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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악의 근원 (존 칼빈)

존 칼빈

by 김경호 진실 2012. 1. 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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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악의 근원

(창 3:1-3)“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현재 삶의 양상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들은 비참한 일들에 숱하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가장 빨리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낫다고 부연했습니다. 실상 우리가 더 멀리 바라보지 못할 때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인 이상 존중되어야 함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삶에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우리의 신뢰를 그에게 두며, 하늘의 삶과 영원한 유업을 열망하도록 준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비참한 일들만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모태에서 나오지 않은 편이 좋고 아니면 빨리 사라지는 편이 낫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론 :  세상 모든 악의 근원-외부에 있지 않고 인간 본성에 기인함

그러나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핵심까지 깊이 고찰하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것에만 집착하여 헛되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중에 가장 비참한 일은, 우리의 영혼이 너무도 부패해서 우리가 총명과 이성을 통해 갖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무지와 어리석음일 뿐이요, 우리의 욕망과 감정은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반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너무도 죄의 저주받을 예속 상태에 억류되어 있어서 오직 온갖 악밖에는 내놓을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이 허약하여 쉽게 악에 기울어진다고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는 우리에게서 제거될 수 없는 이성에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즉, 그들은 우리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악들에만 주목했고 내부의 부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이 교리에 유의해야 하며, 우리가 온갖 악덕에 빠지고 변명하지 않아도 될 때만 선악을 분별하는 이런 악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오류에 둘러싸여 있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그릇되기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여기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그들의 창조주에게서 이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한 모든 것은 이 기원과 이 원인에서 유래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조상과 그의 아내의 타락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모세가 다루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검토해야 하며, 이어서 우리는 거기에 담겨 있는 본질을 요약할 것입니다.

1. 사탄의 도구였던 뱀

(1) 뱀이 사탄의 도구가 된 까닭-가장 간교/현명했기에

첫째로 모세는 “뱀이 다른 모든 짐승들보다 간교하고 현명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을 비교해본다면 일견 다른 짐승들이 뱀보다 더 명민하고 술수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께서 쓸데없이 “뱀처럼 지혜로워라”(마 10:16)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한 말을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뱀은 그가 사탄의 도구여서 하나님께 징벌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대로 이점에서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뱀에게서 모세가 말하는 그런 간교함을 보지 못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간교라는] 단어는 우리가 인간들에 대해서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좋은 의미로, 때로는 나쁜 의미로 쓰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 참 신중하구나”라고 말하는데, 달리 보면 그 사람은 영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뱀에게 그런 간교함이 있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뱀에게 그런 정신을 다른 짐승들보다 탁월하게 부어주셔서 뱀이 지략과 신중함에 있어서 다른 짐승들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탄은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뱀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떤 것이 가장 탁월한지를 염탐하고 주로 그것에게 말을 건네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이 어떤 곳에 축복과 은총을 베푸시는가에 따라서 장소와 모든 상태를 염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사탄은 모든 노력을 다해 선을 부패시키고 그것을 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를 유혹하고 또 여자로 하여금 그의 남편을 동일한 타락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해, 뱀이 다른 어떤 짐승보다도 자신에게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 뱀이 과연 말을 했을까?

이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우롱하는 자들은 모세가 뱀이 말했다는 식으로 하나의 우화를 이야기한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아는 대로, 자연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것을 소극(笑劇)으로 삼아 성경에 대한 신앙을 저버립니다.4 그들은 하나님이, 그가 원하시면, 아무런 몸체 없이도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을 때처럼, 공중에서 음성이 들릴 때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요? 들리고 이해된 것을 발설한 입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하신 하나님은 외적 수단이 없이도 말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이 발람의 나귀로 하여금 말하게 했음을 압니다. 이와 같이 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뱀이 여자와 논쟁하러 온 것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자는 그것이 특별하고 기적적인 일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사탄의 이 환상과 속임수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이 갑자기 말했다고 기록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고려함으로써 그것을 너무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뱀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장한 발람의 예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여기서 알레고리로 말했다고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가 언급한 비방을 피하기 위해 모세가 뱀이라고 명명하면서 사탄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런 짐승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적절하지 못하며, 흔히 말하듯, 통용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모세가 백성을 얼마나 대강 가르쳤는지를 압니다. 성인과 아이 그리고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도 변명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잘것 없음과 연약함에 맞춰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모든 짐승들 중 가장 간교한 뱀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들을 때, 사탄이 뱀을 그에게 적합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동시에 우리의 조상 모친도 이것이 모종의 기적이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잘 알았지만, 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자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 호기심은 그녀를 혼란케 하여 하나님을 망각하게까지 했습니다. 이어서 그녀 역시 하나님이 정해주신 도를 넘어 높이 오르려는 이 야심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바로 이것이 여기서 주목해야할 내용입니다.

(3)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이렇게 사탄이 짐승을 사용했을진대, 오늘날 그가 우리를 악으로 끌고 가기 위해 자신의 용도에 이용하지 않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읍시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이런 방종이 있음을 본다면, 더욱 주의하고 부지런히 경계합시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가 사탄을 막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가 용감하게 싸우고 우리의 신앙이 점검되도록,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단련시키기를 바라고 천하가 시험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금과 은이 불로 정련될진대, 그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신앙이 온갖 종류의 시련으로 순수해져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사탄의 모든 매복과 공격에 대해 승리하고 있음을 입증하기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되 하나님이 우리 이웃과 짐승들과 기타의 것들을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는지를 알고 살아가도록 주의합시다. 그 목적이란 우리가 무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가 우리에게 베푼 복을 활용하며, 그의 은혜가 우리로 더욱 용기 있게 그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자극해서 그에게 매달리고 모든 우리의 안식과 즐거움을 그에게 두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목적에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이런 분별력이 우리에게 없을 경우, 확실히 마귀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아 우리를 줄기차게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사탄의 전략

(1) 의심 유발

이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순종에서 돌이키게 하고자 했을 때 그가 취한 절차를 봅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못 먹게 금한 것이 사실이냐?” 그가 “사실이냐”라고 말한 것은 마치 하나님의 금지사항에서 모종의 불합리를 찾고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것을 금하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너희가 이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무슨 시기심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가 무슨 선수를 쳤다는 것인가? 그가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의 식사감이나 양식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그가 너희를 위해 만든 모든 것을 예외 없이 사용하도록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땅이 인간이 쓰기에는 모든 보화로 풍부했다고 말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위에서 밝혔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무익한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바로 여기가 사탄이 “사실이냐”라고 말하면서 하와를 이끌고 가려는 곳입니다. 그녀로 하여금 이것이 온통 이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상상하도록, 그래서 이 금지가 아무런 권위에 합당하지 않으며 따를 필요가 전혀 없다고 결론을 내리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실이냐”라고 말하면서 의심하는 체합니다. 왜냐하면 속담에 쓰였듯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처음부터 뿔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환상을 가질 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폐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로 변형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뱀처럼 꼬불꼬불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금지사항은 그의 의에 적합하지도 않으며 또 그것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토론으로 들어갑니다. “사실이냐?” 그런데 우리가 의심하자마자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그리고 즉시 뒤집어집니다.

(2) 인간의 지혜를 부추김

한걸음 더 나아가,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 순종에서 이탈시키고자 그들을 모종의 이성으로 데려와서 “누가 하나님을 부추겨 너희에게 이것을 금하게 했는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이것은 너무 어리석고 너무 미련한 것이리라”고 말합니다. 일견 이것은 일리 있어 보입니다. 즉 하나님이 무언가를 명하거나 금하실 때,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리하시는지를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것이 우리를 첫 조상에게 임한 이 반역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훈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단순히 듣고 아무런 토를 달지 않은 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순하게 되는 법을 배운다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요, 우리의 망상에 따라 지혜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이 사람들을 맹목적이 되게 하는 우둔함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색깔이 보이는 경우가 아니면, 그의 말씀을 승인하고 그를 조종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교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지혜, 즉 모든 어리석은 자만(自慢)을 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에 주의하고 아무런 반론 없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 말씀에 동의하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가 논쟁으로 들어가는 즉시 하나님의 권위는 그만큼 약해집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보기 좋은 것 외에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그의 영향력은 제한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하는지 유한한 피조물이 알고자 하는 것이 가당할까요? 사실 어린아이가 볼 때 아버지가 잘못 생각하는 듯 할 때도 아이는 하나님이 윗사람으로 세운 아버지를 따르되 겸손히 순종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종들과 신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항상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종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랫사람에게서 받는 신망과 존경보다도 더 나은 신망과 존경을 우리에게서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을 깎아내리고자 할 때, 그가 왜 명하거나 금하는지 묻지도 반박하지도 않고서는 굴복하고자 하지 않을 때, 이것이 하늘과 땅을 섞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바르게 하나님을 따르고 그에게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느 편에서 시작해야하는지 알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의 의지가 우리의 모든 이유가 되며, 우리가 결코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것을 아는 것은 실로 적법할 것입니다. 종종 그가 어떤 것이 우리에게 금지되는 이유를 덧붙이듯이 말입니다. 그가 음란, 도둑질, 식도락, 폭행, 거짓 증거, 신성모독이 가증스럽다고 말하면서 음란은 몸과 영혼의 부패임을 지적하며, 사람들이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혼인의 법을 갖지 않을 경우 자신들을 야수와 흡사하게 만든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또 우리가 이웃을 해하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야함을 지적하며, 우리가 서로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이 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고 이웃의 선[복]을 증진시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우리가 누군가를 속이고 모종의 능욕과 억압을 행할 때, 그것은 자연 질서를 부패시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여 보다 잘 그의 뜻에 동의하고 순종하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규칙을 따르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3.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1)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들어야

아무튼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설령 그곳에 세상의 온갖 부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신 입으로 이것저것을 진술하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바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대해서 들을 때 그것이 그들의 뇌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오! 나는 이 교리가 옳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이성이 무지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각으로, 즉 자신의 억지로 판단하는 어떤 오만한 미친 자의 욕구로 하나님을 축소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른 많은 주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결하고 명백한 성경 교리가 제시될 경우 [그는] “오! 난 이것을 소화하지 못해”라고 말합니다. “너는 누구냐? 토기가 어찌 그것을 만든 자를 대적한단 말이냐? 너는 너의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토기보다 훨씬 못하다. 이와 같이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고 그의 불변의 진리를 너의 반박으로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악마적인 대담함이 아니겠는가?”(롬 9:20 참조). 우리는 이 악이 너무도 흔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교훈을 주목하는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설령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것에 부조리가 있는 듯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모든 공상들을 중단해야 하며, 우리 위에 모든 지배권과 우월권을 가지신 이에게 굴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추론과 논쟁으로 맞서지 말아야

다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추론과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단 한마디도 우리에게 그만한 무게를 가져야 하며, 현자가 되고자 하는 미명하에 그에게 대적하는 범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지배력과 그의 뜻이 우리를 묶어두는 지배력을 할 수 있는 한 축소시키려는 이 악마적인 지혜를 조심합시다. 이미 말했듯이,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이것저것을 말씀하실 때 무슨 목적을 지향하시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모든 비밀을 계시하실 생각이 없는데도,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적합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만과 허영으로 부풀어있는지를 압니다. 설령 주님이 우리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더 탁월한 정신을 주었고, 우리에게 보다 많은 명민함과 앎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성령으로 붙들림 받지 않는다면, 모든 속인들에게서 그 예를 보듯이, 우리는 분명 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뻔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성령으로 다스리고 인도하는 자들 이외에 온유한 자들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령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풀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어느 정도 억제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고 이해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아야 하며, 그것을 놀라운 것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성 바울이 우리에게 준 권면을 따라, 하나님의 학교에서 유익을 얻고 참 지혜에 이르기 위해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게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용된 것 이상으로 알고자 하는,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는, 이 어리석은 교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위해 적합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채 그것에 머물러있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 생길 때면, 이런 저주받을 지혜를 단념합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의 말씀이 금과 은보다 더 정련되어 점도 흠도 없이 된다고 기록되었듯이(시 119:72, 140 참조), 우리 역시 그에 의해 그렇게 가르침 받는다는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 경박하여 쉽게 믿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한쪽 귀를, 사탄에게 다른 쪽 귀를 내어주며 아무런 확고함을 갖지 못한 채 언제나 온갖 바람에 흔들리고 요동하는 갈대가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과 유혹자들이 스스로 하늘에서 보냄 받아 임무와 사명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듯이 언제나 사기꾼들은 그의 이름과 칭호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교리에 전념하는 것은 경솔히 오락가락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신앙을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두자마자, 사탄은 이것저것으로 우리를 부추기는 바, 그때 우리는 모든 의심을 멀리 돌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을진대, 우리는 마땅히 그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라는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처음 등장하여 우리 조상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그들과 또한 우리를 멸망과 파멸로 이끌어가고자 했다고 한 모세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물론 사탄이 온갖 종류로 변모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속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무한한 술책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사탄의 실제적인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의 순전한 단순성에서 우리를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주의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기만 하면 확실히 실패하지 않는다는 이 확신을 가져야 하며 또 그것이 모든 유혹을 이기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4. 하와의 대답에서 얻는 교훈

(1) 집요한 사탄의 공격에 대비해야

이제 하와의 대답을 봅시다. “우리가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으나, 동산 중앙에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열매가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금지에 이미 너무 엄격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을 더욱 가중시켜서 “하나님이 너희더러 참으로 나무 열매들을 먹지 말라고 금하셨느냐?”라고 말한 듯이 보입니다. 이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셈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어떤 나무 열매를 제외시키고자 했겠는가?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불필요하며 그 열매는 썩을 것이다. 어째서 그가 다른 것은 허용하면서 그것은 먹지 못하게 했는가? 달리 말해서, 그가 분주히 그것을 만들고서는 너희의 시각을 유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너희를 약 올리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하와는 대답을 매우 잘 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그 첫 번째 대답을 고수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앞서 언급한 축복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과 만족과 기쁨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끝없이 그리고 중단 없이 그에게 찬양을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땅은 언제나 지상의 낙원이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이나 비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모종의 공격 신호를 보낼 때 우리는 계속 그 신호를 유지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에는 꿋꿋하게 저항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공격과 전투를 견뎌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를 꿋꿋하게 싸우고 그 다음 날 패배한다면, 결과가 시작과 일치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 하와의 예를 통해 두려움과 염려로 행할 것을 경고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성 바울이 스스로 선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고전 10:12).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고 또, 성 바울이 말하듯이, 그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빌 4:13).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잠을 자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에서 깜짝 놀라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2) 연약함을 인정하고 끝까지 성령의 도우심 구함

하와는 이보다 더 잘 답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옹졸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만족시킬 만한 이런 많은 재화를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온갖 부가 있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 손에 주어 누리게 하셨다면, 우리가 그 이상 더 욕심을 내야할까요? 하나님은 나무 하나를 따로 떼어 놓고 만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극받아 그에게 반역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토록 후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것들을 우리 손에 주어 소유하게 하셨을진대 이것이 웬 배은망덕입니까? 우리가 모든 재화를 누린다면, “주님 이것은 당신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와가 말한 방식이고 하나님의 영이 그녀 안에서 사탄을 이긴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는 굴복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바로 이 문장에서 그녀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이후 세 마디 말은 그녀가, 마땅히 그래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멈춰있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아,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악을 미워하고 저항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을지라도, 아무튼 우리의 눈을 낮추어 우리의 허약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인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한 번 우리를 도우셨다면 계속 도와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힘을 주셨다면, 내일은 더욱 배가시켜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가 기꺼이 우리로 시험 당하게 하실진대, 그는 힘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우리가 불굴의 상태가 되도록 하며 우리에게서 그의 능력을 새로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억압당하고 절반 죽은 듯이 될 때, 그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구하고 그의 손에 우리를 맡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온전한 사람들에게 타락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을 세밀하게 살피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심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자극하여 그에게 간구하고 피난처를 두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즉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며 우리는 그의 버림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다스린다는 것과, 그가 온 세상을 이기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에서 영광을 얻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에 저항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그럽고 인정이 넘치게 나타나실진대 그의 사랑 안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친절을 맛보지 못하는 것 외에 무엇이 우리를 그에게서 떼어놓고 멀어지게 하는 원인일까요? 이 세상의 헛됨과 열락과 쾌락이 우리 눈을 현혹하며 사탄에게는 우리를 미혹하는 수단이 됩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73:28)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복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데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지각과 이성이 없는 자들을 속이는 유혹에 대해 분명 방어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지각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친절과 그가 베푸신 무한한 은혜를 밤낮으로 묵상하며, 이런 식으로 그의 사랑에서 희열을 느끼며, 사탄이 이 모든 복의 원천에서 우리를 떼어놓고자 할 때 그에게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의 결과로 나타남을 믿어야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우리 조상 하와를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뒤에 부연한 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고 죽을 수 있을까 염려하여 그것을 금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달랐습니다. “이 나무를 만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즉시 죽으리라.” 이것은 분명한 위협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여기서 약간 의심이 담긴 말을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가능성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여기서는 이것이 본래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와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의심합니다. 그녀는 흔히 말하듯 금처럼 소중히 여겨야할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희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이 나무를 만지는 즉시 죽게 될 것이 확실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하나님이 진실하지 않기나 한듯이, “어쩌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너무 늦게 우리를 살피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하도 멀리 떼어놓아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가 되면, 다시 일어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바울이 사탄이 어떤 계교를 사용하는지 아는 것이 기독교인의 지혜라고 했듯이(고후 2:11), 주의하여 그의 계략을 간파합시다. 그리고 그의 계략과 술책에 대비하여 올바른 사리분별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 하와가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한 말에서, 우리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이나 위협이 그런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재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더욱 잘, 그리고 보다 친밀하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건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건 간에, 그가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가져야 하며, 우리 역시 마치 눈으로 그것을 보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노아가 하나님이 발하신 보복을 두려워했고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데 몰두했다고 기록됐듯이 말입니다. 비록 온 세상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래도 그는 끈기 있게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주의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조롱했지만, 그래도 그는 마치 홍수를 그의 눈앞에서 보기나 한 듯이 그 말씀에 주의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듯이(마 24:38~39), 그들은 호화로운 건물을 짓고 축제를 열며 혼인하고 연회를 베풀며, 간단히 말해서 온갖 즐거움과 쾌락에 빠질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노아에게는 온 세상을 꿰뚫어 홍수를, 마치 이미 임하기나 한 듯이, 바라보는 안경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아끼기 때문에 그들이 즐거워할 이유가 있음을 또한 봅니다. 하지만 노아는 “내[=하나님]가 사람들과 더 이상 흥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들었으며, 그러기에 그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셈입니다. 이것이 또한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건 위협이건, 그가 말씀하실 때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치 그가 손을 펼치시고 그의 말씀이 담고 있는 것을 이미 실행하시는 것과도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한번 “가능성[할까 하노라]”이라는 말로 들어간다면, 즉시 하나님의 위협은 냉랭해지고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협은 또한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며, 결국 우리는 위협을 멸시할 것이고 마치 황소처럼 하나님과 부딪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여기 우리 조상 하와가 한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그녀가 하나님이 그토록 후덕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아담과 그녀가 금지된 나무를 만지지 않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고백하는 것 말입니다. 이점에서 그녀는 매우 잘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곧 이어 그녀는 망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위협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위협인가요? 하와가 보기에 이것은 어린아이들의 위협으로, 위험은 있으나 모면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위험이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는 것이기는 하나 불확실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와가 마땅히 행했어야 했던 방식, 즉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그의 진리를 공손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협이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을 때, 즉 그가 우리에게 항상 아버지가 되시고(렘 31:9) 우리를 기꺼이 양자 삼으시며(엡 1:5) 약속된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끝까지 지속적으로 우리를 이끌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가 그에게 구하는 한 영육 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 안에서 언제나 찾아내게 되리라는 말을 들을 때, 그때 이 약속들은 진정한 것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한 말을 성취할 것인지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가 우리의 정신이 품을 수 있는 것을 극복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믿고 의지해야하는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그가 마음을 풀 때까지 떨어야 하며 그의 노를 유발할까 두려워해야 하며,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듯이(사 66:2), 그의 말을 인하여 떨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겁을 먹고 “아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는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진노의 징표를 보이는 즉시 그 앞에 쓰러져야 할 정도의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진정한 참회로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날리는 채찍을 느끼기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위협하는 것으로 충분하게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이 구절에서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4)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영화를 누리시게 해야

만일 하와가 자신을 잘 살폈더라면 확실히 이 “가능성”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얼핏 보더라도 그녀가 이 금지사항이 얼마나 중대했는지 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전히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알았으나 그때는 너무 늦었고 불행하게 된 후였습니다. 어찌됐건 그제야 하와는 이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았으나 하나님에게 어떤 존엄이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가 명한 것을 조금이라도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와는 하나님을 상관으로 여기기는 했으나 그와 놀이를 한 것입니다. 그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히 10:31)이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이런 고귀함과 영광이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면 우리의 모든 감각이 희열을 느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원리를 가졌더라면, 그녀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야 했던 점에 있어서, 그렇게 흔들려 의심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법과 우리의 척도로 그를 측량하지 않는 법, 그리고 우리가 늘 하는 대로 그를 낮추지 않는 법을 배웁시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영악해서 두려움으로 그를 경배하는 대신, 우리가 보기 좋은 대로의 품위를 그에게 만들어주고 그가 그런 상태와 등급으로 만족해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흐릿하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망각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전념하는 식의 공경심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작해야할 출발점입니다. 나아가 왕의 진노는 죽음의 메시지라는 말이 있다면(잠 16:14), 우리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어떻겠습니까? 그의 음성은 우리에게 벼락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반역의 흔적이나 노골적인 미적지근함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교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끝까지 추적하여, 우리가 어둠 가운데 숨거나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할지라도, 우리를 빛 가운데로 끌어낼 것입니다.

5. 사탄이 노리는 조그만 틈

악의 절정은 사탄이 부연하는 말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의 눈이 열려 만사를 인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여기서 사탄은 작은 틈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문제를 다 다룰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우리가 우리 원수에게 작은 틈새만 주어도 그가 즉시 내부를 점령한다는 것을 주의합시다. 우리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어서도 안 되며, 그가 모든 성벽을 무너뜨리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작은 구멍 하나만 있어도 바로 들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참된 무기임을 알고 그 말씀의 벽을 이중으로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이요, 우리의 투구며, 우리의 방패며, 우리의 갑옷이며,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탄의 공격을 견뎌내고 물리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전신갑주입니다(엡 6:17).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사탄이 결코 침투하지 못할 정도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심하거나 논쟁하거나 흔들리기 시작하는 즉시, 그가 완전히 이기고 우리는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방패와 검과 투구와 갑옷뿐만 아니라 성벽과 외호(外濠)와 성채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접근하고자 할 때 아무런 방도를 찾아내지 못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 요한이 세상에 대한 확실한 승리가 신앙이라고 말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되 그 말씀이 우리에게서 충만한 생명력을 갖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해야 함을 알 것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하와가 우리를 끌어들였던 이 저주받을 타락에서 다시 일어날 방법임을 알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의 선한 하나님의 존엄 앞에 부복하여 우리 죄를 인정하고 그가 기꺼이 그 죄를 더 잘 느끼게 하시며 밤낮으로 우리를 참회로 이끄시어, 우리의 첫 조상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빠져있는 이 심연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하시되, 우리가 신앙의 빛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의 진리를 응시하는 법을 배울 정도로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어둠 가운데서도, 그 어둠이 제 아무리 칠흑 같더라도 그 가운데서 다닐 수 있도록, 우리의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길을 항상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가 우리의 모든 결함들 가운데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그것들을 점점 개선하시되 완전히 없애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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