제정의 말씀
배찬
주기도(다같이)
감사의기도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
평화의 기원과 축도(아론의 축도)
3) 쯔빙글리의 예배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종교개혁을 표방한 그 어느 교회보다도 철저하게 로마 가톨릭의 예배 요소를 배제하고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중세 교회보다는 회중에게 더 자주 성찬에 참여하도록 했다. 일년에 네 번 성찬식을 베풀었다.
4) 부쩌의 예배
부쩌(Martin Bucer, 1484~1531)가 1530년 교구장(superintendent)이 되기 이전까지는 슈트라스부르크는 루터교회의 영향하에 있었다.
예배 의식은 루터교의 다른 예배 의식 보다 옛날의 형식을 많이 보유한 것이었다. 그 후 예배의 개혁은 부쩌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시편과 찬송을 독일어로 부르게 하였으며, 라틴어의 예배 순서 명칭들을 서서히 독일어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사’를 ‘주의 만찬’(성찬)으로,‘사제’(priest)는 목사로, ‘제단’(altar)은 ‘성찬상’(holy table)으로 개칭하였다.
5) 칼빈의 예배
(1) 칼빈의 예배 개혁
칼빈의 1542년의 제네바 예배서의 예배 순서는 그의 1540년의 슈트라스부르크 예배서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데 좀더 간소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2) 칼빈의 예배관
첫째로, 칼빈은 예배가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에서는 루터보다 더 철저하였다. 루터는 예배 의식에서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허용하는 편인 반면에, 칼빈은 예배와 모든 교회 생활을 성경에 합하는지를 검토하고 철저히 비판하였다.
예컨대 제 2계명, “너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충실하고자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미술품들을 제거하였다.
둘째로는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예배의 이해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예배는 올바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예배는 반드시 회중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 음악에서도 회중들이 분명히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악기의 사용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또한 루터와는 달리 민요나 세속 음악을 교회 음악으로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찬송가 대신에 시편에 곡을 부처 부르도록 하였다. 화란 개혁교회 가운데는 현재도 이러한 전통을 엄격히 지키는 교회가 있다.
셋째로, 칼빈은 예배는 사람들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인격의 성장이다. 덕성 함양에 이바지할 수 없는 것이 교회 내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며, 예배가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검토하는 기준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및 충성과 또한 이웃 사랑 등이 증대되는가의 여부라는 것이었다.
넷째로,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점에 훨씬 엄격하였다. 예배는 순진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모든 과장된 허식을 세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하고, 성만찬식에서 화려한 것들과 생명력이 없고 연극 같은 잡동사니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6. 영국 청교도들의 예배
한국 장로교회가 청교도들의 신앙적 전통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영국 청교도들의 예배에 대한 이해와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예배 시에 예배의식서에 있는 기도문을 따라 기도 하기보다는 자유롭게 기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더 좋아하였다.
7. 미국 교회들의 예배
유럽인들은 17세기 초반부터 미국으로 이주하여 새 대륙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주민들은 그들이 살던 유럽 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따라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같은 교파 교인들이 각기 다른 모국의 언어 및 문화적 배경을 따라 여러 그룹의 분리된 교회로 출발하였다.
유럽에서 소위 비국교도(Non-conformists)에 속하는 신자들의 교회들은 대부분 신대륙에서 이민 초기부터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그들의 종교 사상이나 예배 의식을 자유롭게 펼치거나 개혁할 수 있었다.
침례교도들이나 퀘이커들 혹은 신령파(Spiritualists) 에 속하는 교회들은 본래 예전을 따라 드리는 예배 의식을 배격해 왔다. 그런데 영국 국교회의 예배 의식을 반대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이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영국의 청교도들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예배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상징물들을 배제하는가 하면,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을 마다할 뿐 아니라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일까지도 반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칼빈의 견해와도 다른 것이었는데, 청교도들의 예배 개혁은 다른 교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교회들의 예배는 대체로 비예전적이고 청교도적이며 복음주의적이었다. 예배당에는 강단 한가운데 강도상이 있고 성찬대는 그 아래 일반 회중들이 서는 바닥과 같은 높이의 위치에 놓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1년에 4번 성찬식을 가졌으며, 십자가를 제외한 예술품이나 상징물, 촛불 등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여러 면에서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 사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목사와 평신도간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평준화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었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교회력도 지키지 않고 , 겨우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는가 하면, 이것마저도 지키기를 마다하는 교회가 있었다.
미국의 교회들이 이와 같이 자유로운 예배를 모색해 오다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예배에 대하여 새로운 반성을 하게 되었다. 미국 교회들이 예전과 의식적인 예배를 거부하고 영적이며 자유로운 예배를 추구한 결과 종교개혁자들의 시도를 훨씬 넘어서 예배에서 장엄함과 아름다움과 짜임새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인식하고 반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교회들은 예전의 복고 운동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었다.
http://cafe.daum.net/selck/HJbE/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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