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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존 플라벨)

존 플라벨

by 김경호 진실 2011. 9. 5. 09:23

본문

신자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존 플라벨)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요 17:23).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시켜 주시는 목적과 의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죄인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전달해 주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함축하고 있으며, 모든 친교 또한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적용시키는 성령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삼중의 연합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연합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이요, 두 번째 연합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이요, 세 번째 연합은 신자들 상호간의 연합입니다.

1. ‘아버지께서 내 안에’ 이 연합은 영광스럽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연합이요, 나머지 두 가지 연합의 기초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마치 소중한 친구가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른 친구 안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은 본성과 속성의 일치와 동일에 있어서,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신 그리스도 안에 본질적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은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도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신인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을 탁월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다른 사람 안에 그렇게 거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골 2:9).

2. ‘내가 저희 안에’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나는 신비적으로 하나입니다. 아버지께서 중보자의 자격으로 서 있는 나에게 신성과 성령의 충만함을 전달해 주심으로써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성령을 어느 정도 전달해 줌으로써 저희와 나는 하나입니다.

3. 여기에서부터 신자들 상호간의 세 번째 연합이 기인합니다.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주님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동일한 성령께서 저희 모두에게 임하여 계시고, 저희 모두를 나에게 똑같이 연합시킵니다. 마치 살아 있는 몸의 각 지체가 머리에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 연락되어 있는 것처럼, 저희들 사이에는 친밀하고도 소중한 연합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두 번째 연합, 곧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니다. 이 두 번째 연합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리를 인출하게 됩니다.

교리. 그리스도와 모든 참된 신자들 간에는 순전하고 소중한 연합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연합의 특징을 우리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자연이라는 책으로부터 네 가지 우아하고 생생한 비유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네 가지 비유 중 그 어떤 것도, 또한 그 네 가지 비유 모두 힘을 합쳐도 이 연합의 신비를 온전하고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여기에서 ‘합하다’라는 동사로 쓰인 헬라어 ‘코라오’는 ‘아교 등으로 단단하게 붙이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에 대한 희미하고도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교에 의한 연합은 밀접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5절에 사용된 ‘쉼휘토스’라는 헬라어에 암시되어 있는 접수와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로마서 6장 5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이식되거나 접목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접수와 대목 사이의 연합은 생명력 있는 연합이긴 하지만, 이 비유 역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접수는 대목보다 더 탁월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더 훌륭하고 더 탁월한 부분인 접수의 종류에 따라 나무의 이름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접붙임을 받는 대목인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보다 무한히 더 탁월하시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비유는 혼인에 의한 연합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비록 혼인에 의한 연합은 대단히 친밀하고 긴밀하여 사람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지만, 이런 연합도 영구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연합은 어느 한 편의 죽음에 의해서 깨어질 수 있고 또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배우자는 이전에 그토록 친밀했던 그 배우자와 아무런 교통이나 아무런 교제도 없이 홀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죽음으로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영원무궁토록 계속됩니다.

4.네 번째 비유는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영혼에 의해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머리와 몸의 연합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러나 비록 한 영혼이 모든 지체를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지체를 머리에 똑같이 접합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에서는 모든 지체가 똑같이 긴밀하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도 강한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에게 긴밀히 연합되어 있습니다.

1.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런 연합의 실체와 특징을 숙고해 봅시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런 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1)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교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 사도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여기에서 ‘사귐’은 서로 한 가지 동일한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 두 사람이 그 즐거움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때문에 누리고 있는 사귐 또는 동료 의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귐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입니다(히 3:14). 또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동료요 친구요 제자들이라고 불려집니다(시 45:7).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하게 죽어야 할 육신을 취하셨고 우리에게 불멸하는 생명을 주셨다는 측면에서만 그렇게 불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료요 친구요 제자들로 불리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바 성령의 기름 부으심, 곧 성령의 모든 은혜와 특별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이 교통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고 있는 연합에 전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의존합니다. 이것은 마치 나무 가지가 수액을 얼마나 많이 빨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그 가지가 뿌리와 더불어 얼마나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연합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그 어떤 교통도 그 어떤 교제도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3장 22절, 23절 말씀을 볼 때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맺고 있는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2)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신자가 자기 외부에서 온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로마서 3장 24절 말씀을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그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은 로마서 4장 23절, 24절 말씀을 볼 때 분명해집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거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절대 전가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에 의해서 명확하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공로를 나누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반박하며 우리 안에 본래부터 내재하는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교황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모든 트집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음이 여기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트집을 잡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의 돈으로 내가 부자 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명예로 내가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런 트집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우리의 보증인이거나 우리의 남편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물론 베드로는 바울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똑같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두 사람은 똑같은 머리에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인 책임과 법률 해석에 있어서 당사자와 보증인은 한 사람입니다. 머리와 몸도 한 몸입니다. 가지와 뿌리도 한 나무입니다. 다른 나무에 접붙여진 접목이 본래 자기와는 전혀 다른 그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흡수하여 먹고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다. 왜냐하면 접목은 대목에 이미 접붙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교감은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연합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함께 웃고 함께 우는데, 이것이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연합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골 1:24). 바울의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이 어딘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고난은 완전한 고난이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러나 위의 두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법적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단 번에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법적 자격은 우리의 중보자이셨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완전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중보자의 자격으로 고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와 지체들 안에서 지금도 고난을 받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모든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 지금도 고난을 받고 계십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비적 몸인 교회 안에서 받으시는 고난은 그 가치와 중요성에 있어서 이전에 단번에 받으셨던 고난과 동등하지도 않으며 동일한 목적과 용도를 위해서 곧 그 적합한 공로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는 목적과 용도로 의도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몸의 지체가 아플 때 머리도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점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안에서 받으시는 모든 고난도 정당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행전 9장 4절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발에 비유할 수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핍박하던 사울을 향해 하늘로 좇아 다음과 같이 다그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신비적 연합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을 느끼실 수 있겠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4)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방법은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적 연합을 입증해 주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지만 성도들은 자기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과 똑같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는 그들의 죽은 육체에게도 강력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런데 만일 지금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긴밀히 연합시켜 지체와 몸으로서 서로 연합하도록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면, 최후 부활의 날이 이르러도 성도들은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런 연합은 지극히 숭고한 신비요 우리는 그런 신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에게 있는 연약한 이해력에 눈 높이를 맞추고 이 연합의 특성을 힘써 설명하고자 합니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런 연합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부여됨으로써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친밀하게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합의 결과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신적이고 신령한 생명은 모두 본래 성부 하나님 안에 있으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되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안에 있던 ‘조에’, 곧 소생케 하며 생명을 주는 능력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한편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법이 절대 없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으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일이 반드시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이라는 지극히 중대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 6:57).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곧, 그리스도 편에서의 성령과 우리 편에서의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두 가지 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적 연합의 특성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부터는 좀 더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저는 이 신비적 연합이 아닌 것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려 합니다. 제가 이것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 신비적 연합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미리 차단하려 함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연합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연합입니다. 무신론적인 이 세상은 이런 신비적 연합을 단순한 공상과 허황된 상상의 산물로 치부하며 조롱합니다.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신비적 연합의 실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연합은 신체의 각 지체들과 머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육체적 연합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사람의 인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인격을 구성하는 영예를 누리는 육체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의 복되고 거룩한 육체뿐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연합은 본질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합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신적 존재 안에 성도들의 존재가 완전히 흡수 통합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도들의 존재가 신적 존재 안에 완전히 흡수 통합되어 성도들은 신적 존재가 되고 그리스도로 변화한다고 제멋대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적 연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본성과 탁월함에 있어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무한한 간격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 연합은 언약적 연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단순히 언약으로만 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언약적 연합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 연합은 언약적 연합의 필연적 결과로 발생하며 언약적 연합에 의존하고 있는 연합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연합은 사랑과 애정으로 형성되어 있는 윤리적 연합도 아닙니다. 가령, 우리는 친구를 일컬어 또 다른 나라고 부릅니다. 또한 우리는 연인을 일컬어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은 이런 윤리적 연합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는 사랑과 애정으로 형성되어 있는 윤리적 연합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윤리적 연합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비적 연합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사랑과 애정으로 형성되어 있는 연합을 일컬어서는 윤리적 연합이라고 부르고,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연합을 일컬어서는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우리의 애정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킬 뿐이지만 후자는 우리의 인격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킵니다. 후자의 특징은 다음 아홉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징 1 물론 이런 연합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일 본질로 만들거나 동일 인격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합은 우리의 인격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가장 친밀하게 결합시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골 1:24). 신체적인 몸이 아니라 신비적인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즉, 신비에 감싸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의 신체적인 몸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는 마치 신체적인 몸의 각 지체들이 그 몸의 머리와 맺고 있는 관계와 같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맺고 계신 관계는 마치 신체적인 몸의 머리가 그 몸의 각 지체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체적인 몸의 머리와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도들도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런 연합은 오크나무와 그것을 휘감고 있는 담쟁이덩굴의 하나됨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은 접목과 대목의 하나됨과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은 착생에 의한 하나됨이 아니요 결합에 의한 하나됨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무리 친밀하다고 해도, 영혼과 몸이 아무리 친밀하다고 해도,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서로에게 친밀히 연합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특징 2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이런 신비적 연합은 완전히 초자연적인 연합, 곧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 1:30). 가지가 자기 자신을 다른 나무에 접붙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킬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요 하나님의 단독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혼을 연합시켜 주는 끈은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즉, 그리스도 편에서는 성령이시고, 우리 편에서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믿음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켜 주는 끈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바 우리 자신의 행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은 믿음이 우리 자신의 의지의 능력만으로도 추출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믿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믿음이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물론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의 행동은 우리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9,20).

특징 3 신비적 연합은 직접적인 연합입니다.
여러 가지 수단과 도구들이 배제되었다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데는 많은 수단과 도구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적 연합을 일컬어 직접적 연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지체들 사이에 연합의 친밀함이 차등없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인 몸에서는 어떻습니까? 신체적인 몸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머리에 더 가까운 지체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머리와 덜 가까운 지체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은 가장 큰 자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자도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합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특징 4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신비적인 연합은 근본적인(필수적인) 연합입니다.
이 연합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맺는 순종의 모든 열매도 이 연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이 연합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특권들과 편안한 권리 주장에도 필수적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이 연합은 영광에 대한 우리의 모든 소망에도 필수적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그러므로 만일 이 연합이 깨어진다면 우리의 모든 열매들, 우리의 모든 소망들, 우리의 모든 특권들도 단숨에 깨어지고 맙니다.

특징 5 신비적 연합은 매우 효력 있는 연합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를 소생시키고 그 생명을 우리 안에 보존시키며 유지시키고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영혼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일은 성령의 유효적 역사인데, 이런 연합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이 구절에서 ‘역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에네르게이아’는 모든 지체 안에 생명을 공급해 주는 성령의 유효적 역사를 가리키는데, 이것에 관하여 사도는 마치 자신이 새 생명의 첫 번째 발현, 즉 신령한 생명력이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영혼에 확산되었음을 전제한 것처럼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생명을 처음 만들어 낼 때도 필요했지만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도 동일하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안에 주어진 새 생명은 자주 시험에 넘어지고 부패한 본성에 사로잡히는 우리 때문에 매우 심각한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주어진 새 생명이 전멸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이유를 친히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셈입니다.
“뿌리인 나에게 생명을 주는 수액이 있는 한, 나에게 붙어 있는 가지인 너희는 결코 고사하지 않을 것이다.”

특징 6 신비적인 연합은 불변하는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영원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신비적 연합은 다른 모든 연합을 능가합니다. 사망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친밀한 연합을 파괴합니다. 사망은 친구와 친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긴밀한 연합도 파괴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망은 영혼과 몸의 연합도 파괴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사망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연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루어져 있는 이 연합은 무덤에서도 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이 연합의 견고함이 그것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위험을 능히 이겨낸다고 자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과 신성의 실재적 연합(hypostatical union) 속에 계셨던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비적 연합 속에 있는 것은 서로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의 실재적 연합은 사망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과 몸 사이의 자연적 연합이 파괴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실재적 연합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영혼과 몸이 연합되어 있는 이 신비적 연합도 사망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 사이의 연합은 사망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과 몸의 연합도 사망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이루어져 있는 이 신비적 연합은 사망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간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특징 7 신비적 연합은 명예로운 연합입니다.
사람에게 부여될 수 있는 가장 존귀한 명예는,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인성에 지금까지 부여된 가장 고귀한 명예는 인성이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2위격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실재적인 연합을 이룸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각 개개인에게 지금까지 부여된 가장 고귀한 명예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비적인 연합을 이룸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고관대작으로 출세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존귀한 일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존귀한 일이겠습니까? 어디에 그 영광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성도들이 장차 그런 영광을 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30).

특징 8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적 연합은 매우 큰 위로를 주는 연합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 연합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우리가 죽어 있을 때나 모든 견고한 위로의 토대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환난이나 결핍이나 곤경이 임할지라도 그들은 이 연합 안에서 풍성한 위로와 도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내 것이고 나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구속을 받은 신자가 이런 연합으로부터 어찌 도움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런 연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살펴 주실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니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나를 보살펴 주실 것이다. 또 그리스도는 내 머리이시다. 자기 자신의 지체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져 주는 것은 그의 임무이다(엡 1:22,2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지체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신다는 점에서 그들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통치하신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이시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정말 편안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또 모든 난관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특징 9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신비적 연합은 과실을 많이 맺는 연합입니다.
사실 이 신비적 연합의 직접적인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혼인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 되기 이전에 우리가 맺었던 모든 열매들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도 더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이전에 사람이 행한 모든 일은 복음적으로 선한 일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말씀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심으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열매를 많이 맺는 뿌리이시며 자기 안에 거하는 모든 가지들로 하여금 열매를 많이 맺도록 만드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특징 10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 신비적 연합은 풍성하게 만드는 연합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합하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 그리스도의 모든 풍요를 소유하게 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믿음의 팔이 약한 사람들도 얼마나 부요하고 위대하신 분을 붙잡고 포옹하게 되는지요!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2). 그리스도에게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사용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 그리스도의 모든 약속도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 1:20). 그리스도의 모든 섭리도 우리를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리스도의 영광도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추론 1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런 연합이 존재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부여해 주신 존엄함은 얼마나 탁월한 것입니까! 옛날에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는 제국의 황제가 되는 명예보다 교회의 회원이 되는 명예를 더 낫게 여겼는데, 그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세속적인 모든 존엄함과 명예보다 더욱 탁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천사들에게 부여해 주신 영예보다 더욱 더 탁월합니다. 천사들은 참으로 크게 존엄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대면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이 신비적 연합 한 가지에 있어서는 신자들이 천사들보다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비적 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신자들은 신령한 생명을 받아 그들의 영혼이 소생케 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이와 같은 신령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베소서 1장 10절 말씀처럼 장차 ‘아나케팔라이오시스’(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리스도 아래 함께 모일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머리도 되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각각 다른 의미에서 그들의 머리이십니다. 천사들에게 그리스도는 통치하시고 지배하시는 머리이시지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통치하시는 머리이신 동시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머리이십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중요하고 매우 영광스러운 신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봉신들과 귀족들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랑스러운 배우자요 아내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신자는 가장 위대한 천사보다도 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치 귀족들이 왕비를 받들어 섬기는 일을 자신들의 특권과 영광으로 간주하듯이 영광스러운 천사들도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자신들의 특권과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소명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직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장차 구원을 상속받게 될 성도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섬기는 영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하인일지라도 하인은 주인의 상속자를 예우하며 섬기는 일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고관들 앞에 감히 나아간다면 몇몇 오만한 고관들은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그들을 자신의 면전에 두실 것이고 천사들은 기쁨으로 그들을 수종들 것입니다.

추론 2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그처럼 순전하고 영구적인 연합이 형성되어 있다면, 신자들의 은혜는 결코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멸은 은혜의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불가분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나무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주는 수액이 뿌리에 있는 한, 나무의 가지는 그 수액을 흡수하여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생명을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한 묶음으로 묶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결코 죽을 수 없는 것처럼 신자들 역시 결코 죽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해서 신자들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사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물론 신자들의 영적인 생명이 강력하고도 격렬한 많은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어떤 신자들의 경우에는 영적인 생명이 쇠퇴기에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의 존재 자체를 결정 짓는 바 영적인 생명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들이 있고 영적인 생명의 행복에만 해당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기쁨, 그리고 영적인 위로 등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손실되거나 그 정도가 크게 감소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생명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들은 불사 불멸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결코 작은 위로가 아닙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경고된 것처럼 은혜의 방편조차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을 때에도, 바람 부는 날에 메마른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듯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에도(딤후 2:18), 사람들의 영혼과 몸의 자연적인 연합이 사망으로 말미암아 해체될 때에도, 이와 같은 은줄이 풀어질 때에도,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묶고 있는 금줄을 단단히 묶여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3).

추론 3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연합은 그토록 매우 친밀한 연합입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에 넉넉한 손길과 후한 마음으로 경건한 모든 신자들의 궁핍과 필요를 덜어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위대하고도 강력한 동기가 아닙니까! 신자들을 도와주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돕는 일이니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의 동정이나 도움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은 영광 중에 있는 모든 부요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10).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궁핍하고 핍절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 자신도 궁핍과 핍절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된 교회와 함께 배고프시며 목마르시며 추위에 떠시며 고통을 당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이 소생하고 위로를 누리면 그리스도 자신도 새 힘을 얻으시고 기운을 차리시며 위로를 누리십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재(主宰)이시면서도 때때로 빈털터리이기도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이 자신의 궁핍과 가난인지 말씀하셨고 또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는 지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5-40).

이 구절과 관련하여 어떤 위대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의인들이 그리스도의 칭찬을 놀랍게 받아들이며 답변하는 말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칭찬을 들은 의인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것이 의인들의 대답이었다. 질문 형식으로 된 의인들의 답변은 그들이 자신들이 도움을 베풀어주었던 사람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친밀함, 아니 하나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궁핍한 그리스도인을 돕고 구제하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 자신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궁핍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마음을 닫고 돕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을 구제하는 일이 필수적임을 알려주는 어떤 강력하고 힘찬 논거들이 이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는지 숙고하도록 하십시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는 한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하는 모든 일은 곧 그리스도 자신에게 직접 행한 일이 됩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베풀어진 모든 친절한 행위를 인정해 주시면서, 심지어는 빵 한 조각까지 인정해 주시면서 의인들의 행위를 지극히 자상하게 열납해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친절한 행위를 명하실 수 있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 즉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박탈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행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절한 행위를 호의로 받아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여러분은 순종의 한 가지 종류 또는 한 가지 행동이, 곧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가 순종의 모든 의무들 가운데 뽑혀져서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의 진실함을 입증하는 시금석과 증거로써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 동안 다른 성도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보여준 사랑의 여부에 따라 최후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성도들은 그 머리의 지체라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 긴밀한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여, 또는 이런 관계 때문에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는 동료 지체들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곧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 긴밀한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여, 만일 여러분에게 빵이 있어 그리스도에게 나누어 드릴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또 만일 여러분에게 마실 물이 있어 그리스도에게 나누어 드릴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갈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런 연합은 다른 모든 논증들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설득하여 성도들을 섬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생각건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버리도록 그리스도인을 설득하는 데는 많은 웅변술이나 수사학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은 말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추론 4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단일한 신비적 몸을 이루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상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 신자들의 불친절한 모든 행동들은 얼마나 무정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입니까! 이런 행동들은 마치 손이 자신의 생명과 감각, 그리고 자신의 활동과 힘의 원천이 되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사단이 사악한 사람들을 배후 조종하여 그리스도를 친다면, 사단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손으로 그리스도를 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사단의 시험이 성도들을 넘어뜨려 그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다면, 사단은 그리스도 자신의 손으로 그리스도를 치는 셈이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떤 우화에 등장하는 독수리와 나무에 그리스도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우화에서 독수리는 자기 자신의 깃털로 깃을 달고 있는 화살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탄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우화에서 나무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던 큰 가지를 잘라 만든 쐐기로 결국 자기 자신이 잘려졌다고 탄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들이 얼마나 악하고 불성실한 것인지는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머리로서 그들과 맺고 계시는 긴밀한 관계를 보고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자신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은택들을 보고 좀 더 구체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이런 죄들을 범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상하게 할 때 거기에는 다음 몇 가지 일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상태 아래 매여 있을 것입니다(엡 4:16).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거늘, 우리는 우리의 범죄를 통하여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려드립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짓입니까! 이 얼마나 불성실한 짓입니까!

둘째로, 그들은 자신들을 통치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통치하시는 머리이십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지혜로 여러분을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언제나 신실하게 여러분을 인도하시거늘, 여러분은 이런 그리스도에게 범죄로써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여러분의 범죄는 결국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혜를 따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리스도보다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믿고 따르기로 작정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셋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형편을 살펴 주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된 신자들의 행복과 안전을 위하여 모든 마음을 기울이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모든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여러분 자신의 지혜를 따라 지도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여러분의 안전과 필요를 위하여 날마다 하늘의 지도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물론 사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볼 수 없는 곳에 계시며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며 여러분에 관한 모든 것을 친히 지시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언제나 진실하게 돌보시거늘, 여러분은 범죄함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이 모든 은혜에 대한 합당한 보답입니까? 선을 악으로써 보답하다니요?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넷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영광이 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상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영광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천사들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리는 모든 영광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아주 작은 불명예라도 끼쳐드리는 일은 얼마나 비열하고 부도덕한 일인지요! 이것을 깊이 숙고하십시오. 아, 이것을 깊이 숙고하고 애통하십시오.

추론 5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그처럼 순전하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들에게는 모든 유익한 것들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특별히 자기 자신의 몸을 정성껏 돌보고 필요를 공급해 줍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신비적 몸을 돌보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는 본성의 법칙을 어기고 우리 자신이 몸을 학대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궁핍함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사방을 둘러봐도 도와줄 이 하나 없이 그저 막막하기만 할 때에 오직 약속에만 의지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한 신자일지라도 만일 그 신자가 그토록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에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마음에 지속적으로 묵상하기만 한다면, 그는 그런 묵상 안에서 지극히 감미로운 위로와 만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 1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이 아무리 많고 아무리 깊을지라도 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사소한 사정까지 다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모든 고통들을 하늘로부터 지켜보고 계시며 내가 그것들을 느끼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그것들을 이해하고 계신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묵상 2 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내 모든 고통들을 아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친히 체휼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15). 내가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당하신다. 그리스도와 나는 매우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애절한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 목마를 때에 … 나그네 되었을 때에 …”(마 25:35).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신자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신자들을 향해 품고 계시는 동정심과 측은지심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이 곤경에 처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곤경을 인하여 신속하게 슬퍼하시고 깊이 체휼하시기 때문이다.

묵상 3 그리스도께서는 내 궁핍함을 아시고 체휼하실 뿐만 아니라 내 모든 궁핍함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아니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을 수중에 가지고 계시다. 이는 성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다 주셨기 때문이다(눅 10:22). 하늘과 땅의 모든 보고는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묵상 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 원수 되는 사람들에게도 현세적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도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다(시 73: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외인들을 향해서도 관대하시거늘, 어찌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굶기시고 그가 자기 자신의 몸처럼 애지중지하는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묵상 5 이전에도 나는 여러 번 곤경에 처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곤경 가운데서도 내가 멸망하도록 방치해 두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리신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언제 어디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리셨던가?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나는 곤경에 처했었고 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매우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고난의 산에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자주 뵈었던가!

묵상 6 그리스도께서는 절대 나를 떠나지도 않으실 것이며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과 보장을 해 주셨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앞에서도 묵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내 모든 궁핍을 다 아시고 체휼하시며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에 충분한 것들, 아니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넘치는 것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원수 되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게 베푸시며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버리신 적이 없으시고 앞으로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한단 말인가? 분명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추론 6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머리가 됨으로써 서로 그처럼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성도들을 해치고 핍박하는 사람은 얼마나 중대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얼마나 위험스러운 짓을 자행하는 것입니까!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초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의로우신 하나님은 아무 죄도 없이 압제를 당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이 반드시 변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며 늘 그 일을 자처하십니다. 설령 아무 죄도 없이 압제를 당하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이 압제를 당하는 한 하나님은 자처하여 그 사람을 변호해 주십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지체된 사람들이 아무 죄 없이 압제를 당할진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더 확실하게 그들을 변호해 주시겠습니까?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하나님께서는 박해자들에게 쏠 화살을 미리 준비하시느니라”(시 7:13)

아, 여러분의 손과 팔을 들어올려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신자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을 대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러분의 손이 말라비틀어지고 여러분의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나가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최후 심판의 날에 여러분의 죄과를 낱낱이 밝혀낼 책에는 여러분이 신자들에게 행한 난폭한 행동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신자들에게 내뱉은 거친 말들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후 심판의 날에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5). 활을 쏠 때는 여러분이 어떤 활을 쏘는지 조심하도록 하고, 표적을 향해 쏘기 전에 여러분의 표적을 확실히 해두도록 하십시오.

추론 7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이처럼 긴밀한 연합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신자들은 매우 평안하게 자신의 육체를 떠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여러분은 죽음에 갇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건대,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도 되셨습니다(고전 15:20).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어떤 지체가 무덤 안에서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어떤 지체가 지옥에 떨어져 불구덩이 속에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음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고 있는 신비적 연합은 결코 해체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죽음의 고통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이 신비적 연합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삶을 살아가면서 각별한 탁월함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죽음 앞에서 비범한 도움과 특별한 위로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추론 8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이처럼 긴밀한 연합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런 연합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자연적이고 합당한 결과들을 시금석 삼아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시험해 보고 확인해 보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시금석 1 여러분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참으로 주어져 있습니까? 이런 뿌리가 없으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이런 뿌리가 없으면 그리스도로부터 거룩의 수액을 공급받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심겨진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본받도록 심겨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바 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5,6).

시금석 2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의 지체로 매우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목숨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의 신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오면 손과 팔이 서둘러 머리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존중은 언제나 더 강렬합니다.

시금석 3 그리스도의 지체된 사람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복종하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통치한다는 사실은 지체들이 복종한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대로 행하며 우리 자신의 정욕이 우리를 다스리는 법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와 연합되어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시금석 4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된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열매를 많이 맺는 뿌리이신 까닭에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성장하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전혀 없습니다.

추론 9 신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숙고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바 모든 은혜들과 의무들을 가시적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자들은 그렇게 행할 의무를 크게 짊어지고 있습니다.

의무 1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세적인 형편을 어떤 모양으로 정해 주시든 우리는 우리의 현세적인 형편에 대해서 크게 만족하고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현세적인 형편 때문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을 후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없어질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주어졌습니다.

의무 2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된 여러분은 이제 참으로 존귀한 사람이 되었으나 여러분의 심령은 크게 겸손하고 겸비해야 옳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여러분을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자긍하지 마십시오.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보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단지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것뿐입니다.

의무 3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이처럼 크게 존귀하게 높이셨으니 마땅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큰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끄러움을 당해야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높아질 수 있다면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도록 하십시오. 언제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려도 아무 소용 없다고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려 가장 특별하게 마음을 찢으며 죄를 고백할 때에 이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십시오. 곧, 그렇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

의무 4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구의 소유이며 이 세상에서 누구를 대리하는 사람인지를 기억하면서 모든 일에 있어서 지극히 신중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불의하고 불경건한 행동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의무 5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극히 위대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고 그 연합을 통하여 여러분 모두는 동일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동료 지체들이 되었으니 마땅히 여러분은 서로 더불어 화평하는 데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교회의 일치를 호소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3,4). 사도 바울이 이렇게 호소하면서 사용한 논증은 이방 사람들에게 결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니 모든 참된 신자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바를 따라 한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로 연합되어 있으며 부르심을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의무 6 여러분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복된 연합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와 은혜는 물론이고 그리스도 자신도 실제로 여러분의 것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마땅히 크게 기뻐하고 충만한 위로를 누려야 합니다. 이 복된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얼마나 연약하고 작은 것입니까! 그러나 그 작고 연약한 믿음의 팔로 여러분이 끌어안게 되는 그리스도는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십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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