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

문민규목사(평택)

by 김경호 진실 2013. 1. 3. 09:10

본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해튼(Manhattan) 세계무역센터를 가로지른 항공기 두 대의 충돌로 2,749명의 미국시민이 사망하는 테러가 발생하여 미국을 공포로 몰아 놓은 직후, “뉴욕타임즈” 지에는 의미 있는 논쟁이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문명의 충돌”의 저자인 새뮤엘 헌팅턴, “숙명의 트라이 앵글”을 쓴 노암 촘스키, “근대 세계체제론”의 임마누엘 월러스타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보수와 진보 논객들이 이 논쟁에 참여 했다.

  보수 논객들은 미국의 즉각적 응전을 하려는 미국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논조를 말했고 진보 입장의 논객들은 보복적 전쟁을 준비하려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테러는 극우파에게 하나의 선물”이라며 질타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획일적이고 선동적인 논조가 매스컴을 압도했을 것이다.

  이런 논점이 분명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마이클 왈쩌의 뉴욕타임즈(2001년 9월 21일 자) 기고는 전 세계인들의 지성인에게 기억에 남는 의미를 갖게 했다. 그 사설의 제목은 “야만의 방식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2년도 못되어서 보복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하마트 간디는 반영불복종운동으로 비폭력저항이란 특이한 방법으로 결국 영국의 식민지에서 인도를 해방시킨 역사가 있다. 간디의 이런 저항운동을 갖게 된 근거가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서 라고 한다. 마이클 왈쩌는 아모스서를 통해 사회비판가에 대한 근거를 찾아 예언적(?)으로 말한다. 이렇게 사상가나 정신적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자신의 사상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독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은 말 그대로 저항사상이다. 이 저항 사상을 잘 드러낸 분이 칼빈이다. 그는 제네바의 교회지도자로 있을 때 교회개혁을 통해 제네바 사회까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번번이 칼빈의 사회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칼빈 이후 교회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성경해석의 주도권을 인본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교회는 빛을 잃게 되어 칼빈주의가 가졌던 설득력과 영향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양은 그 영향을 받아 사회 개혁을 꾸준히 추구했으며 지금도 어떤 위기가 오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논조가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교회가 개혁되고 사회를 개혁하는 신앙의 실천적 교회의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한 사회로부터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왜 한국교회는 사회개혁에 대해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까?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 본문을 예로 들면 마태복음 23장 23-24절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여기서 ‘율법의 더 중한 바’에 대한 해석과 ‘소경된 인도자’는 누구이고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있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것이다. 초점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칼빈 그 시대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올곧게 신앙을 세웠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목회의 결실 중의 하나는 선교활동과 시에 도착한 종교적 난민들에 대한 구제활동이었다. 우리는 칼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만 성경해석과 그 적용에서 실패하고 있다. 바르게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 교회가 신앙고백과 더불어 바른 성경해석을 하여 실천적 성도의 길을 부단히 가다가 보면 원래 하나님이 보여주기를 원하신 그 아름다운 교회를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곳에는 기독교인이 있기에 그곳에는 정의가 드러나고 긍휼이 베풀어지고 신의가 편만한 곳이 되었으면 한다. (기독교개혁신보 2012년 9월18일 자)

출처 : 교회와 성경
글쓴이 : 문래 원글보기
메모 :
728x90

관련글 더보기