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현실과 박윤선 박사의 목회적 교훈
본고는 정암신학강좌에서 행한 강의안을 요약 발췌한 것으로 원문은 본사 홈페이지(www.rpress.or.kr) ‘디지털개혁신보’ <열린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 허순길 박사 전, 고려신학대학원장 >
1. 내가 아는 박윤선
박윤선 박사는 그의 생애의 황금기를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1905년 생으로 41세이던 때인 1946년 9월 신설된 고려신학교 첫 번 째 교수로 봉사를 시작하여 55세 때인 1960년 10월까지 14년간 봉사했으니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때를 고려신학교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신학교 개교 후 박형룡 박사가 만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약 1년간 교장서리로 겸허하게 봉사하였다. 1947년 10월 박형룡 박사가 도착한 후 평교수로 봉사하다 1958년 5월 그가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서울로 떠나게 되었을 때 교장직을 계승하여 1960년 10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기까지 12년간 교장으로 봉사했다. 박윤선 박사는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와 함께 1946년 5월 신학교설립을 의논하고 추진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고려신학교 설립자 중의 한 분이었다.
박윤선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봉사는 하는 동안 미국적인 장로교 신학과 유럽 네덜란드의 개혁신학 양자를 소화함으로 고신신학을 주조하고 가르쳤다. 결과 그의 신학은 큰 틀에서는 평양 장로회신학의 전통을 이었지만, 실제 그보다는 넓고 깊은 개혁신학이었다.
이는 해방이 되기 전 일제시대에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 제일차 유학 시(1934-36)는 미국장로교회 대표적 신약 신학자 그레샴 메췐 박사를 시사하고, 두 번째 유학 시(1938-39)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계의 변증신학자 코르넬리우스 밴틸 박사를 시사하고 연구할 기회를 가짐으로 가능했다.
그는 유학 시 그가 평양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개혁주의적이라기보다 근본주의적이었다는 것을 까달았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 결과 유학중에 새로운 신학의 시야를 발견하고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바로 이해해야 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개혁신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 두 분인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의 책을 직접 접하고 스킬더, 흐레이다너스, 리데르보스 같은 신학자들의 신학의 접근을 위해 네덜란드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독습하여 곧 네덜란드어 책을 해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어학의 천재였다. 이미 어릴 때 사서삼경을 통독 암송함으로 한문을 익혔고, 다음으로 일어, 영어, 독일어를 익혔으며, 신학교에서 성경원어를 정복했고, 미국에서 네덜란드어를 자습하여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학자로서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정복한 것은 세계 여러 신학자들 중에서도 흔하지 않는 일이었다. 결과 1950년대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한 개혁신학은 한국 신학계에서 매우 독창적이었고 신선한 것이었다.
내가 박윤선 박사를 돕는 기간은 1959년 화란의 자유대학에 다시 가기 위해 논문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해 봄에 그는 나의 결혼을 위해 주례를 서 주셨다. 결혼 설교를 거의 50분 해주셨다. 그는 주석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고 써 갔다. 나는 이것을 타이핑했다. 그가 1953년 10월에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유학을 하던 중 이듬해 봄 3월에 부인이 자동차사고로 별세하게 됨으로 급히 귀국하게 되어 유학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당시 그의 지도교수인 스퍼스 교수(Schippers)로부터 박사학위 논문제목을 받아 가지고 왔었다. 그 논문 제목은 “신약과 이교사상”(The New Testamnent and Paganism)이었다. 그는 1958, 9년에 주석 작업을 하면서 이 논문 작성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그런 논문제목을 받은 것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동양의 고대종교사상과 신약의 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기대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논문의 대요를 작성하고 네덜란드로 가기 전에 그의 모교라 할 수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더 보충하고 완성하여 네덜란드로 갈 생각을 가졌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그가 준비한 논문 내용으로 특강도 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그의 스승이었던 밴틸 박사가 고려신학교에 와서 일주 이상 강의를 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1959년 12월 26일에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박 교장은 이듬 해 1960년 5월 갑자기 미국으로부터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가 미국에서 그의 논문의 대요를 그의 지도 교수에게 보냈더니 그의 논문의 내용의 방향이 기대한 것과 다름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주임교수는 신약사상과 그 시대의 이교사상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이 때 그는 크게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곧 그는 학위를 얻기 위해 이상 새 작업을 함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직시 네덜란드에 가는 일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모든 분들이 잘 아는 대로 아주 단순한 어른이었다. 교장실에서 조교인 나에게 솔직하게 “허선생, 내가 논문 방향을 잘 못 잡았어. 나는 논문 제목이 신약과 이교사상이기에 나에게 동양고대 종교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비교 연구 비판해 보라는 것으로 잘 못 이해했지” 하셨다.
박윤선 박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로 개혁신학이라는 학문과 영력을 겸비한 분이었다. 그가 소천한지 벌서 4반세기가 가까워 오지만 그가 교회의 목사와 교사로 남긴 영향은 한국의 다른 어떤 신학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히13:)고 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시류에 귀를 기울이고 선진들의 교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제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려하면서 박윤선 박사가 목사와 교사로서 남긴 목회적 교훈을 세 가지로 간단하게 살피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한 박윤선
우리는 오늘 많은 목회자들이 대 교회(Mega Church)를 지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0세기 말 이전에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해 개종자, 혹은 결신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대 집회를 열고 부흥사들을 초청하여 설교하게 하고 결신자들을 불러 세우며 앞좌석으로 초창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는 다수의 목회자들이 결신자를 얻기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대교회를 이루는데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변 세계에 커져가는 월드 마트나 코카콜라 회사의 본을 따라 큰 회사를 닮은 대교회를 세우고 확장해 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시장전략가들의 전략을 따르는 교회성장전략가들의 자문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교회를 복음이라는 가치 있는 물건을 파는 회사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고객으로 생각하여 접근하라고 가르치게 되었다. 오늘의 고객을 끌려고 하면 현대인들이 어떤 시대에 살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서 그들의 취향을 맞추어주라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현대는 번영의 시대이니 많은 고객을 유치하려면 번영의 길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또한 오락의 시대이니 오늘의 고객을 유치하려면 설교를 통해 즐거움을 주고 부담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 죄, 죄 값, 회개란 말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란 말을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즐겁게 들을 수 있고 시사하는 점이 많은 멧세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즐겁게 지나다 스트레스를 풀고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성장전략의 결과가 오늘의 대부분의 강단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한 선포가 차츰 살아지게 했다. 이런 시류에 휩쓸린 목회자들은 번영과 즐거움만을 전함으로 청중들에게 죄에 무관하고 죄에 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하게 되었다. 결과 오늘의 많은 신자들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회개를 모르게 되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은 성경의 지극히 적은 일 부분만을 전함으로 교회를 속화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본을 보여준 박윤선 박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믿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계시)”으로 받으며, 모든 “성경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고백했다. 그럼으로 그는 성경 해석하는 일을 꿀을 짜내는 작업처럼 알고 스스로 즐기고 이 작업에 평생 몰두했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할 때는 온 정열을 다해 온 몸으로 전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 속의 어떤 부분이 혹 윤리적으로 부끄럽게 여겨지거나,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듯한 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기쁘게 전했다.
그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 번영과 오락의 시대를 맞아 설교자들이 번영의 길만을 전하고 사람들을 즐겁게만 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타락, 죄, 하나님의 진노, 회개 등에 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하는 설교라 할 수 없다.
특히 박윤선 박사는 죄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심각했다. 그러니 그는 설교에서 죄와 회개문제에 대하여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가 일제 시 만주에서 봉사할 당시 신사참배 강요에 부닥쳐 한번 신사참배를 함으로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때문에 마음이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그는 이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었다.
박윤선 박사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성경 모두(Scriptura Tota)를 전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 대부분의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공통적인 것이 번영을 위한 설교요 즐거움을 주기 위한 설교이다. 저들은 죄에 대하여 전혀 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이는 반쪽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참된 개혁교회를 건설하려면 성경 모두를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이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했다.(행20:27) 박윤선 박사는 성경 모두를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기 위한 본을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보여주었다.
3. 물질생활에서 소박함을 보여준 박윤선
오늘 우리는 물질이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물량주의로 기울고 있다. 수 백 억원을 드려 크고 화려한 교회당을 세우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대형교회 어떤 목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 교회 목사들도 상상할 수 없는 대우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억대에 이르는 고급차를 굴리며 생활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오늘의 물량주의 중심의 생활은 교회를 속화의 길로 이끌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고, 물질을 초월하고 산분이었다 말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은 그의 기도가 뒷받침이 되었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기도로 모든 물질에 대한 근심을 떨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했었다.
박윤선 박사는 1984년도 합동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주는 훈사에서 “교역자는 종교업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1985년도 졸업생들에게 주는 훈사에서도 “삯군(요10:12)이란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시지요? 순전히 생계를 위하여 다니는 교역자를 가리킨 말씀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다 자신이 실천해 온 물질을 초월하는 목회자의 생활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의 경건에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의 종은 물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그에게서 받고 그의 본을 따르려 노력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는 참으로 그의 비문에 새겨있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열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한 말씀을 따라 산 분이었다. 물량주의 시대에 살며 물질에 시험을 받기 쉬운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박윤선 박사는 귀한 본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4. 명예를 멀리하고 교권을 경계한 박윤선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한국의 명예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직분 명칭이 호칭으로 사용되어 “장로님” “집사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목사, 장로, 집사를 상하의 계급적 차원에서 보게 되고, 집사로 있다 장로가 되면 승진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런 직분에 있어서 상하의 개념이 한국교회에 정착이 되어버렸다.
교권은 근본적으로 명예를 탐하는데서 오게 된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이 명예를 탐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크게 경계했다. 그는 “세상이 씌워 주는 면류관을 좋아하는 마음은 신앙을 죽이는 것”이라 하고 “인기나 명예의 두루마기는 신앙의 생명을 탈취하는 거머리와 같은 흉물”이라고 했다. 이는 곧 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목사들이 명예의 두루마기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교권주의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대로 이해한 “만인제사장”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만인제사장(벧전 2:9) 교리란 교역자나 일반 신자나 차별 없이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한 계단 더 높은 제사장도 아니며, 대제사장도 아니다.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히 4:14).
따라서 그는 많은 교회들에서 목사들이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것을 지적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여 “장로교헌법의 ‘교회의 모든 권리는 교인에게 있다’란 성경적 헌장은 유야무야로 돌아가고, 오늘날 목사의 권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짙어간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 방면 개혁은 너무도 절실하다”고 했다.
박윤선 박사는 목사가 지역교회에서 행사하는 교권욕이 곧 노회나 총회 등 전체 교회생활에 옮겨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지역 교회 목사의 교권에 대하여 이렇게 강한 개혁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교권의 횡포와 교회분열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과 교회정치체제에 대한 개혁주의적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절하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총신대학교를 사면하고 나온 몇 분 교수들과 함께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를 세워 개교할 때 내외에 천명한 “설립취지”에서 “교권의 횡포”를 언급하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리스도만이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언급한데서 이를 잘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합동신학교 설립 후 바로 장로교 교회정치를 연구하여 1983년에 “헌법주석”을 간행하였다. 결과 그는 장로교 정치에 나타난 직분관이나 치리구조에 대한 기존 장로교회에서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을 소개했다. 그는 직분자들인 목사, 장로, 집사의 동등권에 대하여 언급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사는 교직의 대표자이고 장로는 교회의 대표자이다. 양자의 사역은 동등이다(헌법 5:2).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목사는 장로보다 우위한 것처럼 자처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목사나 장로는 집사에 대해서 역시 그 직분(집사직)이 하급인 것처럼 잘 못 생각한다...교회에 수종드는 문제에 있어서는 목사도 그리스도에게 수종 드는 자 이고 장로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 사이에는 형제애가 확실히 있어야 된다고 할 뿐이다(마 23:8 참조). 사역 상 평등의 원리는 성경에서 나온 개혁주의 교리이다.”
나아가 당회,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 구조에 관하여는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치리회들은 수직적으로 생각될 존재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생각될 존재요, 서로 연합전선을 구축한 셈이다(행 15:1-21). 그러므로 우리가 치리회에 대하여 ‘상회’, ‘하회’란 명칭을 즐겨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어 그는 앞서 언급한 저자들로부터 “개혁교회의 정치는 일반적 의미에서 상회와 하회의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한다.
박윤선 박사가 직분자들을 상하의 관계로 보지 않고 사역 상 평등권을 가진 것으로 보려는 것은 한국장로교회 세계에서는 신선한 새 접근이었다. 개혁교회에서는 직분자들 간에 직임상의 구별만을 인정하고 직분간의 상하의 차별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당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는 직임을 달리하고 함께 교회를 봉사하는 동역자들로 간주된다. 개혁교회의 정치는 1571년 엠던애서 모인 개혁교회 창립총회 때 받은 교회정치의 지배적인 원리가 교회질서 제 1조에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교회도 다른 교회를 지배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목사나 장로나 집사도 다른 직분자를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교회에서는 오늘까지도 이 반교권적 원리가 교회직분, 치리회 관계에서 그대로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 결과 개혁교회에서는 당회로부터, 노회, 총회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교권을 추구하는 분이 없게 되고, 교회 직분자들의 교권 행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박윤선 박사는 교회교권이 교회에 자리를 잡을 때 교회가 입게 되는 피해를 의식하고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의 명칭을 당회의장, 노회의장, 총회의장으로 하자는 제의를 하여 합신총회가 한 때 이를 받아드렸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총회는 이는 회중교회 체제를 닮은 것이라고 하여 다시 옛 명칭으로 환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윤선 박사가 회장이란 말 대신 의장이란 말을 제의한 것은 교권을 경계하는 개혁신앙과 정치에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은 어떤 교회적 직임의 호칭이 아니고 당회, 노회, 총회가 모였을 때 회의를 질서 있게 사회하는 책임을 진 분(Chairman)임을 가리킬 뿐이고, 치리회의 공식 문서에 대표로 서명하게 될 때 사용되어질 뿐이다. 이것이 직함이 아니니 호칭으로 삼아 회의 밖에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명예문화가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회의 밖에서도 이것이 호칭으로 사용되는 일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이 목회자들에게 교권욕을 유발하게 하고, 그 자리를 쟁취하기 위한 가진 불법과 부조리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합신 총회가 어떤 면에서 바른 개혁을 추구해 오다 옛날로 화원하게 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긴다. 개혁교회는 성경의 가르치는 원리를 재발견하고 이에 따라 항상 개혁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1980년대에 들어 갈기갈기 찢겨 분열되어 온 것은 진리 수호를 위한 투쟁 때문이 아니었고, 교권과 지역패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는 지역교회, 교파, 교회연합체에서 교권을 추구하는 분들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이 크게 훼손되고 교회공동체가 세상의 공동체와 별 다름 없음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교회가 세상을 닮을 때 교회의 존재가치는 살아지는 것이다.
한국장로교회에 뿌리 깊이 내려있는 교권주의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박윤선 박사 같은 분의 개혁적 의지가 우리 교회 안에 다시 되살아나고, 한국 장로교회가 교권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모색함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만을 주와 왕으로 섬기고 사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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