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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칼빈의 구원론 연구 / 신원균목사

구원론

by 김경호 진실 2011. 12. 18. 21:48

본문

칼빈의 구원론 연구

신원균 목사

Ⅰ. 서론

Ⅱ. 본론

A.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B.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

차이

1. 개혁파의 견해

2. 루터파의 견해

3. 로마 카톨릭의 견해

C.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이해

1. 구원론에 대한 원칙들

a.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b.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d.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지도 않으며, 고해성사와

같은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구원론

a. 기독교 강요(1559)의 전체구조 가운데 3권의 바른 이해

b. 기독교 강요(1559) 3권을 통해 살펴본 구원의 서정

(1) 말씀과 성령의 신비적 연합에 관하여

(2) 신앙에 관하여

(3) 중생, 회심, 성화에 관하여

(4) 칭의에 관하여

(5) 예정, 견인에 관하여

Ⅲ. 결론

 

 

Ⅰ. 서론

 

우리는 흔히 도르트 신조를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일컫는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도르트 성직자들이 당시 이단이었던 알미니안주의자들을 대항할 때 칼빈의 가르침을 근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잘못을 가리기란 오늘날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구원에 관련된 그들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쩌면 칼빈의 가르침이나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보다 널리 보급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의 내용을 읽고 이것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인지, 아니면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인지 판단해 보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믿어 같은 신앙과 신앙의 같은 순종 가운데 그의 생의 마지막까지 보존된 자들을 그러한 자로서 보존하시기로 결정하였던 결정이나 의지가 선택의 유일하고 온전한 결정이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그럴 듯 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믿어’라고 하기 때문에 마치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리고 선택을 인정하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예지 예정을 말하고 있고 신앙의 공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도르트 성직자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부터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아담 안에서 그와 함께 타락하였으며 죄가 있고 부패한 그의 씨와 후손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하셨는데, 같은 기뻐하심 가운데 그들을 은혜롭게 그리고 능력있게 부르시며, 믿음으로 은혜를 주시며, 의롭다 하시며, 중생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시며, 그리고 이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이것들 이후에 결국에는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하나님의 것으로 특별히 정하셨다”. 이 말은 결국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제한된 백성을 무조건으로) 선택하여 주시고,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구원의 전 과정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사고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칼빈의 가르침을 좇은 도르트 성직자들의 대표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본 글은 먼저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서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의 차이를 살피되 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의 도움을 받기로 하겠다. 끝으로 칼빈의 구원론에 대해서 살필 때, 구원론에 관한 대원칙이라고 말할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피고, 그의 기독교 강요(1559) 구조와 구원론을 살피기고 하겠다.

본인이 칼빈의 구원론을 짧은 식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글로 작성하여 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본인이나 독자들이 본래 알미니안주의적 가르침이라는 토양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개혁주의적 가르침을 소개받았기에 이 일에 더욱 전념하여 좋은 결실을 맺길 소원할 뿐이다.

 

Ⅱ. 본론

 

A. 구원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구원의 질서를 정하셨음을 안다. 구원의 질서(ordo salutis)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거룩한 지혜와 은총으로 실행하시기 위하여 정하여 놓으신 순서 혹은 과정을 의미한다. 구원의 질서에 대한 순서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르쳐지고 있다.

구원의 순서는 전적으로 주권적 은총에 의하여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의미에서 은총론은 곧 예정론이며 예정론은 곧 은총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성령의 구원사역의 순서를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와의 결합(또는 연합), 소명, 중생, 홰개,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광화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이러한 순서로 구원의 질서를 이해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작성되었다.

제10장 유효한 부르심

제11장 칭의

제12장 양자됨

제13장 성화

제14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

제15장 생명에 이른 회개

제16장 선행

제17장 성도의 견인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제19장 하나님의 율법

제20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그런가 하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구원의 질서에 따른 개념들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석만 박사에 의하면 칼빈이 그의「기독교 강요」제3권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그 방법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생기며 어떤 결과가 따르는가?”라는 큰 제목 아래 25개의 장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고 설명한다.

제1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한 것은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하다.

제1항.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는 끈으로서의 성령에 관하여

제2항. 그리스도에게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심에 관하여

제3항. 성경에 계시된 성령의 명칭들에 관하여

제4항.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신앙에 관하여

제2장 신앙 : 신앙의 정의와 속성에 관하여

제3장-제5장은 중생, 즉 회개에 관하여

제3장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① 회개는 믿음의 열매라는 것(1-4항). ② 회개의 정의(5-9항). ③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화는 아니다(10-15항). ④ 회개의 열매는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 죄를 용서받음이며, 회개는 평생 계속되는 것(16-20항). ⑤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주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전적으로 거부하며 전인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21-25항).

제6장-제10장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하여

제11장-제16장 칭의에 관하여

제17장-제18장 복음과 율법에 관하여

제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제20장 믿음의 훈련에 관하여

제21-제24장 예정에 관하여

제25장 최후의 부활에 관하여

조석만 박사에 의하면 이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앙을 회개의 앞에 놓고 있으며(이러한 경우는 회개를 신앙의 열매로 봄) 신자의 성화의 생활과 중생, 즉 회개(중생과 회개를 동일시 함)를 계속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칭의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석만 박사는 성령의 구원사역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논리적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과 논리적 체계적 이해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우에는 두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하는데, 첫째는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의 활동이 다양하여 교리학적 개념과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과, 둘째 구원의 질서의 과정에 있어서 상호 관계가 다양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Louis Berkhof의 도움을 받아 구원론에 대한 개혁파와 루터파, 로마 카톨릭의 견해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개혁주의 내에서의 다양성의 차원이 아닌 인간론적인 이해의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B.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견해 차이

 

Louis Berkhof는 성경이 구속 사역의 적용에 따르는 정확한 순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에 대한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들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로마 카톨릭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이해하고 칼빈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큰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파의 견해

Louis Berkhof에 의하면 개혁파 구원론의 출발점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한다. 그 구원의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영원히 전가된다. 이렇게 법적인 요소가 도덕적인 요소보다 우선하고 있으므로 멕코비우스(Maccovius), 컴리(Comrie), 카이퍼 1세와 2세(A. Kuyper Sr.와 Jr)는 구원의 순서를 중생이 아니라 칭의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칭의’라는 명칭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선택받은 자에게 관념적으로 전가되는 것에 적용시킨다.

게다가, Louis Berkhof는 개혁파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를 논의할 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모든 용어들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

Louis Berkhof는 루터파의 견해에 대해서 말하기를,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는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서(a paret Dei) 행해지는 것들보다는 인간 편에서(a parte hominis)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신앙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인간 편에서 능동적 원리 즉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여 구원의 순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피퍼(Pieper)는 “구원의 획득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복음에 대한 신앙이 생성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파의 견해는 당시 칼빈의 시대에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즉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을 곡해한 인물이다. 조석만 박사의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지적 받고 있다.

오시안더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원질이 심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고난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며, 카톨릭교회가 말하는 성령의 거룩한 성질과 새로운 은혜의 주입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부여되거나 주입되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의 그 자체라고 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본질적 의이며, 신적 본질이며,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이상의 표현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낯설기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조석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오시안더의 주장을 비판했다. 오시안더의 이러한 주장은 “칭의를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본질이 주입되는 것으로 보는 일종의 신비주의인 동시에 범신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오시안더를 가리켜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주장에 대해서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칼빈의 보다 예리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데, “오시안더는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거저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뚜렷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오시안더에 대한 평가는 신앙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는 루터파의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지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로마 카톨릭의 견해

Louis Berkhof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순서에 대한 논의 보다 선행된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되는데,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도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써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칭의에 대한 예비 과정은 다음 7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함, (2)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자각함, (3)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함, (4)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함, (5) 죄를 혐오함, (6)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겠다고 결단함, (7) 영세를 희망함. 여기에서 믿음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단지 여타의 예비과정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신앙이란 단지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을 의미하며(fides informis), 주입된 은혜(fratia infusa)에 의해 부여된 사랑을 통해서만(fides caritate formata) 칭의의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Louis Berkhof는 우리가 로마 카톨릭의 주장으로 인해 칭의가 값없이 주어지며, 선행된 예비 과정에 의해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루터파의 견해 보다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데, Louis Berkhof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의 은사는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함으로써 보존되며, 주입된 은혜에 의해서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차후의 모든 은혜와 영생에 합당한 공로-실제적 공로(meritum de condigno)-를 이룰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구원에 합당한 능력을 부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죄의 용서를 계속 보유하게 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칭의의 은사는 불신앙뿐만 아니라 중죄로 인해 상실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저들이 고안해 낸 것이 칭의의 은사는 참회, 고백, 사죄 선언, 보속 행위로 구성된 고해 성사에 의해 재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죄 의식과 영원한 형벌은 사죄 선언에 의해 제거되지만, 현세적인 형벌은 단지 보속 행위에 의해서만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당시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부당한 견해를 비판하기를 쉬지 않았고, 그가 더욱 비중을 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을 증명해야만 했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야만 했고, 따라서 인간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는데 힘을 기울여야만 했으며, 나아가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거나 고해성사의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가르쳐야만 했다.

C.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이해

 

1. 구원론에 대한 원칙들

 

a.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는 로마 카톨릭의 사상은 후대에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리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 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 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반면에 칼빈의 입장을 고수했던 도르트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결코 복음을 외침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 -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뿐이며,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해야 옳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도르트 성직자들의 입장이란 결국 칼빈의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뒷부분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소개될 것이다.

 

b.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인간의 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가운데 제3권 11-16장에서 칭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가운데 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내용에 대하여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각 항의 제목을 보아서도 이러한 내용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8. 사람과 행위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12. 반대자들의 핑계

13. 잉여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14.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15.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 업적은 있을 수 없다.

16.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17.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8. 그러나 선행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19.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21.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이상과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단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과 선행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립해 줌으로써 오해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따라서 칼빈은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공로를 쌓았다면, 칼빈의 견해는 행위를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아나가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겸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c. 인간의 공로 사상은 배격되어야 한다.

칼빈이 인간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기 위해 힘을 써야만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15장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전복시킨다”. 단순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지지 받을 수 없는 것이며, 고대 교부들 또한 저들의 견해와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에서 인간의 공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성경 말씀은 히13:16절과 집회서(외경) 16:14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증명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

칼빈은 로마 교회가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가르침마저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저들의 잘못의 극치는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의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돌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칼빈처럼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어찌 감히 그분의 공로를 가로챌 수 있겠는가.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10).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30).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위와 같은 칼빈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 아니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고 어떻게 고해성사나 보속의 교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d. 택자에게 주신 칭의의 은사는 상실되지도 않으며, 고해성사와 같은 어떠한 내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는 성경의 말씀을 뒤로하고 인간의 공로를 앞세웠던 무리들은 역사 가운데 계속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도 죄를 공중 앞에서 자백해야만 한다는 로마 교회와 같은 가르침 때문에 문제가 되었었고,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유전된다고 하는 ‘가계 저주론’과 같은 것들이 성도들을 혼란케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이러한 잘못된 교리는 이미 13세기 이노센트 3세(1198-1216 재위)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시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써 성경에서부터 출발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단지 교회가 타락하던 시점에 나타난 후대의 인간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로마 교회가 이처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야고보서 5:16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는 것은 고해성사를 합당하게 입증하는 말씀이며, 고백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는 사제들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야고보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의 견해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상호 죄를 용납함으로써 형제로서의 화목을 다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설명했듯이 그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그는 상호간의 기도와 상호간의 고백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백의 이점이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 형제의 기도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데 있어서 소극적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이해하는 자들은 당장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귓속으로 속삭이는 고해성사라는 것을 여기서 추리해 내는 카톨릭의 어리석음-아니 이것은 사악이 아닌가?-에 대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야고보서 5:16은 고해성사와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에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엉뚱한 가르침에 반대하여 칼빈은 누가복음 18:13에 나오는 세리의 고백을 제시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을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를 잘 담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6을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 해야 한다. 그렇게 간구 할 때, 그리고 죄들을 버릴 때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형제나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험담한 사람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기꺼이 고백하며 통회하고,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회개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사람과 화목해야 하며, 사랑으로 그를 영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의 사제들은 고해성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이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보속의 교리’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사악한 짓인가? 심지어 주교와 추기경 그리고 교황이 발부하는 면죄부의 종류에 따라 죄가 사면되는 기간까지 다르다고 한다.

 

2.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구원론

 

a. 기독교 강요(1559)의 전체구조 가운데 3권의 바른 이해

이미 지난 「칼빈의 기독론」이라는 글 가운데 소개한 바와 같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이해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오해를 피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칼빈의 기독론을 다룸에 있어서 먼저는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대개 칼빈의 기독교 강요(1559)를 1권은 성부(혹은 신론), 2권은 성자(혹은 기독론), 3권은 성령론(혹은 성령의 내적 사역), 4권은 교회론(혹은 성령의 외적 사역)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 강요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칼빈의 기독론에 관해서 연구할 때 제2권만을 살피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2권의 제목에 알 수 있듯이 제2권의 하나님(Dei)은 제1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이다. 단,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구속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Dei Redemptoris)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은 ‘성령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식. 그것이 주는 유익과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효력”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목에서 우리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출발점이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따라서 인간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의 가르침은 루터파와 같지 않고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나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다른 성격임을 깨닫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효력은 성부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폈듯이 구원론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살펴야 할 것이다.

b. 기독교 강요(1559) 3권을 통해 살펴본 구원의 서정

(1) 말씀과 성령의 신비적 연합에 관하여

조석만 박사는 칼빈의 신비적 연합(결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칼빈은 구원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근거를 그리스도와 결합이라 하며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활력은 성령의 숨은 사역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비적 결합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 신비적 결합이 일체의 구원의 은혜에 선행하는 동시에 주관적 자각적 행위에 선행하는 잠재의식적 사실이라고 한다”.

Louis Bekhof는 말하기를 “칼빈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구원의 혜택들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서술하여 이를 매우 중요한 진리로 강조한다”. 또한 Louis Berkhof는 신비적 연합의 교리에 대한 루터교와 개혁파 신학의 차이에 대해서 “루터교인들은 신비적 연합의 교리를 ‘인간론’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따라서 신비적 연합이 신앙에 의해 확립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개혁파 신학의 신비적 연합 개념을 공정하게 다룰 수 없다. …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이 중요한 주제를 보다 공정하게 취급한다”고 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 1장 제목에서 “그리스도의 효력은 성령의 신비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고 함으로써 신비적 결합을 논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성자)께서는 아버지(성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원하시는데,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띠로서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와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로서 성령의 작용이 필요한 이유는 성령의 작용이 없다면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받으신 것을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또한 가지 얼마나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롬 11:1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이와 같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라고 하였고, 우리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 되어야만 그가 가지신 것이 우리와 상관이 있는데, 그러한 신비한 역사를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누리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신비적 결합의 필요성을 가르친다.

신비적 결합차원에서 이해해야할 신학적 혹은 성경의 내용들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부르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셔서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로마서 8:11에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들로 인하여 찬양을 아버지께 돌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꼭같이 돌리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때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 요한복음 7:37에서 목 마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는 것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와 그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심을 논할 때에 성령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칭호로 부른다고 한다. “양자의 영”(롬 8:15),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고후 1:22; 엡 1:14), 의로 말미암는 “생명”(롬 8:10), “물”(사55:1; 44:3; 요 7:37; 겔 36:25), 사람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시기 때문에 “기름”과 “기름 부음”(요일 2:20, 27), 우리의 사악한 육욕을 태우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시기 때문에 “불”(눅 3:16),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에 “샘물”(요 4:14),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 11:21)과 같이 다양한 칭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칭호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오용되고 있는 ‘성령의 기름 부음’, 혹은 ‘성령 세례’, ‘성령 충만’에 대해서 칼빈의 이해를 좇아 접근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결국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 신앙에 관하여

①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이며, 특별히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칼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소개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그리고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에 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설명하고자 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무신앙으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을 일으키셨던 것이다(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해당). 이 외의 칼빈이 제시한 요일 4;13절, 요일 3:24절, 요 14:17절 등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석만 박사는 개혁파 신앙관은 예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예정대로 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신앙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이 신자 자신의 행위나 태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오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조석만 박사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신앙이란 신자 자신의 행위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께 대한 전인적 인식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파 신앙관, 즉 칼빈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1에 잘 반영되어 있다.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

② 신앙의 요소 가운데 지적 요소를 강조한다.

Louis Berkhof는 신앙은 전인적 인간의 행위인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요소가 있다고 한다. 첫째, 지적 요소(notita, 지식)이다. ‘이 신앙의 지식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말씀하신 모든 것,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진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의미한다. 카톨릭의 견해에 반대하여 이러한 확실한 진리가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입장이 고수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둘째, 감정적 요소(assen년, 동의)이다. 셋째, 의지적 요소(fiducia, 신뢰)이다.

이 세 가지 신앙의 요소 가운데 Louis Berkhof는 의지적 요소를 신앙의 요소 중 정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경건한 무지, 맹신을 대적하여 지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은 종교개혁이 무엇으로부터의 개혁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지식의 이해에 대한 칼빈의 표현이다.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묻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믿음의 ‘지식’이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며,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외에, 칼빈의 신앙에 관한 가름침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 그리고 진정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버림받은 자(사울왕과 같은 경우)들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다.

(3) 중생, 회심, 성화에 관하여

① 중생, 회심, 성화의 관계

연세대 이양호 교수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중생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중생은 성화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했다. 조석만 박사는 이양호 교수보다 자세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중생의 의미는 기독교에서 언제나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칼빈의 경우는 아주 넓은 의미로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여 사람이 새롭게 되는 과정 전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와 중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성화는 회개의 열매로 설명하는데, “우리는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고 했다.

② 회개에 대해서

칼빈은 회개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라고 하였다.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새로운 삶으로써 성립된다고 가르친다. 칼빈의 회개의 두 요소에 대한 내용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88-90문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88문 : 참다운 회개 또는 회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옛 사람이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

제89문 :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죄를 마음 깊이 슬퍼하고 그것을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

제90문 :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즐거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회개가 죄의 용서가 되는 근거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한다. 사 56:1; 59:20; 55:6-7; 행 3:19절에서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할지라도 회개 자체가 죄 용서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당시 로마카톨릭의 거짓된 가르침을 드러내고 성경의 바른 개념을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③ 성화에 대해서

칼빈은 당시 재세례파가 자신의 가르침과는 달리 완전성화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재세례파의 그러한 완전성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시대 가운데도 빈야드와 같은 단체들을 통해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친숙한 표현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데 부심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한다. … 재세례파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쓸데없는 공포심은 내버리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칼빈의 평가는 냉혹하다. 칼빈은 “현대의 어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중생 대신 어떤 광적인 무절제를 불러 일으킨다”고 하였고,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맹목적인 정욕에 눈이 어두워 상식을 내버린 자들”이라고 말했다.

(4) 칭의에 관하여

Louis Berkhof도 그의 책에서 “칭의의 근거는 로마 교회와 종교 개혁자들, 개혁파 신학과 알미니우스파간의 가장 주요한 논쟁점들 중 하나였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칭의의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부정적으로 칭의의 근거는 인간의 어떤 덕목이나 선행에서 발견될 수 없다. 둘째, 긍정적으로 칭의의 근거는 오직 칭의시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된다.

앞에서 로마 교회의 인간의 공로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비뚤어진 것인가를 소개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 받기 전 인간은 율법 하에서 저주를 받은 인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인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다음과 같이 칭의에 대해 가르친다. “칭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당시 칭의의 교리와 관련하여 루터파 신학자였던 오시안더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일에 기독교 강요를 많이 할애하였다.

칼빈에게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칼빈은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된다”고 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고 했으며,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행함에 대해서 항상 문제시 되는 성경 말씀은 야고보서 2:14-17절일 것이다. 게다가 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아브라함이 행함 때문에 칭의를 받은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칼빈의 지금까지의 견해는 상당히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로마서 4:1-3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 17장 12절에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칼빈은 야고보서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로마서와 잘 조화됨을 말한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않고 또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야고보서가 말한 것은 결코 위의 견해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두 견해를 조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고보가 사용한 논증의 성격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야고보의 경우 문제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롭다 하심 받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되이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가르침이 결코 모순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의의 전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살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로마서의 표현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야고보서의 표현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칼빈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성경 가운데 간혹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고 소개하는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칼빈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4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The efficient cause)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The meterial cause)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The formale cause)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The final cause)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까지는 앞선 은혜들이 원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5) 예정, 견인에 관하여

‘예정론’을 말하면 많은 학자들이 칼빈을 대표적 인물로 가르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이는 칼빈이 예정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까지 말한다. 칼빈의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다룸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를 살펴보길 원한다. 첫째는 예정론을 한국교계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고, 둘째는 예정론의 위치와 구원론의 관계, 셋째로 선택과 견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음

기독교 교리 가운데 예정론이 가장 특징적인 교리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많다. 특별히 예정론은 개혁파 교회, 즉 장로교에서 가장 많이 가르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 말씀 가운데 소개되고 있는 예정론에 대해서 칼빈이 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정론에 대해서 오늘날 교계에서는 칼빈의 기대와는 달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 글은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대신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기독교 인구가 아직 20% 미만인 다원종교 사회이다. 교회는 아직도 성장 도상에 있으며 선교의 과업을 충실히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는 네덜란드의 목회자처럼 교인들의 신앙적인 성숙을 위하여 설교하며 교인들을 돌아보며 “Seelsorce" 개념의 목회만을 할 수는 없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전도와 선교의 과업도 아울러 감당해야 한다. 한국과 같은 선교지에서는 복음주의적인 전도 설교가 필요하며 주효하다. 개혁주의 목회자는 개혁주의 신학 역시 소위 복음주의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본래 균형과 체계를 갖춘 신학이지만, 다른 신학과 차별되는 특성을 말하다 보니까, 예를 들면 예정론 등 논란이 되는 교리를 변증하다 보니까 예정론과 더불어 하나님을 중심하는 신학을 더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특징으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가 내포하는 복음주의적 요소를 강화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위의 내용은 결국 예정론이 선교와 전도, 그리고 설교에 있어서 한국 교인들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신학자였던 보에티우스(Voetius)는「교회개척론」(De plantatione ecclesiarum)에서 선교의 목적은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되었던 것은 그의 섭리에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였다고 김영규 교수는 가르친다. 따라서 김영재 교수가 말한 것,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선교와 전도의 과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예정론과 같이 성숙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의 내용은 맞지 않는다고 한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정론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만들며, 무분별한 변덕자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주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칼빈은 예정론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신 자비’를 드러냈고,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지 예정이 거절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것을 인간이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지 예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이런 이해를 뒤로 한 채, 칼빈이 말하는 예정에 관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만든다고 욕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견해와는 달리 조석만 박사는 예정론을 칼빈 한 사람의 저작품이 아닌, 성경이 주장하는 바의 진리로 가르친다. 이것은 칼빈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라 정통적 역사적 기독교의 공동신조에 표현되어 있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양대 신학대학원의 김영규 교수는 예정론의 실제적 가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필요성을 가르친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이런 입장은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 그러나 …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

이러한 견해는 앞서서 다루었던 김영재 교수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와 전도는 물론이고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잘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칼빈은 예정론을 다루면서 두 가지 위험성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헛된 호기심을 버리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침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예정론의 위치와 구원론의 관계

바빙크의 말대로 예정론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문제는 반드시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 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의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바빙크는 초기의 많은 신학자들도 선택을 신론과 관련해서 보다는 구원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정론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로부터 원인에로, 열매로부터 뿌리에로 추론해 나가기를 애호했다고 한다. 즉, 신앙과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여 선택에로 추론해 갔다고 한다. 즉 신앙과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여 선택에로 추론해 간 것이며, 이는 예정론을 위로와 확신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바빙크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접근법을 가리켜 종합적 접근방법이라고 했다. 종합적 접근방법은 다음과 같은 성격이다.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다음의 김영규 교수의 가르침은 이러한 바빙크가 말하는 칼빈의 종합적 접근방법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③ 선택과 견인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견인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큰 확신을 더해줄 것이다. 칼빈은 견인이 첨가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경험하기에, 견인의 확신이 없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견인에 대한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며, 선택된 자에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칼빈은 견인에 대한 교리의 내용을 선택과 함께 생각하고 있다.

요한복음 6:37 말씀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외에도 요한복음 10:27절을 인용함으로써 선택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 확신이 있을 것을 가르친다. 반면에 마태복음 15:13과, 요일 2:19절을 제시함으로써 선택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일지라도 결국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Ⅲ. 결론

구원론은 성도의 삶에 너무나 밀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관심이 있다고 바른 가르침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론이나 인간론, 기독론을 다루며 살폈던 핵심 내용이 총체적으로 녹아져 있지 않다면 구원론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믿고, 거룩하게 되고,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칼빈은 이 문제를 그렇게 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시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자신의 공로로 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앞에서 구원의 질서에 대한 여러 입장이 있음을 확인했다. 먼저는 루터주의나 로마 카톨릭의 견해처럼 개혁주의와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으로는 개혁주의 안에서도 구원의 순서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학자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칼빈의 구원론과 관련된 여러 개념과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Louis Berkhof의 구원의 순서를 토대로 글을 전개해 보았다.

칼빈의 구원론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의 공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떠한 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의롭다 칭하여 주신 은혜는 상실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같이 인간의 고안된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서정을 살피면서 본인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회개, 신앙, 성화와 같은 과정도 소명, 중생,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지 인간의 의지의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글은 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이 부분에 있어서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오늘날 잘못된 형태의 신앙 생활을 바로잡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으로 접근해 나가길 소망하며 이 글을 마치길 원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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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khof, L., 조직신학 下, 이상원․권수경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Calvin, J., 기독교강요 中, 김종흡 외 3인 역, 생명의 말씀사, 1998.

-------., 야고보서 주석,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성서교재간행사, 1995.

-------., 로마서 주석,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편, 성서교재간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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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갑, 칼빈신학의 정수와 그 한계는,「목회와 신학 9월호」, 1999.

조석만, 조직신학 下, 도서출판 잠언, 2001.

기독교 연합신문, 제657호(2001. 10. 14일)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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