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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휘장 6 (호라티우스 보나르)

호라티우스 보나르

by 김경호 진실 2012. 5. 2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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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휘장이 찢어짐
 
상징의 휘장이 찢어짐과 동시에 참된 휘장도 함께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마 27:51).
우리는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반드시 말씀의 전체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모리아 산 밑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 희생을 드리는 시간의 옛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태양은 저 편 하늘 너머로 기울었지만, 여전히 성전 너머 올리브 산 잿빛 비탈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큰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나아가 우리는 대리석, 백향목, 금으로 만든 다양한 성전 기구들이 있는 거룩한 방들을 둘러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예복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들 사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마치 하늘이 열린 것처럼, 우리는 땅에서 위로 즉, 하늘의 처소들로 들림을 받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소멸될 예루살렘에서 하늘에 있는 불멸의 예루살렘으로 들림을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모두 목격하고서,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보매 도시 안에 성전이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 되심이라”
우리는 몸과 혼이 하나로 결합되어있는 것처럼,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땅에 속한 태양과 하늘에 속한 의의 태양은 반드시 그 광채가 서로 혼합되어야 하며, 서로를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아래에 있는 물과 위에 있는 샘물은 반드시 함께 흘러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스라엘 안에서 교회를 보고, 또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을 보아야 합니다. 희생단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단을 보아야 합니다. 어린양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양을 보아야 합니다. 긍휼의 좌석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의 좌석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또 여호와의 광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결코 실체와 그림자를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로 결합시키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과 같은 믿는 옛 유대인은 이 두 가지의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비록 그가 본 것과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깨닫는 것 사이에는 방법이나 순서, 분량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 차이점이란, 시므온은 땅의 것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본 반면, 우리는 하늘의 것을 통하여 땅의 것을 본다는 점입니다. 시므온은 휘장 밖에 서서, 마치 골짜기 밑에 선 사람이 구름 사이로 햇빛을 보듯이 휘장을 통하여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휘장 안쪽에 서서, 마치 산 정상에 선 사람이 햇빛을 통해 밑에 있는 구름을 보듯이 영광의 빛을 통해 휘장을 봅니다. 과거에는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계시하였지만, 이제는 하늘의 것이 땅의 것을 조명해 줍니다. 놋 뱀 곁에 섰던 모세는 장차 민족들의 치료자이신 메시아가 오실 것을 멀리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늘의 처소에 계신 메시아 곁에 서서, 아니 곁에 앉아서, 멀리 놋 뱀을 바라봅니다. 호렙 산 바위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저 멀리 시대들의 바위(the rock of ages)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수를 어렴풋이 쳐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늘의 샘물 가까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광야의 옛 바위와 거기서 터져 나온 물줄기를 이해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만나를 손에 들고 위에 있는 참된 빵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빵을 손에 들고 광야의 만나를 내려다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휘장이 찢어진 일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써, 이스라엘은 이 놀라운 사건을 주목하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호와께서 자신의 거처를 버리셨단 말인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하지만 성전 휘장은 찢어졌을 뿐, 불 태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 휘장이 단지 찢어지기만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휘장을 완전히 제거하시거나, 전적으로 파괴하려 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휘장은 더 이상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찢어진 휘장을 통해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새롭고 산 길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2. 휘장만 찢어졌을 뿐 성전은 여전히 건재하였습니다.
만일 지진으로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갈라지고, 성전이 붕괴되고, 성전 벽이 산산조각이 났다면, 사람들은 이 지진 때문에 휘장이 찢어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휘장만 찢어지고 성전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을 볼 때, 분명 긍휼의 좌석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지성소가 바깥뜰처럼 완전히 개방되어 누구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땅에 속한 어떤 인간의 손이나, 강력한 자연의 진동에 의해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3. 휘장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여러 갈래로 바닥에 떨어지거나, 조각조각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손에 의해 성전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깨끗하게 찢어졌습니다. 휘장이 두 부분으로 정확하게 나누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혼과 몸이 분리된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찢어진 휘장의 양쪽은 여전히 성전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혼이 하나님의 신성과 여전히 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땅과 하늘 사이를 가르며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예시해 줍니다.
 
4.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행한 것처럼, 가로로 찢어지거나, 밑에서 위로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휘장을 찢은 권능이 아래에서 나지 않고, 위로부터 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휘장을 찢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분명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분이 상함 받는 것을 기뻐하사 고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성전 지붕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휘장을 제외한 성전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온전하였습니다. 이는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붕에서 바닥에 이르기까지 옛 휘장은 남김없이 찢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 땅에 이르기까지, 곧 하나님의 왕좌에서 사람의 거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은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문을 여시면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으로 손수 죄인의 괴수를 위해 영광스러운 하늘의 가장 깊은 곳을 활짝 열어주셨으니 누구도 이 문을 닫을 수 가 없습니다! 자 함께 안으로 들어갑시다. 자 함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5. 휘장은 성직자들의 눈앞에서 찢어졌습니다.
그들은 성소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휘장 밖에서 등잔불을 밝히고, 금향로에 향을 올려놓고, 금 탁자에 진설병을 차리는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휘장이 찢어지는 엄숙한 광경을 목격하고 놀라움에 압도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소에서 황급히 도망치려 하였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사람들에게는 보는 것이 금지된 지성소의 두려운 영광을 보지 않으려고 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지성소를 보는 것이 허락되었던 대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는 내가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부정한 입술을 가진 백성들 사이에 거하면서 내 눈으로 만군의 주이신 왕을 뵈었음이라.”(사 6:5). 성직자들은 되어진 이 일의 증인이었습니다. 휘장을 찢은 것은 성직자들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인간의 손도 이 일을 행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성직자들이 증거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지성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닫아두셨던 지성소의 문을 친히 여셨다는 것 외에 성직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6. 휘장이 찢어짐으로 인해, 긍휼의 좌석(시은좌)과 케루빔과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긍휼의 좌석과 케루빔과 영광은 이제 더 이상 가려져 있거나, 지성소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지성소의 신비스러운 거주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지성소 안에 있는 덮이지 않은 그릇들을 만지는 것이 더 이상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며, 희생의 피로 얼룩진 금을 입힌 바닥과 벽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긍휼의 자리에 올라가, 영광의 그늘 아래 앉는 것 역시 이제는 불경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전에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신성모독이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를 향해 속히 나아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히 은혜의 왕좌로 나아가자” 영광의 그늘 아래가 이제는 가장 복되고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7. 휘장은 저녁 희생을 드리는 시간에 찢어졌습니다.
3시, 해질 무렵,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놋 희생단 위에 올려졌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고, 희생물을 태우는 불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던 바로 그 때, 휘장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희생단과 휘장, 희생물과 찢어진 휘장, 그리고 피 뿌림과 장벽의 제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일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피였습니다. 휘장을 찢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을 연 것은 바로 피였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가 휘장을 찢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8.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휘장의 찢어짐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는 상징이고, 다른 것은 실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하나의 교훈을 줍니다. 생명(LIFE)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나누는 칸막이며, 죽음(death)이 칸막이를 제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이 죄인들에게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그분의 죽으심 덕분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 가치와 효력을 모두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얻었습니다. 르피딤의 바위와 같은 시대들의 바위(the rock of ages)는 막대기로 맞은 후에야 비로소 생수를 내는 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치 갈보리 산과 모리아 산을 연결하는 전선에 전류가 흐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휘장을 찢음으로 장벽을 제거하려고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 신성한 능력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기가 흐르듯이 즉시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휘장을 찢는 능력이 발산되었습니다. 그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의 장소로부터 전능하신 분의 명령이 나온 것입니다.
“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너희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미리 약속된 신호였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즉시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목수 아들을 나무에 못 박은 그 유대인은, 못에 뚫린 그분의 손이 휘장을 찢으실 것이며, 이 신비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그분의 두 손이 못 박혀야만 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유대인은 이 나자렛 사람을 못 박을 나무를 세우면서, 이 십자가가 자신의 성전과 도시를 기초까지 남김없이 무너뜨릴 지렛대가 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휘장을 찢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상징적인 섬김과 관련된 냉엄한 법령들이 무너지고, 지성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이 거룩히 구별되었습니다. 이제는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의식에 속한 것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경배가 생명 없는 실행들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9.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위에 수놓았던 케루빔도 함께 찢어졌습니다.
이 케루빔은 구속받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죽음 안에 연합된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저 찢어진 휘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에 연합되어 하나된 것에 관해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성전의 상징-“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휘장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은 엄숙한 말씀의 의미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 찢어진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죄인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는 단지 은혜의 증표일 뿐만 아니라 의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단지 능력과 은혜의 사건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행한 것은 의였습니다. 의가 그 돌을 굴러가게 하였습니다. 의가 놋 문을 깨뜨리고, 철 빗장을 부수었습니다. 장벽이 제거된 것은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의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들이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의 괴수에게 의로운 환영이 선포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흘려진 수많은 황소의 피와 염소의 피가 그 휘장을 찢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오랫동안 이러한 짐승들의 피가 죄인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 두려운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랫동안 이 피는 화염검의 불꽃을 꺼뜨리고, 낙원을 두른 불꽃의 띠를 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나은 피가 흘려졌습니다. 이 피는 단 번에 그 문을 활짝 열었으며, 불타는 검에 한 번 손을 대자 그 불이 즉시 꺼졌습니다. 이 일을 그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충만한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문빗장을 여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긍휼의 자리를 완전히 개방하시고, 추방되었던 자를 영접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죄인이 추방과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알고 누리는 기쁨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낮은 자를 높이고, 비천한 자를 존귀케 하며, 무너뜨리고 일으키며, 고리를 풀고 매며, 구원하고 멸망시키며, 죽이고 살리며, 쫓아내고 받아들이며, 저주하고 복을 줍니다. 또한 구원하는 십자가의 효능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림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고, 구원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4천년 세월 동안 굳게 닫혔던 낙원의 문을 연 십자가! 수많은 시대와 세대 동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죄인에게 들어갈 기회를 준 십자가! 이제 더 이상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두려움이나 불확실함, 값비싼 대가나 위험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함과 복됨,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열렸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긍휼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긍휼의 자리에 앉으신 대성직자께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라는 메시지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담대히 지성소로 들어갑시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따라 휘장 곧 그분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집을 주관하는 대성직자를 의지하여, 참된 마음과 충만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갑시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이 음성에 반응하여 지금 어서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타작마당에 서 있듯이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것은, 들어오도록 열어두신 은혜를 거절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안전하고 복된 유일한 장소 밖에 그대로 머물며 아직도 남아 있는 두려운 고통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안전과 기쁨의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에게 제공된 것에 합당한 영과 태도를 지니고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불충분한 것이라면, 우리는 환영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 속에서 불확실한 소망을 의지하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처럼 주저주저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휘장이 완전히 찢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피가 완전히 뿌려지지 않았다면, 혹은 긍휼의 자리가 전적으로 그 이름-긍휼의 자리, 은혜의 왕좌-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혹은 대성직자께서 죄인에 대해 충분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 않는다면, 혹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그 때는 죄인은 의심과 불확실한 상태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고, 그 피가 신성한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긍휼의 자리는 참으로 은혜의 장소라면, 대성직자께서 죄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면, 그 때는 모든 의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담대함 없이 나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믿음의 충만한 확신 없이 나아가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입니다. 악한 양심을 가지고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어린양의 피가 죄인에게 선한 양심과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힘을 주기에 불충분하다고 믿는 우리의 불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뿌려진 피의 유효한 효능으로 인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당신은 그밖에 어떤 다른 길과 도덕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장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당신은 언제 어떻게 그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담대함을 얻을 수 있을 때에 담대함을 얻도록 하십시오. 이 담대함은 당신이 지성소의 바닥과 긍휼의 자리에 뿌려진 피를 볼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습니다.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그 피를 명예롭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왕좌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나아오라!“ 이것이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믿음의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이러한 긍휼의 자리를 마련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이러한 긍휼의 자리가 당신에게 용서의 장소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믿는 모든 죄인에게 평화를 주는 복음이 당신에게는 나누어줄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자유로이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당신은 망설이고 있습니까? 뿌려진 피가 주는 담대함은 모든 죄인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확신 없이 의심하며 악한 양심을 가지고 우물쭈물 주저하고 있습니까? 자, 뿌려진 피의 효능을 의지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찢어진 휘장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당신은 화평과 기쁨이 넘치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당신은 속박의 족쇄를 풀고, 무거운 죄의 짐을 벗고, 이 땅에서 모든 넘치는 기쁨과 사랑과 자유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종교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해결해야 될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짊어지고, 수고하며 의무를 이행하고, 헌신하며 생전에 일시적인 화해를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의 종교와는 다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종교는 처음부터 가진 단순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모든 문제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 해결되어 당신을 사랑하사 값 주고 사신 복되신 분을 섬기되, 기쁘고 자유로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분산되지 않은 온전한 능력으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죄인을 향해 찢어진 휘장과 어린양의 피와 긍휼의 자리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들어오라“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 그들은 말합니다. ”가까이 나아오라.“ 그들은 말합니다. ”주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방황하는 탕자, 쾌락을 사랑하는 자, 이 땅의 광란의 잔에 취한 자, 이 땅의 헛된 꿈을 꾸는 자들에게 그들은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 집에는 충분한 빵이 있고, 너희 아버지의 마음에는 너희 죄를 용서할 충분한 사랑이 있다.“고 말입니다. 첫 조상이 잃어버린 낙원에서 추방되어 유리하고 방황하는 모든 아담의 자손에게 이러한 상징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선포합니다. ”불타는 검이 소멸되었고,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이 다시 열렸으니 자유롭고 풍성하게 다시 들어갈 수 있도다. 오히려 지금 들어갈 이 낙원은 과거의 낙원보다 더 영광스러우며, 결코 다시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모든 음성들조차 무시해 버리고, 찢어진 저 휘장과 열린 문으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눈물과 통곡과 이를 갊이 있는 바깥 어두움에서 영원히 쫓겨나 절망하며 유리하는 것뿐입니다. 그 때에는 찢어진 휘장 대신에 결코 없어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어둠의 휘장이 쳐질 것입니다. 이 어둠의 휘장은 하나님과 낙원과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당신을 영원히 분리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긍휼의 자리대신 심판석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은혜로운 대성직자 대신 복수의 재판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그분의 두려우신 재림으로 당신의 모든 소망은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시며, 그분의 재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당신이 생각지도 못하는 시간에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당신이 평화와 안전을 말할 그 때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당신이 이 땅에서 길고 고요한 여름날의 쾌락을 꿈꾸고 있을 때 그분은 오실 것입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영원의 문제를 더 이상 소홀히 취급하지 마십시오. 소홀히 취급하기에는 영원의 문제는 너무나 길고 엄청난 문제가 아닙니까? 서두르십시오. 악한 현 세상에 속한 애착을 끊으십시오. 당신의 죄들을 그리스도의 무덤에 매장시키십시오.
완전하신 분의 완전과 의로우신 분의 의로 당신의 혼을 완전히 감싸십시오. 그렇게 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 당신은 현재나 영원에서나 참된 소망을 소유하지 못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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