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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by 김경호 진실 2012. 3. 2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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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하였던 인물들 가운데는 안색이 검고 키가 작은 적수들에 의해“검은 난쟁이”라 불리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곧 알렉산더의 비서였던 아타나시우스였으니, 곧 그 논쟁의 중심인물이자 니케아 정통 신학의 수호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4세기 교회를 이끌었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초기 생애
아타나시우스의 출생에 대한 점들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아마도 나일강 유역의 조그마한 촌락 출신이었던 듯하다. 그가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언어인 콥트어를 사용하였고 그의 안색이 콥트인들처럼 검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아마도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거듭 정복되었던 콥트족의 일원이었으며 이집트의 하층 계급 출신이었을 공산이 크다.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워 이를 스스로 지켰으니,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일부 적수들로부터도 경탄을 자아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민중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격렬한 신념,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심오한 원칙 등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하기 이전 이미 <이방인들에 대항하여>와<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등 두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를 읽어보면 그의 신학이 가지는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전체 인간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 되는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깊은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 속에 인간으로서 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 이것이야 말로 아타나시우스가 이해하였던 기독교의 진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임종 직전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차기 감독으로 지명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숨은 곳을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알렉산더의 사망 후 수주가 지난 후에야, 그리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328년 콘스탄틴은 아리우스의 유배령을 철회하였다. 이제 아리우스 주의는 다시 그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많은 시련을 통하여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및 기타 아리우스주의 지도자들은 아타나시우스야 말로 가장 대적하기 힘든 적수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곧 그의 몰락을 초래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켰다. 곧 그가 마술에 탐닉하고 있으며 이집트 일대의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독재자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틴은 유세비우스의 보고를 근거로하여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서방 제국의 트리에르시로 유배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더 큰 혼란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차라리 도시를 떠나기로 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그레고리의 방자한 행동에 염증을 내고 있던 시민들은 아타나시우스를 마치 영웅이나 해방자처럼 환영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지원 아래 약 10년 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특히 방대한 양의 서신 교류를 통하여 다른 정통 신학의 수호자들과 유대를 돈독히 하였다. 또한 그가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몇편의 논문을 집필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하기 위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을 때에 참석자들은 교회법상 청문회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고 응답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의 뜻 역시 교회의 법이다” 이처럼 명백한 위협 아래 감독자들의 대부분은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하는데 서명하였다. 이를 끝내 거부한 자들은 유배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한 교회당에서 성찬을 집례하고 있을 때에, 총독은 교회당을 포위하고 일단의 무장 병사들을 대동하고 난입하였다.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아타나시우스는 회중에게“그의 자비는 영원하리라”는 후렴이 딸린 시편 136편을 노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이때 기적하였고 신자들은 그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5년동안 사막의 수도사들 가운데 거주하였다. 이 5년 동안 니케아 정통주의는 지대한 타격을 받았다. 제국 정책은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들을 후원하였다. 비록 많은 감독자들과 기타 교회 지도자들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였음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물리적이 폭력을 동원한 세속 정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새로운 황제(줄리앙)는 모든 감독들에 대한 유배령을 취소하였다. 이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당시 시급하였던 신학적 회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학적 합의
아타나시우스는 일련의 의논들을 통해 이러한 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니케아 신경의 주장 역시 유사 본질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음을 설복시켰다. 결국A.D.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집된 회의석상에서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는 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가르켜“동일본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동시에 마치 세 신자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한 “세 본질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 하였다.
아타나시우스의 사상
성삼론
아리우스이단은 궁극적으로 신론과 연관된 성삼론의 문제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은 영원불변하
고 전능하신 분, 어떤 물질적인 요소도 없는 단순하고 순수하신 분, 
언제 어디에나 내재하시며 만물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느님은 성삼(聖三)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성삼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룩하고 완전한 단 하나의 성삼, 곧 성부, 성자, 성령 안에 
계시는 하느님만이 존재하실 뿐이다. 
성삼은 결코 그 어떤 외부적 요소를 지니지 않고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지도 않는다. 성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합일체가 아니며, 홀로 가장 
완전한 창조능력이며 생산자이시다. 성삼은 본질상 상호 상통성을 
지니며 나누일 수 없고, 성삼의 효력은 다만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 
아타나시우스는 성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신다. 성자의 모든 것이 성부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빛의 광체와 샘의 물줄기처럼 성자를 보는 것이 
바로 성부를 보는 것이며, 성자의 것이 곧 성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자는 늘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도 성자 안에 계신다. 광체 속의 
태양과 말씀 안의 성령, 물줄기 안의 샘처럼 사실 성부의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다” 아리우스는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로고스(성자)를 창조하였다고 하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논리가 하느님께 대한 불경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참새들과 들풀등 
작은 것까지 염려하시는 분이신데, 세상창조라는 막중한 일을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먼저 창조한 성자를 시켜 창조하게 한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섭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 즉 같은 
천주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강변한다. 또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본성은 이니지만 “비슷한” 본성을 지니셨다고 
하는 후기 아리우스이단의 주장도 배격한다. 
로고스와 구원론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이단에 대항하여 ‘로고스’의 천주성을 
역설하면서, 뜻깊은 구원론을 피력한다. 이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육화와 
직결되어 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해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분은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느님의 
불사불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은 인간의 수모를 달게 
참아받으셨다”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은 불사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말씀은 육신을 취하여 모든
이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분이 되셨고, 인간은 그 말씀을 통해 불사
불멸과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해여 필수적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죽음과 부패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은 인성을 취하시고 
자신의 몸을 성부께 바칠 제물로 죽음에 부치셨다. 
따라서 죽음은 결국 그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인간에게 죽음을 몰아내시고 부활의 은총을 주심으로
써 잃어버린 불사불멸성을 되찾아 주셨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이단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신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스도론
아타나시우스는 강생 이후의 그리스도에게 제기되는 문제 즉 그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 둘의 위격적 
일치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계속 말씀으로 계신다. 
한편 동정녀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잉태하셨으며, 그래서 주께서 
사람이 되셨다. 이 두 가지 정의로 표현된 분은 한 위격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과 육화에 
관한 설명은 각각 그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분이 흘리신 눈물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느님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신 것이다. 
그분이 비록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실 수 있었으나 인성을 
지니셨기 때문에 친히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셨다. 
그분은 인간이시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셨지만, 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육신을 부활시키신 것이다”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하셨든지, 인간으로 하셨든지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긴밀하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에 속한 
특성들을 인성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고, 또 인성에 속한 특성들을 
신성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는 소위 ‘신인 속성교환’의 이론이 나온다.
이 이론에 따라, 마리아는 비록 인간 그리스도를 낳으신 어머니지만 
낳으신 그 아들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 로고스는 신성을 나타내는데, 그분의 인성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포함한 것이냐 아니면 육신만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의 저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영혼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
가 로고스-육신 그리스도론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활동을 할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영혼 문제가 신학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타나시우스가 이 문제로 단죄 받았다는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후의 시련들
비록 줄리앙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는 소식은 그를 상신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황제의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감독을 다시 유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한번 수도사들 사이에 피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아타나시우스의 계획을 알아차린 제국 정부는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줄리앙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뒤를 계승한 조비안은 아타나시우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이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다시 자기의 교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수개월 후 조비안은 숨을 거두고 열렬한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A.D.373년 숨을 거두기까지 그곳에 머물 수 있었다.
비록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전생애를 바친 정통 교리의 마지막 승리를 목격하지는 못 하였으나, 그가 남긴 저술들을 보면 결국 아리우스주의가 패배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노령의 접어들면서 그와 동일한 신념을 지닌 새로운 시대의 신학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들은 바로 위대한 캅파도키아인들로 불리우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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